[불교 이슈 있수다]
불광미디어는 뉴스레터 형식의 ‘이슈 있수다’에서 매주 불교계 뉴스 가운데 이슈를 골라 소개합니다. 분초를 다투고 쏟아지는 많은 뉴스 속에 꼭 되새겨볼 만한 뉴스를 선정, 읽기 쉽게 요약 정리해 독자들과 수다를 나누듯 큐레이션 합니다.
이번 주 이슈
1. 대체휴일, 한글날, 세종, 신미대사
10월 9일은 한글 창제와 반포를 기념하는 날, 한글날이에요. 우리에게 10월 11일 대체휴일을 안겨 준 고마운 날이기도 합니다. 한글이라고 하면 세종대왕부터 떠오르는데요, 과연 한글은 세종대왕 혼자 만든 글자일까요? 아니면 집현전 학자들과 만들었을까요? 불교가 깊이 관여했다는 이야기까지 이번 주 수다로 준비했어요.
첫 번째 이슈 있수다 | 송강호와 한글 만든 박해일?
세종대왕과 신미대사의 *콜라보
방탄소년단(BTS)은 할시, 록밴드 콜드플레이 등 유명 팝 뮤지션과 콜라보를 할 정도로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이에요. 이보다 훨씬 앞선, 상상하기 힘든 콜라보로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를 만든 사람들이 있어요. 바로 세종대왕과 신미대사입니다.
*콜라보(collaboration) : 목표 달성을 위해 일시적으로 함께하는 작업.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했잖아
맞아요! 조선의 4대 왕인 세종대왕이 주도해서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반포한 우리나라의 고유 문자예요. 1443년 완성해 3년 동안 시험 기간을 거치고, 1446년에 세상에 반포됐어요. 세계의 여러 문자 가운데 만든 사람과 반포 날짜를 알리고 글자의 원리까지 밝힌 문자는 한글이 유일하다고 해요. 제작 원리가 담긴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에 지정됐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됐어요.
*반포(頒布) : 세상에 널리 퍼뜨려 모두 알게 함.
그런데 불교 도움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유력한 학설 중 하나에요. 한글 창제 과정을 연구해온 국어학자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는 『한글의 발명』과 『동아시아 여러 문자와 한글-한글창제의 비밀을 밝히다』에서 한글 창제에 큰 도움을 준 것은 *학승들이었고, 『훈민정음』 언해본이 불서(佛書)인 *『월인석보』에 실려 있는 게 우연이 아니라고 했어요. 이와 관련해 법보신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463)에서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어요.
*학승(學僧) : 경전이나 교리 및 학문을 널리 아는 스님.
*『월인석보(月印釋譜)』 : 조선 7대 왕 세조가 세종의 「월인천강지곡」과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을 합해 1459년 간행한 불서.
집현전 학자들과 만든 거 아냐?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요. 반면 1443년 한글 창제까지 집현전 학자들조차 그 사실을 모를 정도로 비밀 프로젝트였어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엄청난 반대를 했고요. 그래서 세종대왕과 집현전의 일부 소장학자 그리고 신미대사 등 학승들이 협업해서 만들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어요. 정광 교수는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세종은 요동으로 유배된 명나라의 음운학자인 황찬의 의견을 구하고자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소장학자를 여러 차례 보냈다고 해요.
다만 집현전 실무책임자 부제학 최만리의 격렬한 반대 상소가 있는데, 이는 집현전의 중론이 반대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세종대왕이 신뢰할 만한 일부 학자만 호출했다는 설명이에요. 그런데 성삼문은 한글이 거의 창제될 무렵에 집현전에 들어왔고, 한글 창제 2개월 전에 집현전에 온 신숙주는 다음해 일본으로 가서 한글 창제에 관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창제를 도운 인물이 신미대사였어?
정광 교수 인터뷰에서 계속 살펴보면 불교를 배척하는 가치관에 충실한 조선은 신미대사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네요. 하지만 팔만대장경을 공부하고 산스크리트(범어)에도 조예가 깊은 학승에 가까운 게 신미대사에요. 정광 교수는 “신미는 훈민정음 창제 전체를 도맡았다기보다는 후반 과정에 참여해 모음 11자를 만드는 데 공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어요.
