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 척을 하기는 했지만 그리 모나게 굴지는 않았는지 친구 관계가 무난한 편입니다. 하지만 선뜻 먼저 말을 걸 만큼 외향적이지는 못해서, 마음에 드는 녀석이 있더라도 속으로 ‘쟤랑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라고 되뇌기만 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마음으로 찍어 두었던 녀석이 어느 날 내게 말을 걸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지요. 어릴 적부터 저의 우정은 그렇게 시작되곤 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어느 가을날에도 그랬어요. 평소에도 가끔 얘기는 나누고 지내는 사이였지만 그냥 아는 사이 정도였습니다. 물론 저는 녀석을 꽤 맘에 들어 하고 있었지만요. 그날 녀석은 제게 편지를 한 장 내밀었습니다. 노트 한 장을 북 찢어서, 그래도 가위로 네 면을 반듯하게 자른 종이 위에 생일 축하한다는 글귀를 담아 선물이랍시고 준 거였어요.
그 종이 쪼가리를 받고서, 그럴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교실에서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왜 울었는지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도시로 유학을 나와서 외로웠는지, 입시 공부를 하는 게 힘겨웠는지, 아니면 그냥 십 대의 여린 감수성 때문이었는지.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날부터 우리 둘은 꽤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녀석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보는 제 마음으로는 녀석이야말로 ‘베프’(베스트 프렌드)라는 말에 꼭 들어맞는 존재였고, 존재입니다. 녀석이 있었기에 십 대 후반과 이십 대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고정순 작가가 펴낸 그림책 《나는 귀신》은 바로 그런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친구들 눈에도, 엄마 아빠의 눈에도 띄지 않아 자기 세계 속으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 책 속 ‘나’에게 어느 날 귀신 아이가 찾아옵니다. 와서는 이렇게 말하죠.
“나랑 놀래? 귀신이 되는 법을 알려 줄게.”
그날부터 둘의 귀신 놀이가 시작됩니다. 밤하늘을 높이 날고, 사람들을 놀래고, 바라는 모습으로 변하고, 숨바꼭질도 하고, 시소도 타고... 그렇게 바깥세상으로 나온 ‘나’의 눈에 놀이터 한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너’가 보입니다. 다른 친구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너’ 역시 과거의 ‘나’처럼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죠.
“귀신이 되는 법을 알려 줄까?”
이렇게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은 셋이 됩니다. 그럼 셋은 이제 무엇이 될까요?
이런 스토리 하나쯤은 다들 마음에 품고 계실 거예요. 친구에게 처음 발견된 날, 혹은 친구를 처음 불렀던 날을 기억하나요? 그날을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지고, 자꾸 전화기에 손이 가고 그러지 않나요?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해 주었고, 내일을 살 만한 시간으로 만들어 줄 그 시간들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