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역자 | 자현 지음 | 정가 | 30,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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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 2020-09-01 | 분야 | 불교, 학술 |
책정보 |
592쪽|판형 양장본 152*225mm|책등 두께 28mm ISBN 978-89-7479-840-6 93220 |
붓다와 가장 닮은 한국불교의 고승 한암,
그의 사상과 발자취를 되살리다
국내 최다 박사학위 소지자인 자현 스님(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부 교수)의 다섯 번째 박사학위 논문 『시대를 초월한 성자, 한암』을 책으로 엮었다. 한암 스님(1876~1951)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암울했던 시기에 총 4차례나 교정과 종정으로 추대된,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승(禪僧)이다.
그가 한국불교의 위대한 고승으로 추앙받는 까닭은 선과 교의 가르침을 넘어, 한 치의 어긋남도 허용하지 않는 수행자의 결기를 평생의 삶으로써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깨달은 뒤에도 열반에 들기 직전까지 팔정도의 삶을 살며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남긴 붓다의 삶, 바로 그것이었다. 이 책은 한국불교의 근간을 확고히 다진 한암 스님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종합적이면서도 입체적인 연구를 통해, 현대 한국불교의 나아갈 방향성을 정립하는 데 큰 목적을 갖는다.
저자: 일우자현一雨玆玄 스님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와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율장)와 고려대학교 철학과(선불교), 그리고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건축)·역사교육학과(한국 고대사)·국어교육학과(불교 교육)에서 각각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동국대학교 미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동국대학교 강의전담교수와 능인대학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부 교수로서 교학처장으로 재직 중이다. 또한 월정사 교무국장, 조계종 교육아사리, <불교신문> 논설위원, 한국불교학회 법인이사, 상하이 푸단대학교 객원교수, 문화재청 전문위원(동산분과) 등을 맡고 있다.
인도·중국·한국·일본과 관련된 160여 편의 논문을 한국연구재단 등재지에 수록했으며, 『불교사 100장면』, 『한국 선불교의 원류 지공과 나옹 연구』, 『스님의 공부법』, 『스님의 논문법』 등 4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 저서 가운데 『불교미술사상사론』은 2012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사찰의 상징세계(상·하)』는 2012년 문광부 우수교양도서, 『붓다순례』(2014년)와 『스님의 비밀』(2016년), 『불화의 비밀』(2017년), 『스님, 기도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2019년)는 각각 세종도서, 그리고 『백곡 처능, 조선불교 철폐에 맞서다』는 2019년 불교출판문화상 붓다북학술상에 선정되었다. 이외에 제7회 영축문화대상(학술부분)을 수상한 바 있다.
제1장 서론
제1절. 연구 목적과 선행연구 검토
제2절. 연구 범위와 서술 방향
제2장 한암의 생애와 활동
제1절. 한암의 출가와 오도悟道
제2절. 한암의 교화와 상원사 입적
제3장 한암의 깨달음과 선관禪觀의 특징
제1절. 「일생패궐一生敗闕」의 오도悟道 과정 검토
제2절. 「선문답禪問答 21조」와 한암의 선수행 관점
제3절. 〈계잠〉의 분석과 한암의 선계일치적 관점
제4장 한암의 교육관과 실천방식
제1절. 한암의 종조宗祖 인식과 교육관 검토
제2절. 한암의 교육관 형성과정과 〈승가오칙〉
제3절. 한암의 삼본사수련소 운영과 탄허의 계승
제5장 결론
경허 선사의 깨침을 계승하되
불교의 본질을 바로 세우다
한암 스님(1876~1951)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암울했던 시기에 총 4차례나 교정과 종정으로 추대된,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승(禪僧)이다. 그가 한국불교의 위대한 고승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가장 큰 어른인 종정의 위치에서도, 늘 대중과 함께하면서 청정한 계율 정신을 몸소 실천하며 선계일치(禪戒一致)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평생 조석예불에 빠지지 않았고, 이후 2시간의 관음 정근을 올곧게 서서 참여했으며, 오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했다. 또한 잠자는 시간 외에는 선원의 대중방에서 언제나 반듯하게 지냈다고 한다. 기후위기가 가속화되고 전염병이 창궐하며 4차산업 시대가 목전인 이때,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관점에서 우리가 되새기고 따라야 할 가장 귀감이 되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한암 스님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평가받는 경허 선사의 마지막 제자다. 그러나 두 스님이 살아온 삶의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경허 선사가 자유로운 초탈을 추구했다면, 한암 스님은 엄숙한 성자(聖者)로서의 삶을 견지했다. 한암 스님은 「경허행장(鏡虛行狀)」에서 “경허의 가르침은 배우되 행실은 답습하면 안 된다.”라며 스승인 경허 선사를 비판한다. 경허 선사의 걸림 없는 언행인 무애(無礙)의 행동 방식으로는 한국불교의 미래가 존재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는 사회를 계몽하고 맑혀야 한다’는 불교의 본질에서 경허 선사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암 스님은 깨침에서는 경허 선사를 계승하지만, 삶의 방식은 붓다와 닮아있다.