한글 창제를 도왔다는 근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우선 몸이 약한 세종대왕 혼자서 한글을 창제하기 어려웠다는 거예요. 정광 교수가 학계의 찬반 논쟁을 일으킨 파격적인 주장으로, 한글이 산스크리트(고대 인도어인 범어)에서 착안했다는 점, 한글 창제 후 실험적으로 만든 책들이 모두 불서인 점, 세종대왕 후 왕위에 오른 문종이 신미대사에게 1450년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의 26자에 이르는 긴 법호를 내렸다는 점 등이 있어요.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줘
∙산스크리트에서 착안 : 수많은 모방설 중 하나인 점은 감안해야 해요. 그러나 한글조선 전기 유학자인 성현이 『훈민정음』 반포 후 몇십 년 뒤 『용재총화』를 쓴 조선 전기 유학자 성현, 『지봉유설』을 쓴 조선 중기 이수광, 조선 후기 학자 황윤석과 이능화 등은 한글이 산스크리트를 본떴다고 기록해놓고 있어요. 표음문자인 한글의 음운 체계가 산스크리트와 비슷하다는 주장도 있어요. 자음의 기본을 이루는 아음, 설음, 순음, 치음, 후음 등 5가지 음운 체계가 산스크리트에도 그대로 있다는 거예요.
∙한글 창제 후 나온 불서들 : 『석보상절』, 『능엄경 언해』,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등 세종 때부터 연산군 때까지 한글로 발간된 문헌 절반 이상이 불서라고 해요. 한글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민중과 가까운 불교로 파고든 고도의 전략이기도 해요. 그런데 24권이나 되는 『석보상절』은 한글이 정식으로 반포되기 전부터 한문본이 편찬되고 번역까지 1년도 안 된 사이에 완료됐어요. 그래서 국어학자 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이러한 사업을 위하여 한글 반포 이전부터 불교에 정통하고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의 운용법과 표기법에 통달하고 있던 인사들이 있어서 이 사업을 추진했다는 증거”라고 했고요. 여기서 세종대왕과 가까이 지냈다는 신미대사가 주목받았죠. 당시 불교 경전은 산스크리트로 기록된 게 많았어요. 신미대사는 한자로 번역한 내용에 오역이 많다고 느껴 산스크리트와 티베트어 등 5개 언어를 독학했다고 해요.
∙문종이 내린 법호 : 사실상 세종대왕이 내린 법호에요. 유언으로 문종에게 법호를 내리게 한 거예요. 문종은 즉위 2개월도 안 돼 신미대사의 *제수를 거론했다고 해요. 앞서 세종대왕이 제수하고자 했으나 신미대사의 병으로 미뤄졌으니 지금이 마땅하다고 했는데, *졸곡 후 제수하자는 신하들 만류로 관뒀어요. 결국 문종은 3개월 뒤인 1450년 7월에 법호를 내렸어요. 법호 중에 ‘우국이세(祐國利世)’에 주목하는데,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는 말은 아무에게나 사사로이 쓸 수 없다고 해요. ‘존자(尊者)’라는 표현도 큰 공헌이나 덕이 있는 스님에게 내리는 칭호였는데, “개국 이후 이런 승직이 없었고 듣는 사람마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고 실록이 기록하고 있어요.
*제수(除授) : 추천 절자를 밟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리던 일.
*졸곡(卒哭) : 사망 3개월 후 지내는 제사.
세종대왕과 신미대사가 가까웠어?
정식 사료는 아니지만 신미대사의 가문인 영산 김씨 족보에는 ‘수성이집현원학사득총어세종(守省以集賢院學士得寵於世宗)’이란 문구가 있다고 해요. 집현원 학사를 지냈고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다는 뜻이에요. 수성은 신미대사의 출가 전 이름이고요. 신미대사가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은 건 사실이에요. 세종대왕은 신미대사가 있던 속리산 복천암에 불상을 조성하고 시주도 했어요. 승하하기 불과 20일 전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러 예로써 대우했다는 실록의 기록도 있다고 하네요.
그럼 왜 한글 관련 신미대사 기록은 없어?
신미대사와 한글 창제 관련 기록이 없는 건 사실이에요. 세종대왕도 직접 밝히진 않았고요. 신미대사가 한글과 관련 있다고 보는 학자들 해석은 이래요.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당시 상황과 스님이 관여했다는 게 알려지면 사대부의 반발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어요. 사대부 반발을 잠재우고 신미대사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고 한글을 반포하기 위한 세종대왕의 배려라는 거죠.
