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간주하는 한역본 『금강경』을 일반 및 전문 사전이나 서적들에서 검색해보면 공통적으로 공(空) 사상, 일체법무아(一切法無我), 무-집착의 보살행 등과 같은 용어나 개념들이 이 경전을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은 한역본이든 범본이든 이러한 표현들이 직간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반야바라밀다’라는 용어를 부각해 언급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산스크리트로 쓰인 『금강경』의 모든 사본을 대조하면서 번역하고 그 내용 전체를 파악해 본 결과, 필자가 생각하는 핵심 개념은 경명을 번역한 ‘금강과도 같은〔법〕을 끊어내는 반야바라밀다’이고, 주된 키워드는 ‘법(dharma)’과 ‘끊어냄’(uccheda)‘ 그리고 ‘반야바라밀다(prajñāpāramitā)’이다.
| 금강경의 화두
이 세 개의 용어로 요약되는 『금강경』의 화두를 크게 두 가지의 질문으로 파악해 보려 한다. 하나는 “법을 끊어낸다는 반야바라밀다는 과연 무엇이고, 어떠한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이고, 다른 하나는 “반야바라밀다에 이르기 위해 법은 어떠한 방식으로 끊어야 하는 것일까?”이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금강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나아가는 경우,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심오한 불교 용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내용의 전개 방식이 조리 있게 짜여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위와 같은 두 개의 질문들로 『금강경』을 이해해 보려 한다. 첫 질문에 관한 내용은 이번 호에서 이야기하고, 두 번째 질문은 다음 호에 소개하기로 한다.
반야바라밀다는 곧 세존 범본 『금강경』에서 prajñāpāramitā는 5회 이하로 등장하며, ‘법-문(法門)’을 뜻하는 dharma=paryāya로 표현되기도 한다. 월간 「불광」 550호에서 소개한 뮬러 계열의 범본들에서 경배 문구가 ‘세존과도 같은 반야바라밀다에게 경배’인 점을 고려할 때, 반야바라밀다는 곧 세존이라는 공식이 나온다. 반야바라밀다를 수식하는 bhagavat-ī-는 보통 그 어원적 의미에 따라 ‘복덕구족(福德具足)-한’으로 번역하지만, 사실 bhagavat란 산스크리트 명사의 경우 반야부에 속하는 경전들 전체를 둘러보아도 ‘세존’ 외의 다른 쓰임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명사에서 파생한 문제의 형용사는 ‘세존과도 같은’으로 번역해야 하고, ‘반야바라밀다는 곧 세존’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고 볼 수 있다.
반야바라밀다는 곧 여래 그리고 이 경전의 17장에서도 여래(tathāgata)가, 모두(冒頭)에서 언급한 경명의 의미와 같이 dharma=uccheda, 즉 ‘법과의 단절’을 나타낸다는 세존의 말씀이 나타나기 때문에, 여래 또한 반야바라밀다라는 해석이 나올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장에서 “수보리야, 만약 여래에 의해 완전하게 깨달아진 그 어떤 법이 실재했다면, 연등불 여래는 나를 ‘젊은이여, 당신은 장차 석가모니라 불리는, 공양을 받을만하고 올바르고 완전하게 깨달은 여래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지 않았을 것이니라”라는 세존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세존은 곧 여래라고 말할 수 있다. 참고로 지난 536호에서 필자가 규정한 반야바라밀다의 의미는 ‘극도의 진여지’라고 밝힌 바 있는데, 본 장에서 여래가 Bhūta=tathatā, 즉 ‘진실한-진여(眞如)’라고 언급되는 장면이 있기도 하다.
