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 공로에 대한 은혜를 갚았던 희랑 대사 좌상이 국보가 된다.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9월 2일 고려 시대 고승의 실제 모습을 조각한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이하 희랑대사좌상, 보물 제999호)’을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신라 말 고려 초 활동한 희랑 대사 모습을 조각한 희랑대사좌상은 고려 10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조각[祖師像]이다. 유사한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 고승의 모습을 조각한 조사상이 많이 제작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유례가 거의 전하지 않아 희랑대사좌상이 실제 생존했던 고승 모습을 재현한 유일한 조각품이라는 게 문화재청 설명이다.
건칠 기법(삼베 등에 옻칠해 여러 번 둘러 형상을 만드는 방법)으로 조성된 희랑대사좌상은 육체의 굴곡과 피부 표현 등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평가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신륵사 조사당 목조나옹화상’, ‘부석사 조사당 목조의상대사상’ ‘괴산 각연사 유일대사상’ 등 다른 조각상들과 달리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마르고 아담한 등신대 체구, 인자한 눈빛과 엷게 퍼진 입술, 노쇠한 살갗 위로 드러난 골격 등은 생동감을 그대로 전해 생전 모습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희랑대사좌상의 또 다른 특징은 가슴에 작은 구멍인 흉혈(胸穴, 폭 0.5cm 길이 3.5cm)이 있다는 점이다. 해인사 설화에 의하면 희랑 대사가 다른 스님들의 수행 정진을 돕기 위해 가슴에 작은 구멍을 뚫어 모기에게 피를 보시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며, 희랑 대사의 별칭은 ‘흉혈국인(胸穴國人, 가슴에 구멍이 있는 사람)’이다. 고승의 흉혈이나 정혈(頂穴, 정수리에 난 구멍)은 보통 신통력을 상징하며, ‘서울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1024년, 보물 제1000호)에서도 유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희랑 대사의 구체적인 생존 시기는 미상이지만 949년 이전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학자 유척기(兪拓基, 1691~1767)의「유가야기(游加耶記)」에 따르면 고려 초 기유년(己酉年, 949년 추정) 5월에 나라에서 시호를 내린 교지가 해인사에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근거다. 희랑 대사는 화엄학(華嚴學)에 조예가 깊었던 학승(學僧)으로, 해인사 희랑대(希朗臺)에 머물며 수도에 정진했다고 전한다. 특히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도움을 주어 왕건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해인사 중창에 필요한 토지를 하사하고 국가의 중요 문서를 이곳에 두었다고 한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희랑대사좌상은 조선 시대 문헌 기록상 해인사(解行堂), 진상전(眞常殿), 조사전(祖師殿), 보장전(寶藏殿)을 거치며 수백 년 동안 해인사에 봉안됐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가야산기(伽倻山記)」 등 조선 후기 학자들의 방문기록이 남아 있어 전래경위에 대해 신빙성을 더해준다.
문화재청은 “후삼국 통일에 이바지했고 불교학 발전에 크게 공헌한 희랑 대사라는 인물의 역사성과 시대성이 뚜렷한 제작기법 등을 종합하면 이 조각상은 고려 초 10세기 초상조각의 실체를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이라며 “희랑 대사의 높은 정신세계를 조각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역사, 예술, 학술 가치가 탁월하다”고 국보 지정 이유를 밝혔다.
문화재청은 30일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하고 검토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