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가 진짜답지 않은 아이러니
영화에서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렇게 처절하게 오열하거나, 이를 데 없이 행복한 모습이 과연 현실에서 존재할까. 만일 현실에서 누군가가 이별하면서 슬피 우는 모습 그대로를 영화 형태로 찍는다면, 아마 감독에게 곧장 커트 당할 것입니다. 현실에서 실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결코 영화의 연기처럼 처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합니다. 영화라는 가상세계에서의 연기가 우리의 실제 모습보다 더 사실적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리버 헉슬리는 픽션(fiction)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픽션의 문제는 그게 너무 말이 된다는 점이다. 반면 현실은 절대 앞뒤가 맞질 않는다.”
사실 픽션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창조되고 조직된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의 연기가 실제 삶에서의 감정 표현보다 훨씬 그럴싸한 것처럼, 픽션에서의 이야기가 실제 삶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대부분의 픽션에서 설정된 이야기는 어떤 방식으로든 결론을 맺게 되어 있고, 소설 인물들의 삶은 정황에 맞게 향방이 결정됩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사는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 삶이란 결론이 나지 않는 이야기의 연속이고,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결정된 미래는 죽음 외엔 없습니다. 가짜는 설명할 수 있지만, 진짜는 도리어 설명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입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진짜와 가짜가 뒤바뀐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진짜가 진짜답지 못하고, 가짜를 진짜처럼 느끼며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혼돈에게 분별이 생기면
『장자(莊子)』의 「응제왕(應帝王)」 편에는 ‘혼돈칠규(混沌七竅, 혼돈에 일곱 구멍을 뚫어준다)’라는 우화가 소개됩니다.
남해의 제왕이 있어 ‘숙(儵)’이라고 하고, 북해의 제왕이 있어 ‘홀(忽)’이라고 한다. 그리고 중앙의 제왕이 있어, ‘혼돈(混沌)’이라고 한다. 숙과 홀이 때때로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이 그들을 지극히 잘 대접하였다. 어느 날 숙과 홀이 혼돈의 덕에 보답하기 위해 모의하기를 “사람의 얼굴에는 모두 7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이런 구멍이 없으니 구멍을 뚫어줍시다”고 하였다. 그래서 하루에 구멍을 하나씩 뚫었더니, 7일째 되는 날 혼돈이 죽고야 말았다.
보통 남해의 제왕인 숙은 ‘밝음’이나 ‘있음’을 상징하고 북해의 제왕인 홀은 ‘어둠’이나 ‘없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만나게 된 곳은 남북도, 밝음이나 어둠도, 있음도 없음도 아닌 그 중앙인 혼돈의 자리입니다. 여기서 숙과 홀은 분별의 대표적 양상을, 혼돈은 그 분별 없음의 자리를 상징합니다. 분별없는 혼돈에게 숙과 홀은 일곱 개의 구멍을 내어 분별을 심어주려 합니다. 그리고 혼돈이 구멍을 통해 분별을 받아들이자 혼돈은 죽고 맙니다.
이 우화에서 혼돈은 어지럽거나 무질서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질서나 체계, 분별이 생기기 이전 미분화 상태로서의 원형을 상징하는 혼돈입니다. 방향도, 질서도, 분별도 없던 혼돈에게 갖은 분별의 체계가 생겨남으로써 원형은 죽고, 그 자리에 질서와 무질서라는 극단의 분별이 생겨났습니다.
배우에게는 연기를 리얼하게 잘하는지 못하는지에 대한 평가나 분별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연기하는 것이 아니기에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분별할 기준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색한 표정을 지어도 자연스럽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아 잘 납득되지 않는 우리 삶 역시 그 자체로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니 현실의 삶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어 고통스럽다면, 납득 밑에 깔린 욕망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작위와 무분별의 현실을 분별과 체계 안으로 끌어들여 해석하려는 사람의 욕망 말입니다. 모든 문제는 세상에 있는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분별과 판단의 기준에 있습니다. 본래 기준이 없는 세상에 분별의 기준을 들이댐으로써, 내가 즐거워지거나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세상이 납득되지 않아서 괴롭다면, 자승자박입니다.
| 2,600년 전에도 ‘나’는 없었다
다시 우화로 돌아가겠습니다. 사실 혼돈에게는 뜻도 없었고 기준도 없었습니다. 혼돈은 그저 숙과 홀을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자리에 두고 잘 대접해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뜻과 기준을 심어준 숙과 홀 때문에 혼돈은 죽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원래 뜻도, 기준도 없습니다. 뜻과 기준이라는 분별을 가지고 의미나 방향을 취하는 건 사람입니다. 사람이 의미나 방향을 취함으로써 세상이 본래 지니고 있던 자연스러움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혼돈칠규 우화를 통해 소개한 것입니다.
앞서 올리버 헉슬리가 제기한 의문에 저는 도리어 반문하고 싶습니다. 왜 세상의 모든 일이 나에게 납득되어야 하는 걸까요. 그간 사람들은 근원이나 실체 없는 혼돈의 본래 모습에서 벗어나 숙과 홀이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분별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분별을 통해 세상과 분리된 ‘나’라는 실체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분리의 상태에서 나는 주체이고 세상은 객체입니다. 주체는 객체를 어떤 식으로든 납득해야만 실체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체로서의 ‘나’는 납득을 당연한 과정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이미 2,600년 전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은 ‘고정적 실체로서의 자아는 없다’는 진리를 만천하에 천명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성인이 그 진리를 2,600년간 고구정녕(苦口丁寧)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실체로서의 ‘나’를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너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저는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해결하고 싶다는 스물한 살의 패기 넘치는 청년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세상의 부조리를 먼저 해결하기 전에 ‘나’라는 부조리를 먼저 해결하도록 해봐. 그게 해결되면 나머지 부조리들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거야.”
당연한 ‘나’를 의심하는 것. 깨달음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원제 스님
2006년 해인사로 출가, 도림법전 스님의 제자로 스님이 되었다. 2012년 9월부터 2년여간 티베트 카일라스를 시작으로 5대륙 45개국 세계 일주를 했다. 이후 ‘최선을 다하지 않으리라’는 좌우명으로 지내고 있다. 선원에서 정진하는 수좌로 현재 김천 수도암에서 수행 중이다. 저서로 『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2019, 불광출판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