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 일정으로 남원을 거쳐 지리산을 다녀왔다.
남원에 왔으니 보물 4점이 있는 만복사터를 그냥 지나치는 건 예의가 아니다.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창건된 만복사는 남원의 대표사찰로서 김시습이 방대한 이 절을 무대로 <만복사저포기>를 지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사세를 유지해 남원 8경의 하나로 ‘만복사귀승’도 들어있을 정도였다.
탁발과 시주를 마치고 만복사로 돌아오는 스님들 수백 명의 행렬이 볼 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유재란으로 진주성이 무너지자 전라도도 왜군에게 짓밟히기 시작했고 드디어 남원성도 왜군에 포위됐다.
남원이 무너지면 바로 전주로 올라가니 명군과 조선군도 남원에 집결했다.
전라병마절도사(지금의 전라도 육군사령관) 이복남은 이미 왜군에 포위된 남원성을 수하 장졸 1,000여 명을 이끌고 보무도 당당히 군악을 울리며 남원성으로 들어갔다.
왜군도 어안이 벙벙해 조선군에 길을 터주었다.
이미 죽음을 작정하고 죽으러 가는 길이었다.
왜군은 5만 6,000명, 조선군은 군관민 모두 합해 1만여 명이었기 때문이다.
이날이 1597년 8월 11일이었다.
그래도 만여 명의 조선연합군은 닷새를 버텼다.
명나라 장수 양원은 도망가고 이복남은 미리 준비해 놓은 불섭에 뛰어 스스로 자결했다.
왜군에 도륙당한 만여 명의 시신은 전쟁이 끝난 뒤 남원 백성들이 유골을 모아 무덤을 만드니 바로 ‘만인의총’이다.
죽을 자리임을 알고도 끝까지 사수한 조선군의 의기를 남원에 와서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만복사터에는 이제 향화를 받들던 인적은 끊어졌다. 너무 방대해 전쟁 후에도 제대로 복원할 수가 없었다. 왜군이 절 앞길로 해서 남원성 서문으로 갔다.
왜군이 지나가며 절을 그대로 둘 리 없어 모두 태웠고 석물만 남았다. 오백나한전도 탔고 사천왕상은 수레에 싣고 가 남원성 공격에 시위용으로 썼다.
만인의총은 남원역 인근에 있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제사 금지를 당했다. 박정희 대통령 때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성역화했다.
남원 하면 광한루요, 광한루 하면 춘향과 이도령이 빠질 수 없다. 옥황상제가 산다는 월궁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에서 이름을 따 왔다.
광한루원 조경의 아름다움은 1582년 전라도관찰사로 내려온 송강 정철의 솜씨다. 그는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파고 삼신산 섬을 앉혔다.
삼신산을 지고 있다는 신화 속의 거북도 안치했고 각 섬에는 배롱나무, 대나무를 심고 정자도 지었다. 광한루 동쪽에는 열녀 성춘향의 사당이 있다.
토끼를 태우고 용궁으로 가는 자라의 모습이 목각으로 만들어져 춘향사당 현판 아래에 안치돼 있다. 화재방지의 뜻을 갖고 있으며 광한루에도 또한 있다.
성안의(1561~1628) 선정비. 그는 의병장으로 활동했으며 전쟁 후 남원부사로 내려와 4년을 근무했다. 그의 아들 성이성이 이몽룡의 모델이라 한다.
광한루 뒤쪽 ‘호남제일루’ 현판 끝 위의 거북 조각. 임진왜란 후 지은 건물에는 이처럼 화재방지를 위해 물에 사는 거북을 설치하기도 한다.
변화무쌍한 광한루 뒤편에는 누각으로 오르기 위한 여러 층단의 복도형식인 월랑(月廊)이 붙어있다. 잘 지고 있으라고 화반에 코끼리도 조각해 놓았다.
남원에서 운봉으로 넘어가는 여원치 고개 아래 마애불. 수많은 인마가 마애불 앞 옛 도로를 지나며 안전을 빌던 곳으로 이성계, 이순신도 지나간 길이다.
어휘각은 이성계가 인월 황산에서 왜구를 섬멸한 후 바위암벽에 함께 싸운 8원수 4종사의 이름을 새겨 놓은 유적이다. 1945년 일제가 훼손했다.
서해안을 올라온 왜구들의 배 500척은 연포(지금 군산)에 정박해 있었고 최무선의 화포로 무장한 100여 척의 고려 수군은 이를 모두 침몰시켰다.
배에서 살아남은 자와 육지의 왜구가 지리산에 집결해 세력을 과시하자 이성계가 이를 모두 섬멸해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 일제가 훼손한 황산대첩비.
글자를 정으로 쪼아 지웠기 때문에 새로운 비석을 만들고 1957년 옛 귀부 위에 다시 세웠다. 원 황산대첩비는 선조 때인 1577년에 세웠었다.
귀부와 이수도 여러 토막으로 떨어져 나갔었다. 목도 부러져 나간 것을 다시 부쳤다. 일제가 1945년 1월 17일 폭파함으로써 수모를 당한 것이다.
처음 만들었을 당시에는 솜씨 있는 장인들이 참여했을 것이다. 거북의 발가락 하나를 세워서 구부린 듯이 조각해 생동감을 높였음을 알 수 있다.
뱀사골은 지리산 반야봉과 토끼봉 사이에서 반선마을까지 약 9.2km에 이르는 구간이다. 이무기가 죽은 골짜기라 해서 뱀사골이라 부른다는 전설이 있다.
뱀사골 끝의 하늘 아래 첫 동네 와운(臥雲)마을. 그 이름답게 구름이 누워서 지나가는 마을이다. 마을의 수호신 천년송 할머니다. 수령은 500년쯤 된다.
할머니 나무 위쪽의 할아버지 나무다. 매년 정월 초사흗날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 두 나무에 당산제를 지낸다.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것이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