한때의 기이한 행적이나 기발한 발상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은, 수승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특별함이다. 그러나 평생을 한결같이 기본에 충실하다는 것은, 진정한 수행자이자 성자가 아니라면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한암 스님은 시대의 성자이며, 시대를 초월하는 한국불교의 진정한 사표(師表)다.
수많은 일화로 증명하는
청정승가의 위대한 스승, 한암 스님
종교가 위태로운 시대다. 종교가 우리 사회에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을 전하며 평온과 행복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오히려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비이성적이며 비상식적인 종교계 문제로 사회가 종교를 걱정한다. 이러한 현상은 여러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종교계에 진정한 어른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존경할 만한 어른과 사표가 없는 집단은 슬프다. 이들은 목적과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대를 초월해서라도 어른으로서의 스승을 요청하게 된다. 이런 어른이 바로 일제강점기에 한국불교를 이끌었던 한암 스님이다.
한암 스님은 생전에 여러 감동적인 일화를 많이 남겼다. 스님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일화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1926년 강남 봉은사의 조실로 있을 당시 시류의 번잡함을 싫어해, “내 차라리 천고(千古)에 자취를 감춘 학(鶴)이 될지언정, 춘삼월(春三月)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다.”라는 게송을 남기고 오대산으로 은거한 일화.
②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초, 일본 총독 미나미(南次郞)의 총독부 초청 요구를 ‘산문을 나서지 않는다’는 수행 원칙으로 단번에 거절한 사건. 이후 미나미가 부총독격인 정무총감 오노로구이치로(大野祿一郞)를 보내, “이번 태평양전쟁에서 어느 나라가 이길 것인가?”를 묻자, 한암은 묵연히 “덕 있는 나라가 이긴다[덕자승(德者勝)].”라고 답한다. 이 말에 감복한 정무총감이 일생의 지침 글을 적어달라고 하자, 즉석에서 “마음을 바르게 하라[정심(正心)].”고 써주었다. 이는 현실을 넘어서 있는 담대한 선승의 기개를 잘 나타내준다.
③ 1951년 1·4후퇴 과정에서 국군이 오대산의 모든 사암(寺庵)을 소각하고 상원사를 불태우려고 찾아온다. 이때 한암은 가사·장삼을 수하고 법당에 정좌한 후, “군인은 명령을 따르면 되고, 승려는 죽은 후 화장하는 것이니 어서 불을 지르라.”고 했다. 이 높은 기상은 이후 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수록된다.
④ 한암 스님은 1926년 오대산 상원사 선원에 주석하였는데, 이후 입적하는 1951년까지 26년간 산문 밖을 나서지 않고[불출동구(不出洞口)] 오직 참선과 후학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제자들이 피난을 종용하자, “앉아서 생사를 맞을 뿐[좌당생사(坐當生死)]”이라고 하며, 제자들만 피난 보낸 후 1951년 3월 22일 오전 8시에 단정히 앉아서 영원한 선정에 든다[좌탈입망(坐脫立亡)].
이러한 일화들은 단 한 가지도 일반인들이 따라 하기 어려운, 거룩한 성자의 자취다. 한암 스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불교도 없을지 모른다. 1930년, 한암 스님은 일제의 불교통합 음모를 분쇄하는 차원에서 통합종단인 ‘해동조계종’을 제창하였다. 이때 도의를 종조(宗祖), 지눌과 보우를 중흥조(中興祖)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한암 스님의 주장은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의 창종에까지 계승되어 이어진다.
한암 스님이 남긴 위대한 유산과
한국불교의 희망찬 미래 비전
한암 스님은 시대를 대표하는 선사인 동시에 선을 중심으로 하는 승가교육을 직접 주도하며 실천에 옮긴 인물이다. 선불교를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승가교육이 먼저임을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선사상과 더불어 실천을 동반하는 교육사상에 대한 검토는 한암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불가결의 요소다. 특히 이와 같은 체계적인 교육자로서의 위상이 동시대의 다른 선사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암의 선사상과 연관된 교육사상에 대한 검토는 한암을 이해하는 핵심이 된다.