종합해 보면 “반야바라밀다는 세존이자 여래이다”라는 정의가 가능하다. 필자가 굳이 이와 같은 공식에 초점을 두려는 이유가 있다. 『금강경』이 반야바라밀다가 과연 무엇인지, 어떠한 것을 나타내는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세존이나 여래와 관련된 내용에서 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전 내에서 이러한 관련 내용이 등장하는 장면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위 그 가운데 하나가 7장에서 무위(無爲)란 표현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세존께서 여래가 터득한 그 어떤 법이 실재하거나 가르쳤다고 하는 그 어떤 법이 실재하느냐는 질문에 수보리 장로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01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02 여래에 의해 터득된 소위 무상의 올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법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03 여래에 의해 가르쳐진 그 어떤 법도 실재하지 않습니다. 04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래에 의해 터득되었다거나 가르쳐졌다는 법은 05 〔실재하지 않기에〕 파악되지도 말로 표현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법은 〔실재하지 않기에〕 법도 비법도 아닌 것입니다. 06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래와 같은〕 성인(聖人)들은 무위적으로 존재해 온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01 yathā․aham․Bhagavan․Bhagavataḥ․Bhāṣitasya․Artham․ājānāmi | 02 na․asti․saḥ․kaścid․Dharmaḥ․yaḥ․Tathāgatena․anuttarā․Samyaksaṁbodhiḥ․iti․abhisaṁbuddhaḥ | 03 na․asti․Dharmaḥ․yaḥ․Tathāgatena․deśitaḥ | 04 tat․kasya․Hetoḥ | yaḥ․asau․Tathāgatena․Dharmaḥ․abhisaṁbuddhaḥ․deśitaḥ․vā | 05 agrāhyaḥ․saḥ․anabhilapyaḥ | na․saḥ․Dharmaḥ․na․Adharmaḥ | 06 tat․kasya․Hetoḥ | asaṁskṛtaprabhāvitāḥ․hi․Āryapudgalāḥ
‘무위적으로 존재해 온’은 구마라집 보리류지(T236a) 달마급타에서 무위-법(無為法), 보리류지(T236b)와 진제의 경우 무위진여-소현현(無為真如所顯現), 현장과 의정에서는 무위-지소현(無為之所顯)으로 번역했다. 여기서 무위는 위의 범본에서 보는 것처럼 산스크리트 수동 과거분사 a-saṁskṛta ‘un-conditioned’를 번역한 것이며, 그 어원적 의미는 대략 ‘(법에 작용하는) 조건/인연을 결여한’ 정도가 된다. 여래 또한 하나의 법이기에 밑줄 친 부분이 한역본들에서 ‘무위-법’이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asaṁskṛta가 반야부 경전들에서 ‘법’을 뜻하는 dharma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 번역이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무위’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필자는 이를 풀이해 주는 『이만오천송반야경』 3장의 한 문구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신다〕 “01 무위의 법성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02 법에는 생겨남도 없고 소멸함도 없으며, 머무름도 머물지 않음도 없느니라. 03〔또한〕 괴로움도 고통도 청정함도 없으며, 줄어듦도 늘어남도 없는 〔그러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니라.”
01 katamā․asaṁskṛtadharmatā․ucyate | 02 yasya․dharmasya․na․utpādaḥ․na․nirodhaḥ․na․sthitiḥ․na․asthitiḥ | 03 na․anyathātvam․na․saṁkleśaḥ․na․vyavadānam․na․hāniḥ․na․vṛddhiḥ
불생 『금강경』에서 법을 이해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할 또 다른 핵심 용어는 바로 불생(不生)이다. 지난 호에서 언급한 17장의 문구를 다시 소개해 보기로 한다.
“‘…여래’라는 이 명칭은 불생의 법성(法性)〔을 뜻하는 것〕 이니라…수보리야 ‘여래’라는 이 명칭은 절대적 불생자(不生者)〔를 뜻하는 것〕이니라.”
‘불-생의 법-성’이란 번역은 산스크리트 an-utpāda=dharma-tā에서 나온 것이며, 달마급다와 현장의 한역본들에서 각각 불생법(不生法)과 무생법성(無生法性)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나머지 한역본들에는 위의 문구들 자체가 빠져있고, 이러한 누락은 투르케스탄과 길기트의 범본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 보면 달마급다와 현장은 뮬러 계열의 범본을, 구마라집·보리류지·진제·의정 등은 길기트 계열의 범본을 번역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 같은 장에서 불생과 관련하여 세존께서 말씀하시는 문구를 하나 더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01 수보리야, 최상의 진실〔이라 함〕은 〔생겨나지 않는다는 바로〕 이 불생이니라. 02 수보리야, 누군가 ‘공양을 받을만하고 올바르고 완전하게 깨달은 여래에 의해 무상의 올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이 터득되었다’라고 말을 하는 자, 04 그러한 자는 거짓〔됨〕을 말하는 것이니라. 05 수보리야, 그는 〔그러한 식으로〕 습득된 거짓됨으로 나를 바라볼 것이니라.”
01 eṣaḥ․Subhūte․Anutpādaḥ․yaḥ․Paramārthaḥ | 02 yaḥ․kaścid․
Subhūte․evam․vadet | 03 Tathāgatena․arhatā․ samyaksaṁbuddhena․anuttarā․Samyaksaṁbodhiḥ±abhisaṁbuddhā․iti | 04 saḥ․Vitatham․vadet | 05 abhyācakṣīta․mām․saḥ․Subhūte․Asatā․udgṛhītena |
위의 모든 문구를 포함하는 뮬러 계열의 범본들과 이에 따른 달마급다와 현장의 한역과 달리, 구마라집·보리류지·진제·의정은 03의 문구-산스크리트로 표기된-만을 보여주는 길기트 계열의 범본들에 따라 번역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욕바라밀다 무위와 불생, 이 두 개의 용어는 범본 『금강경』에서 법과 관련된 단어나 개념,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번역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먼저 이해해야 할 단어들이다. 모든 법이 불생이고 무위적으로 존재한다고 깨달을 때, 또한 제법(諸法)이 유위(有爲)적으로 실재한다고 인식하지 않을 때, 법과의 단절이 가능하다. 궁극적으로 반야바라밀다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맥락의 문구가 14장에서 보이는데, 이는 세존이 인욕-바라밀다(kṣānti=pāramitā)에 관해 이야기하시는 장면이다.
