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관음의 금빛 대자대비
어둠의 장막이 걷히기 세 시간 전, 아직 세상은 잠들어 있다. 남해 최고의 일출 명소로 꼽히는 해를 향한 암자 향일암(向日庵)을 가기 위해 숙소에서 이른 채비를 마친다. 여수 끝자락에 있는 향일암은 금오산과 바다가 맞닿은 기암절벽 중턱에 자리해 왼편으로는 한려해상국립공원 섬들이, 오른편엔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섬들이 펼쳐져 장관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계단 길을 올라 일주문을 지나니 조성된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등용문이 이곳이 한국의 4대 관음성지이자 소원성취 관음기도 도량임을 실감하게 한다. ‘누운 바위는 법당의 초석이 되고/일어난 바위는 출입구가 되어 이룬 그곳’이라는 소개글처럼, 향일암은 표면이 거북등처럼 갈라진 기암괴석이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곳이다. 해탈문도 거대한 바위 두 개 위에 또 다른 바위 하나를 얹어 놓은 형국이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그 좁은 통로를 비집고 들어가니, 바위를 타고 흘러내린 물이 가을 문턱에 머물러있는 늦더위를 시원하게 날려준다. 계단을 몇 오르니, 염주를 목에 건 돌거북들이 반긴다. 깜깜한 어둠 속, 눈먼 거북이처럼 계단을 조금 더 딛고 올라서니 바다를 향해 전망이 확 트인 원통보전 앞마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망망대해의 새벽을 깨우는 도량석이 시작된다. 이른 아침 생계라는 파도를 헤치고 조업에 나선 고깃배, 반짝이는 LED 부표만이 바다에서 희미한 빛을 낼뿐, 세상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다. 스님의 목탁소리는 도량을 한 바퀴 돌아 간절히 기도하듯 제 심지를 사르는 공양대 위 소원양초 앞을 한동안 머문다. 어둑한 안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뱃고동, 바람에 흔들리는 물고기 풍경, 파도소리가 목탁소리와 함께 칠흑 같은 적막을 몰아내고 있다. 이내 종각의 범종소리가 울리며 곧 태양이 떠오를 동쪽 바다를 향해 퍼져나간다.
바다에서 육지로 불어오는 갯바람이 뺨을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다행히 엊저녁 내린 비는 그쳤지만 구름은 아직 물기를 머금었는지 바람에서 묵직한 습도가 느껴진다. 원통보전 뒤편으로 50m 떨어져 자리한 관음전 쪽에서 기도소리가 들린다. 원효대사가 바다를 향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도했던 좌선대와 해수관세음보살입상이 있는 곳이다. “서울 XX구, 갑신생 김XX, 임술생 이XX, 만~사~형통, 건강~기원, 업장소멸….” 스님의 축원기도가 한창인 관음전 댓돌 아래, 관세음보살의 화신일까, 메뚜기 한 마리가 숨죽여 듣고 있다.
고해(苦海)의 파도소리가 바다와 면한 향일암 도량으로 끊임없이 밀려들어 온다.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구하는 그 진실하고도 간절한 고해 소리들은 금빛 소원지로 변해 도량 여기저기에 가득 매달려 있다. 소원지들은 대개 ‘TO 부처님’, ‘TO 관세음보살님’으로 시작해 함께 축원하는 이들의 이름을 먼저 적은 뒤 가장 마지막에 ‘FROM’을 붙여 발원자의 이름을 남기고 있다. 나의 출세, 재물, 행복만이 아닌 코로나19 소멸과 가족, 친지, 연인 등 모두의 행복과 안녕을 비는 소원들. 바람에 나부끼는 그 기도들은 나와 너를 구분하는 시시비비에 빠지지 않고 서로 부대끼며 금빛을 나누고 있다. 마치 중생의 원을 하나하나 굽어살피며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관음의 대자비를 닮았다.
어느새 도량 안으로 가족, 연인,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일출을 기다린다. 이윽고 태양이 솟아올라 사위를 밝힌다. 그 빛은 잔잔한 물결을 가로질러 도량에도 내린다. 순식간에 일출의 광명이 만물을 감싼다.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일심으로 부르면 언젠가 자비의 광명이 일순간 찾아온다는 듯이, 나의 기도가 우리를 위한 간절한 기도가 될 때 모두의 원은 이미 다 성취된다는 듯이, 순간 이 세상 모든 게 다 금빛이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