신미대사는 어떤 스님이야?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워서 10대 후반에 조선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에서 공부했어요. 그런데 관직에 있던 아버지 김훈이 불충불효 죄목으로 탄핵을 받는 등 상황이 안 좋아졌죠. 여러 번민 끝에 불자 집안에서 자란 신미(信眉, 1405?~1480?)대사는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했고, 최고의 학승이 됐다고 하네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뒤 세종과 문종의 여러 불사를 도왔고,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전을 번역하고 간행했을 때 이를 주관했어요. *『석보상절』의 편찬을 이끌었고, 큰스님들의 법어집을 한글로 직접 번역하기도 했고요. 신미대사가 없었다면 한글로 된 많은 문헌이 없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어요.
*『석보상절(釋譜詳節)』 : 세종 28년인 1446년에 수양대군이 왕명으로 소헌왕후 심 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쓴 책. 당나라 도선의 『석가씨보』, 양나라 승우의 『석가보』, 『법화경』, 『지장경』, 『아미타경』 등에서 뽑아 한글로 풀이한 부처님 일대기.
세조와도 친했다는데 사실이야?
네 맞아요. 신미대사는 주로 복천암에 머물렀어요. 영화 <관상>에서 배우 이정재가 “내가 왕이 될 상인가?”라고 연기한 그 수양대군과 가까웠어요. 세조가 된 수양대군이 신미대사를 만나러 *순행한 곳이 속리산 복천암이에요. 복천암은 세종대왕이 이곳을 원찰로 삼겠다며 중건을 당부했던 사찰이기도 하고요.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경을 번역하고 간행할 때 신미대사가 주관했어요. 『석보상절』 편집을 물론 많은 불서를 한글로 직접 번역했고요. 세조가 신미대사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답니다.
*순행(巡幸) :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
*1970년대 발견돼 이호영 단국대 교수가 학계에 소개한 편지라고 해요.
“순행 후 서로 있는 곳이 멀어지니 직접 목소리를 듣고 인사드리는 일도 이제 아득해졌습니다. 나라에 일이 많고 번거로움도 많다보니 제 몸의 조화가 깨지고 일도 늦어집니다. 그렇다고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항상 부처님께 기도를 해주시고 사람을 보내어 자주 안부를 물어주시니 다만 황감할 뿐입니다. 행여 이로 인해 제가 멀리서 수행에 전념하고 계신 스님에게 폐를 끼치고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은 아닐까 두렵습니다. 원각사의 일은 널리 들으신 바와 같고 끝까지 서술하기는 곤란합니다. 저의 지극한 정성에 부응해 스스로 편안하게 머무르시기를 바라옵니다. 금을 보내드리오니 좋은 곳에 쓰시기를 바라며, 불개(佛盖)와 전액(殿額) 그리고 향촉 등 물건을 아울러 받들어 올립니다. 조선국왕”
영화로 본 것 같은데?
세종대왕 역에 배우 송강호가, 신미대사 역에 배우 박해일이 열연한 영화가 있어요. <나랏말싸미>에요. 한글 창제라는 비밀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완성한 세종대왕 곁에 조력자가 있었고, 신미대사를 등장시킨 영화에요.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주인공이 아니라, 결정적인 조력자이자 두드러진 인물이라는 점을 상상력을 더해 영화로 만들었죠. 그런데 마치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주연처럼 보였는지, 여러 논란 끝에 큰 빛을 보지는 못했어요.
한글날에 볼만한 다른 영화는?
<말모이>를 추천해요. 영화 제목 ‘말모이’는 ‘말을 모은다’는 뜻이에요. 1940년대 일제강점기에 조선어학회가 전국의 우리말을 모으는 과정에서 일어난 수많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어요. 1933년 주시경 선생의 사망 이후, 주시경 선생이 집필해온 원고를 전달받은 류정환이 10년 동안 전국의 우리말을 모으며 해방 후 1947년 『우리말 큰 사전』을 완성하는 실화가 바탕이에요.
이번 수다는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한글을 다시 한번 생각해봤어요.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노력으로 한글이 탄생하고 널리 사용되는 게 모두의 노력이 있었다는 수다였습니다. 그럼 다음 수다를 기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