“01 수보리야, 또한 여래가 말한 인욕-바라밀다라는 것은 바로 〔불생의〕 무〔위의〕-바라밀다이니라. 02 그 이유는 무엇일까? 수보리야, 칼링가의 왕이 내게 있는 모든 관절의 살들을 떼어냈을 03 바로 그때 내게는 개체가 실재한다는 인식, 유정이 실재한다는 인식, 중생이 실재한다는 인식, 인간이 실재한다는 인식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04 내게는 결코 그 어떤 인식도 비-인식도 존재하지 않았느니라. 05 그 이유는 무엇일까? 수보리야, 만약 그때 내게 개체가 실재한다는 인식이 존재했다면, 06 당시 내게는 〔왕에 대한〕 분노의 인식도 〔함께〕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니라.”
01 api․tu․khalu․punar․Subhūte․yā․Tathāgatasya․Kṣāntipāramitā | sā․eva․Apāramitā | 02 tat․kasya․Hetoḥ | yadā․me․Subhūte․Kalirājā․Aṅgapratyaṅgamāṁsāni․acchaitsīt | 03 na․āsīt․me․tasmin․Samaye․Ātmasaṁjñā․vā․Sattvasaṁjñā․vā․Jīvasaṁjñā․vā․Pudgalasaṁjñā․vā | 04 na․api․me․kācid․Saṁjñā․vā․Asaṁjñā․vā․babhūva | 05 tat․kasya․Hetoḥ | saced․me․ Subhūte․tasmin․Samaye․Ātmasaṁjñā±abhaviṣyat | 06 Vyāpādasaṁjñā․api․me․ tasmin․Samaye․abhaviṣyat |
참고로 모든 한역본에서 01의 a-pāramitā는 非-(忍辱)波羅蜜로 번역되어 있다.
| 금강경의 구성
이 경전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주는 요인은 핵심 용어들의 심오함 때문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요인은-주의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적절하지 못한 단락 또는 장의 구분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32장 현재 국내에서 『금강경』 관련 서적이나 논문 등 거의 모든 출판물에서는 본 경전이 소제목과 함께 32개의 장 또는 분(分)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길기트 계열의 범본들을 보면 소제목도 장의 구분도 없다. 하물며 한역본들 또한 모두 그러하다. 반면 일본과 중국의 사본들에 기초하여 편집된 뮬러 계열의 범본들은 소제목 없이 32까지 번호 붙임이 되어있다. 비록 본 글을 쓰는 과정에서 이 구분을 따르기는 했지만, 필자는 앞으로 내용의 적절한 묶음으로 조금 더 짜임새 있는 구성을 계획해 볼 것이다.
유래 비교적 짧은 분량의 텍스트를 소제목과 함께 32개의 분으로 나눈 것은 6세기 양(梁)나라의 황태자인 소명태자(昭明太子, 501~531)의 업적이었다고 말하는 게 일반적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왜 하필 32개로 구분했던 것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런데 범본 『금강경』을 번역하면서 들게 된 생각은 이 경전의 내용이 다른 경전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그 경전은 바로 『팔천송반야경』이었다. 두 경전의 유사도를 살펴본 결과 『금강경』 대부분 내용이 범본 『팔천송반야경』의 1장에서 3장 사이에 들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앞선 던진 의문에 대한 어렴풋한 답을 내놓을 수 있을 듯하다. 『팔천송반야경』이 바로 32장으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그가 참조한 경전은 30장으로 구성되는 지루가참의 『도행반야경』(179년 T224)도, 29장으로 구성되는 구마라집의 『마하반야바라밀』(402-412년 T227)도 아니었을 것이다. 소명태자는 과연 존재 여부가 불확실한, 원본에 가까운 범본의 『팔천송반야경』을 보고 『금강경』을 32개의 분으로 나누었던 것일까?
● 다음 호의 내용은 ‘금강경(4) 내용에 관한 이야기 下’이다.
전순환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대학원 졸업.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인도유럽어학과에서 역사비교언어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시작된 한국연구재단 지원 하에 범본 불전(반야부)을 대상으로 언어자료 DB를 구축하고 있으며, 서울대 언어학과와 연세대 HK 문자연구사업단 문자아카데미 강사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팔천송반야경』(불광출판사), 『불경으로 이해하는 산스크리트-반야바라밀다심경』(지식과 교양), 『불경으로 이해하는 산스크리트-신묘장구대다라니경』(한국문화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