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1얼(원더박스 편집부장)입니다.
책을 만드는 일에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조금 남다른 구석이 있어요. 바로, 세상에 구현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어떤 가치를 책에 담는다는 거죠. 다른 말로 하면, '돈을 버는 일이되 돈만을 보고 달리지는 않는다'쯤 되려나요. 그렇다고 고상한 일이기만 한 건 또 아니지만, 아무튼 책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이 꿈꾸는 무언가를 책을 통해 실현했을 때 (그 책이 너무너무 안 팔려서 손해가 크지만 않다면) 적절한 뿌듯함을 느끼고는 합니다.
이번에 제가 그 비슷한 기분을 느낄 준비를 하고 있어요. «미래를 바꿔 나갈 어린이를 위한 기후 위기 안내서»를 기획하고 편집하면서, '드디어 나도 지구를 생각하는 책을 내게 되었구나!' 하고 조금 감격했거든요.
이왕 생태주의 책을 만드는 김에 되도록 지구를 좀 덜 괴롭히는 책으로 만들어야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어요. 그래서 재생 펄프가 들어간 종이에 인쇄를 하고, 표지에 비닐 코팅을 하지 않는 방법을 찾기로 했죠. 소설처럼 글이 중심인 책은 상대적으로 이렇게 하는 게 쉬워요. 선택할 수 있는 종이의 폭도 넓고, 코팅을 하지 않아도 그림책보다는 덜 상하거든요. 그런데 «미래를 바꿔 나갈 어린이를 위한 기후 위기 안내서»는 판형도 커다랗고, 양장인 데다, 그림이 글만큼이나 비중 있게 들어간 책이라 고민할 것들이 많았죠.
첫째, 검정으로만 되어 있는 1도 인쇄에 비해 컬러 인쇄는 특히 종이를 많이 타서 인쇄 품질이 괜찮은 종이를 찾아야 했어요. 이런저런 자료를 보고 여기저기 묻기도 하면서 드디어 종이를 찾아냈어요. 인쇄 품질도 좋고, 가격도 좀 비싸기는 하지만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고, 무엇보다 재생 펄프가 30퍼센트 이상 들어간 종이였죠. 그런데!!! 수요가 많지 않아 생산이 더뎌서 크기, 두께, 종이 결이 맞는 종이가 없었습니다. 물론 고급 수입지 가운데는 저 세 가지 조건에 맞는 종이가 있기는 했지만, 가격이 몇 배나 되어서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본문을 재생 종이에 인쇄하는 건 포기. 그렇다면 표지에 비닐 코팅이라도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또 종이를 찾아 헤맸죠. 인쇄소에도 물어보고, 다른 출판사에도 물어보고, 제본소에도 물어본 끝에, 수입지지만 가격이 적당하고 오염과 손상에도 강한 종이를 찾아냈어요.
그렇게 종이를 발주하고 드디어 인쇄하는 날. 인쇄소 기장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거 아니겠어요. "이 종이는 양면에 인쇄가 가능한데 보통은 맨들맨들한 면보다는 포근한 질감이 나는 면에 인쇄를 해요. 어느 면에 인쇄하실래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고민을 하다가, "코팅을 하지 않기 위해 이 종이를 선택했으니 좀 더 단단한 맨들맨들한 면에 인쇄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죠. 그렇게 결정하고서 기장의 도움으로 별다른 문제 없이 인쇄를 잘 끝마쳤어요.
그랬죠. 그랬는데!!! 이 종이는 오염에 강하긴 하나 잉크를 덜 흡수하기도 하고, 잉크가 잘 마르지도 않는 거예요. 세 시간쯤 지나자 색이 상대적으로 많이 희미해졌고, 이틀이 지나도 잉크가 덜 말라서 계속 손에 묻어났죠. 색깔이 희미해지는 건 그나마 감당할 만한 수준이어었지만, 잉크가 안 말라서 스치기만 해도 색이 번지는 건 심각한 문제였죠. 이대로 책을 만들면 오염 문제 때문에 자칫 책을 전량 폐기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었어요.
재인쇄냐, 아니면 코팅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멀쩡한 인쇄물을 버리고 다시 인쇄하는 것이 오히려 지구를 더 아프게 하는 일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코팅. 저의 두 가지 바람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인쇄를 마친 지 일주일이 지나니 이제는 다 말라서 슬리퍼 테스트 - 새까매진 슬리퍼 밑바닥으로 스윽 문지르는 것 - 를 꽤 잘 견디고, 예상대로 손상에도 강해졌네요. 하지만 지우개 테스트 - 오염된 부분을 지우개로 지우며 인쇄 품질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지 보는 것 - 에는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지네요.)
그렇지만 독자들에게 지구를 구하자고 손을 내미는 책을 만들었으니 보람을 느끼려고 합니다. 이 책을 위해 몸을 바친 나무들에게 덜 미안해하기 위해, 다음에는 좀 더 준비를 잘하겠다고 다짐도 해 봅니다. 만약 2쇄를 찍게 된다면 비닐 코팅을 하지 않은 책으로 만들겠다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