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발견한 부부의
희로애락
희(喜)-영험한 골짜기서 나온 석불상
강원도 영월과 충북 단양군 경계이자 소백산맥 줄기의 일부인 삼태산 초로봉 해발 400m 지점. 수풀이 우거져 길 하나 나 있지 않던 산기슭 골짜기에 한때 언론사, 고고학자, 문화재청 직원들이 몰려들어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귀한 보물(석불상)들이 무더기로 출토됐기 때문이다.
‘무덤치 절터’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절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던 이곳에 김병호·강남순 부부가 들어 온 때는 1998년. 정년퇴직으로 50대 나이에 다니던 시멘트 회사를 나와야했던 김병호 씨는 무속인이었던 아내를 따라 전국의 기도처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운명처럼 이곳을 발견했다.
사실 창령사 터를 만난 건 부인의 영험한 꿈 덕분이었다. 집안에 우환이 많아 무속인이 된 강남순 씨는 남편과 두 아들이 크고 작은 사고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고부터 부처님을 모시기 시작했다. 그즈음이었다. 꿈에 매번 어느 큰 산 깊은 골짜기가 나왔고, 셀 수 없이 많은 부처님, 스님, 신도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는 장면을 봤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던 부인은 기도처를 마련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꿈에서 본 듯한 이곳에 정착해 기도를 드리기로 했다. 그런 부인을 위해 길을 내고 비닐과 토판으로 움막을 지어준 김 씨는 자신도 3일 뒤 소복을 입은 할머니를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 길로 퇴직금으로 이 밑 입구서부터 위의 땅까지 다 샀어요. 그리고선 암자를 지으려고 길을 내고 터를 닦았어요. 배수로 작업을 하려고 땅을 파는데 돌이 걸려 나와요. 돌이 동그래. 두 번째 돌도 그래. 흙뭉텅이여서 물에 씻어 보니까 나한분들이야. 말로 못다 할 정도로 감격스러웠죠.”
노·애(怒·哀)-영월군 남면 창원리 1075번지
부부는 이런 석불상을 어느 사찰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단번에 그 가치를 알아봤다. 단단한 화강암에 소박하고 투박하게 새겨진, 어느 것 하나 똑같은 표정이 없는 나한상들. 희로애락이 다 담긴 표정들에서 부부는 아마도 깨달은 듯한 한결같은 얼굴을 봤을지 모른다.
성인 무릎 높이쯤 되는 35~45cm의 무거운 돌상 100여 점을 하나하나 파내고, 정성스레 물로 씻고 닦아내 비닐하우스에 거뒀다. 온전한 것도 있었지만, 훼손돼 두 동강 난 것들도 많았다. 이후 문화재 발굴 비용을 마련한 군과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찾아와 본격적으로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2001년 1차 긴급수습조사와 2002년 2차 발굴조사로 출토한 126점이 김 씨의 것과 합쳐져 총 317점의 나한이 세상에 나왔다. 그때 함께 발견한 기와 조각에 새겨진 ‘蒼嶺’이란 문자로 이곳이 고려 12세기 무렵 세워진 창령사 터였음을 알게 됐고, 절터를 고증해 9평 남짓의 법당을 지었다.
“출토된 나한상들 모두 국립춘천박물관으로 옮겨져 복원처리를 마친 뒤 전시회에서 공개됐어요. 영월, 서울, 부산 순회전 후 지금은 춘천에 있는데 아마 미국에서도 전시할 계획이 있나 봐요. 춘천에서 전시를 본 분들이 이곳 창령사지에도 종종 들르세요. 법당에 모셔진 17점의 나한상들은 비록 복제본이지만, 손님들이 ‘이분은 나를 닮았어, 나를 닮은 분이 계셔서 너무 좋아’라면서 좋아해요. 그리고 ‘여기서 기도하고 가면 잘 들어주신다’며 꼭 한 가지씩 소원을 빌고 가요.”
아내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김 씨에게 나한상 전시를 본 소감이 남달랐을 것 같다고 하자 그가 눈시울을 붉혔다. 최근 영월에서 개최한 전시 리플릿 뒷면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한상 얘기할 때마다 눈물이 나 못 배겨요. 영월에 제대로 된 박물관 하나 없어서 이런 문화재를 출토 지역이 아닌 저 먼 춘천에 모셔야 한다는 게 너무 서글퍼요. 최소한 영월에서 전시할 때는 약도에 창령사지 위치라도 있어야 하는데…. 소중하고 가치 있는 곳을 왜 이렇게 소홀히 하는지 모르겠어요.”
‘강원도 영월군 남면 창원리 1075번지, 도로명 주소는 담터길 256번지.’ 전시는 미국까지 진출하는데, 정작 나한상이 출토된 창령사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것 같아 부부는 많이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취재 오는 기자들에게 몇 번이고 이곳 주소를 또박또박 강조한다고.
락(樂)-안녕을 비는 그 누군가의 얼굴
부부가 국가에 기증한, 나한상이 출토된 1,097㎡(332평)의 터에는 풀이 자라고 꽃이 펴 어느새 푸릇한 들판이 됐다. 한때 오백나한과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을 이곳에서 부부는 이제 조용히 농사를 짓고, 법당에서 기도하며 지낸다. 염소와 개, 거위를 기르며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는 조그만 텃밭에서 수확한 수박과 옥수수를 내어준다.
‘창령사 터 오백나한’ 전시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우리네 인생처럼 나한상의 얼굴에도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다고. 밝게 미소 짓는 나한이 있는가 하면, 입꼬리를 내리고 슬픈 표정을 한 나한도 있다. 온화한 표정으로 선정에 든 모습이기도 하다가, 바위 뒤에 숨어 즐거운 표정으로 웃는 얼굴이기도 하다. 김병호·강남순 부부에게도 오백나한의 얼굴이 담겼다. 인터뷰 내내 나한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 문화재 행정에 대한 원망, 창령사지의 가치가 저평가된 데에 슬픔을 내비쳤던 부부가 마지막으로 보여줬던 얼굴은 행복이었다.
부처님의 제자로 수행한 끝에 더는 번뇌하지 않고,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나한. 부부에게 나한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 나한님들 오신 뒤부터는 집안에 우환이 없어졌어요. 식구들 건강도 다 좋아지면서 마음도 많이 안정됐죠. 중생이 소원을 빌면 하나하나 들어주시고 구제해 주시는 영험한 분들이 나한이에요. 저흰 어떤 욕심도 없고 다만 여기가 많이 알려져서 한 번씩 들려 소원도 빌고 성불하셨으면 좋겠어요.”
사진. 정승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