한암 스님은 선수행의 차제를 정리하고, 5가지 승려의 기본 덕목(참선·염불·간경·의식·수호가람)인 〈승가오칙(僧伽五則)〉을 제정하는 등 불교의 외연 확대와 교육적인 측면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한암 스님의 교육적인 역량이 빛나는 순간은 오대산 상원사 선원에 삼본사승려연합수련소(三本寺僧侶聯合修練所)를 설치했을 때다. 이때 한암은 손수 교재를 재편하고 현토를 달며, 직접 지도하는 교육자적인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총 4차례나 교정과 종정을 역임한 한암 스님의 선(禪)·교(敎)·율(律)을 아우르는 청정한 행동 양식과 수행력, 그리고 승가교육에 대한 열정은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독보적인 경지다. 한암 스님이 살아온 삶의 자세와 역정은 그 자체로 현대 한국불교가 본받아야 할 이정표가 되었다. 한암 스님이 남긴 위대한 유산을 통해, 한국불교에 북극성과 같은 밝은 좌표가 보다 뚜렷해지기를 기대해본다.
한암은 시대를 대표하는 선사인 동시에 특징적인 교육관을 토대로 선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직접 주도하며 실천에 옮긴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선사상과 더불어 실천을 동반하는 교육사상에 대한 검토는 한암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불가결의 요소이다. 특히 이와 같은 체계적인 교육자로서의 위상이 동시대의 다른 선사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암의 선사상과 연관된 교육사상에 대한 검토는 한암을 이해하는 핵심이 된다고 하겠다. -32쪽
한국불교는 1926년부터는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본사本寺 주지까지도 공식적인 대처가 용인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이는 한국불교 전통의 독신승단이라는 청정한 기반이 완전히 붕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종단의 수장인 한암의 〈계잠〉을 통한 의식 환기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왜색화에 대한 종도의 참괴심慙愧心을 발하게 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며 의미 깊은 일로 판단된다. 특히 한암의 종조론宗祖論과 종명宗名의 주장에서도 확인되는 것과 같이, 한암은 일본불교와 변별되는 한국불교만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이를 천명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37쪽
한암은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를 대표하는 당대 한국불교의 최고 선사이다. 이런 위치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한암은 선사임에도 불구하고 교육과 계몽에 대한 깊은 고민과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이는 한암만의 선사상과 교육철학을 확립하도록 한다. 특히 이와 같은 한암의 관점들이, 1941년에 창종되는 조선불교조계종에 반영되고 이것이 오늘날의 대한불교조계종으로까지 일정 부분 연결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암에 대한 검토는 곧 일제강점기와 현대불교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측면에서의 높은 연구 의의를 확보한다고 하겠다. -41쪽
한암은 진실한 선수행은 화두와 반조를 가릴 것 없는 투철함에 존재하는 것이며, 이런 논의는 모두 투철함의 부족함일 뿐이라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정에서의 차이가 아닌 보다 본질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게 되면 깨달아 활발자재한 대자유인이 되어 모든 문제가 사라짐을 역설하고 있다. 즉 한암은 오로지 진실된 참선수행만을 말할 뿐이다. 이는 마지막의 “심원재자언深願在玆焉”이라는 말을 통해서 자못 분명해진다. -214쪽
한암은 경허를 사법했지만, 경허는 깨달음이라는 주관에 매몰되어 윤리 즉 계율 문제에 있어서는 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경허를 깊이 신뢰하고 의지했던 한암은 이러한 경허의 문제를 해소할 필연성이 있었다. 또 한암이 주로 활동했던 일제강점기는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대처와 육식이 일반화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문제의식 속에서 한암은 붓다의 삶의 태도에서 확인되는 선계일치의 관점을 환기한다. 이는 선계일치가 한국불교의 청정한 독신의 정통성과 경허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한편, 선불교의 타당성 및 일반화를 이룩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262쪽
한암의 교육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눌과 혜능의 영향을 받은 전선후교前禪後敎의 관점이다. 불교를 흔히 합리적인 종교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축軸의 시대(Age of Axis)’에 발생한 인간의 이성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의미일 뿐, 이것이 곧장 과학과 같은 합리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인간의 행복에 집중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73쪽
한암은 일제강점기라는 일찍이 한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외국의 직접 지배라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 당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이자 사표로서의 인생을 산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불교와 변별되는 선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하는 시대적인 요청을 받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 한암은 선수행과 관련된 차제론을 제기하고, 선계일치의 청정성을 환기한다. 그리고 선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직접 불교교육에 투신하여, 전선후교의 선교겸전이라는 교육을 통한 한국불교의 보다 진일보된 완성구조를 제시한다. 이와 같은 선禪·교敎·율律의 겸수를 통한 수행자의 진면목은, 현대의 대한불교조계종에도 유효한 가치임에 틀림없다. 이는 한암이 일제강점기 때 조선불교조계종을 통해서 현대의 대한불교조계종의 골격을 만든 것을 넘어, 위대한 정신적 가치를 온축하고 있는 희대의 사표이자 선지식이기 때문이다.
-5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