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자면, 웹툰(webtoon, 웹사이트에 게재되는 만화)을 즐겨 보는 편은 아니었다. 인기 웹툰이 포털 사이트 검색순위에 오르내릴 때도, 출근길 지하철에서 웹툰 삼매에 빠진 사람들을 보았을 때도 남의 일처럼 여겼다. 취향이 아니라기보다는 익숙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 보는 것을 엄청난 비행(非行)으로 여기던 보수적인 부모님 밑에서 자란 것도 한몫 했다.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만화, 웹툰은 어쩐지 멀게만 느껴졌다.
올해로 데뷔 15주년을 맞이한, ‘웹툰 대통령’이라 불리는 하일권 작가를 취재하게 됐다. 급하게 그의 데뷔작 <삼봉이발소>와 <목욕의 신>을 봤다. 고백건대, 그 두 편만으로 하일권 작가의 팬이 됐다.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와 키득키득 웃게 만드는 유머, 감성적이면서 몽환적인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스마트 폰 화면을 위로 올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이어서 <안나라수마나라>, <병의 맛> 등 그의 대표작들을 보기 시작했다.
| 익숙한 공간서 발견한 낯선 얘기
이발소, 대중목욕탕, 학교, 놀이공원 같은 익숙한 공간들이 하일권 작가의 작품 안에선 낯설게 다가온다. 그곳에서 상처받은 주인공, 위로받고 행복해지고 싶은 주인공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평소 일상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는 편이에요. 영감을 받기 위해 특별한 경험을 한다기보다는 밥 먹고 잠자고,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 속에서 일상의 순간들을 포착하려고 합니다. <목욕의 신>도 집 근처 목욕탕에 갔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라 시작한 작품이에요. ‘목욕탕을 배경으로 하면 어떨까? 일반 목욕탕이 아닌 재미있는 목욕탕은 어떤 모습일까? 목욕탕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또 어떤 사람들이 일하고 있을까? 그 목욕탕만의 독특한 점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 이런 식으로 생각을 발전시켜가면서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의 분위기를 떠올립니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만화를 잘 그리는 친구들이 한 반에 한 명쯤은 있었다. 낙서하듯 끼적인 그림이었지만 그럴싸했다. 부끄러워하며 그림을 숨기던 친구 주변으로 반 친구들이 모여들어 구경하곤 했다. 하일권 작가도 낙서하길 좋아하는 아이였다.
“학교 다닐 땐 그저 낙서하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돌아보니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캐릭터를 떠올리고 스토리까지 짜고 있었던 것 같아요. 딱히 만화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미대 입시를 준비하다가 자연스럽게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사실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하일권 작가의 꿈은 애니메이션 감독이었다. <라이온 킹>, <인어공주>, <알라딘> 같은 월트 디즈니사의 2D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3D와는 다른, 2D 애니메이션만의 질감과 분위기, 환상의 세계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군대 갔다 와서 복학하니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 상황이 많이 안 좋아져 있더라고요. 뭘 해야 할까 고민을 하다가 강풀 작가님 웹툰을 보게 되었어요. 그즈음 웹툰이라는 매체가 막 생겨나고 있었죠. 재미있었어요. 일반 만화와 다르게 컬러로 표현할 수도 있고, 오히려 애니메이션에 더 가까운 연출이라고 할까. 풀어내는 화법에 매력을 느껴 웹툰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2006년 한 포털 사이트의 아마추어 작가 연재 공간에 웹툰 <삼봉이발소>를 올리기 시작했고, 그의 웹툰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편집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하일권 작가는 정식으로 <삼봉이발소>를 연재하게 됐다. 빛나는 데뷔의 순간이다.
| 공감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화두
한 분야에서 15년을 일해 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 일이 매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야 하는 일이라면? 웹툰 작가로 15년의 세월을 이어온 하일권 작가에게 소감을 물었다. 지난 시간을 회상이라도 하는 걸까, 아주 잠깐의 여백 후에 답이 흘러나왔다.
“좋았어요. 물론 힘들기도 했지만, 힘들면서도 동시에 기쁘고 좋았어요.”
어떤 미사여구도 없이 덤덤히 뱉어낸 ‘좋았다’는 말이 진심으로 다가왔다. 답변은 계속됐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보고 싶어요. ‘이제 앞으로 무엇을 그려야 할까?’가 요즘 제 화두입니다.”
최근 연재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하일권 작가는 벌써 다음 작품이 고민이다. 데뷔 후 15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은 작품의 개수와 깊이가 더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작가가 나이를 먹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20대 초반에 데뷔해 30대 후반이 된 작가는 젊은 독자들과의 소통을 걱정하고 있다.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제 나름대로 고민하는 화두가 있었어요. 데뷔작이었던 <삼봉이발소>는 20대 때이다 보니 외모 콤플렉스에 관심이 많았죠. 우리가 살아가는 데 외모가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내면의 무언가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 웹툰이었어요. 주독자층인 10대, 20대분들과 당시의 제가 같은 또래다 보니 소통하는 게 어렵지 않았어요. 요즘 30대 후반이 되고 보니 10대, 20대분들이 미지의 존재처럼 느껴져요. 그분들은 어떤 것을 좋아하고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지금의 저는 알 수 없으니까요. 물론 취재해서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지만, 진짜는 아닐 것 같아요. 당연히 공감도 못 받겠죠. 결론은 그냥 내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다음 작품을 걱정하는 하일권 작가의 고민 안에 이미 답이 들어있었다. 어쩌면 독자들이 진짜 기대하는 이야기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작가의 ‘현재 모습’이 아닐까.
사실 하일권 작가에겐 남모를 고통이 있었다. 2010년 즈음 작가 생활을 하면서 갑자기 공황장애가 찾아온 것. 공황장애로 괴로워하는 주인공이 치유되는 이야기를 다룬 웹툰 <병의 맛>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일부 녹여낸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이유로 하일권 작가에겐 유독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말로 스스로 위로하고 있어요. 힘든 일도, 좋은 일도 다 지나가기 마련이잖아요. 공황장애 증상이 찾아올 때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이지만 매번 아무 일 없이 지나간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으니까. 그 마음으로 힘든 순간을 버틸 수 있는 것 같아요. 누구나 살아가면서 시련을 겪잖아요. 예고도 없이 맞닥뜨리는 문제들 속에서 어떻게 답을 찾아야 하나, 어떻게 하면 좀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자문했고 그것을 웹툰에 녹여내려고 했어요. 아직은 저도 삶의 과정에 있지만, 매번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어요.”
독자들에게 웹툰을 공개하기 전, 첫 번째 독자는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는 하일권 작가.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작가는 지난 15년을 리셋하려 한다.
“만화란 무엇인가부터 다시 고민해보려고요. 다 버리더라도 마지막 하나 남기고 싶은 것은 ‘재미’예요. 재밌는 만화를 그리고 싶어요. 어쨌거나 만화의 본질은 ‘재미’니까요. 독자분들이 제 만화를 다 보고 나서 무언가 느낌 하나가 남는다면 더 바랄 게 없겠죠. 웹툰 속 이야기도, 제 삶도, 세상도 모두 ‘해피엔딩’이면 좋겠어요. 다들 코로나 조심하세요!”
웹툰 <목욕의 신>에서 작가는 말한다. 고객들의 때를 잘 미는 노하우가 있다면, 그건 ‘마음으로 때를 미는 것’이라고. 마음으로 웹툰을 그리는 작가, 하일권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다려진다.
글. 조혜영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