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스럽다. 5월 날씨 얘기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하다가도 낮엔 따가운 봄볕을 내리쬔다. 짓궂게 하늘 찌푸리다 비를 흩뿌리기도 한다. 종잡을 수 없다. 불교 종갓집이라 불리는 불지종가(佛之宗家) 영축총림 방문 며칠 전이 그랬다. ‘사진이 걱정인데 내일 날씨는 좋을까, 질문에 적절한 답이 돌아올까, 심기를 불편하게 하진 않을까….’ 온통 일 걱정에 노심초사, 마음도 종잡을 수 없었다.
하늘은 높고 맑았다. 며칠 전부터 준비한 질문을 착! 꺼내 놓고 좌복 위에 결연하게 앉았다. 정작 차 한 잔 두고 나누는 대화에서 준비는 무용지물이었다. 노장의 “라떼는 말이야(기성세대들의 고리타분한 얘기를 비유)”에 긴장과 많은 질문은 무장해제 됐다. 덥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보광전(普光殿, 주지스님이 머무는 곳)에는 청량한 바람 몇 줄기 흘러들어왔다.
| 예측불허 시작은 100주년 잡지
일흔 넘긴 노스님은 여유만만했다. 털털했으며, 담백했다. 여러 대의 카메라와 조명 등 불광미디어의 사진과 영상 촬영 장비가 사중스님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자 농담으로 그 시선을 물렸다. “삼보사찰 중 삼각대 없는 곳은 처음인데요, 스님.” “아, 그래? 김 목수한테 나무로 (삼각대) 잘 맞추라고 해. 어디 가면 골동품이라고 대접 잘 받을 거야.”
허허허 웃으며 긴장의 끈을 늘였다, 묵직한 대답으로 느슨해진 긴장의 끈을 잡아당겼다. 후엔 차 한 잔 ‘천천히’ 마시며 다과를 들라는 다정다감함으로 분위기를 편하게 이끌었다. 그냥 따듯한 차 한 모금에 모든 걸 맡겨 버렸다. 결제나 포살 때면 대중 400~500명이 운집하는 큰 가람의 살림살이를 고민하는 영축총림 통도사 주지 현문 스님은 예측불허였다.
그래서 뻔하지 않았다. 사실 스님이 첫 질문에 답을 할 때만 해도 절밥 내공 60년의 “라떼는 말이야”를 예상하지 못했다. 시작은 「축산보림(鷲山寶林)」부터였다. 「축산보림」은 1920년 1월 25일 통도사가 창간한 불교 잡지다. 당시 통도사 주지 구하(1872~1965) 스님이 펴냈다. 1919년 들불처럼 퍼진 3·1 만세운동 기세를 잇고 조선인에게 독립을 향한 의지를 심어주고자 했던 구하 스님 원력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국권을 상실한 경술국치 10년이 되는 1920년 첫 달에 「축산보림」이 나왔다. ‘영축산(靈鷲山)’을 줄여 ‘축산(鷲山)’, ‘보배의 숲[寶林]’이라는 뜻의 ‘보림’을 이름 삼았다. 통도사를 둘러싼 영축산에 독수리가 비상하는 모습의 표지는 구하 스님이 직접 그리고 썼다.
“30년 앞은 내다보고 산 어른 같아. (내가)통도사에 입산할 땐 저녁 9시면 불을 껐어. 8시 50분이면 종무소에서 두꺼비집을 두 번 내렸다 올려. 불빛이 껌뻑껌뻑하지. 묵언 죽비 치면 새벽예불 때까지 꼼짝 못 했어. 당시에 전기가 귀했는데, 어른스님이 통도사에 전기를 끌어왔어. 지금 도량에 석등이 많은데, 우리가 등을 설치하려고 했을 때 보니 이미 구멍이 뚫려 있더라고. 어른스님이 그런 분이야. 일제강점기 핍박받던 시대에 교육이 살길이라고 내다본 거지.”
현문 스님은 구하 스님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도심 포교당 효시인 마산포교당 정법사와 1927년 설립된 배달학원(현 대자유치원),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 개교에 구하 스님의 원력이 담겼다고 했다. “신문화를 주창했던 분”이라는 현문 스님 말씀에 이견을 달 수 없었다.
구하 스님과의 일화가 많았다. 그 옛날 어른을 어찌 그리 소상하게 알까 궁금했다. 현문 스님의 출가 인연이었다. 소년은 경봉(1892~1982) 스님과 가까웠던 부친 손을 잡고 통도사 극락암에 들었다. 소년과 부친은 경봉 스님의 추천서 한 장을 들고 부친과 월하 스님을 찾았고, 월하 스님은 구하 스님에게 소년을 소개했다. 소년은 구하 스님이 건넨 조청 찍은 떡 하나 삼키고 이렇게 생각했더랬다. ‘맛있다! 이 떡 원 없이 먹겠구나.’ 15살이던 해, 소년은 통도사에 입산했다. 은사는 월하 스님이었지만, 구하 스님을 1년 5개월 시봉했단다.
그래서다. 현문 스님은 16년 전 통도사 주지로 살 때 정부에서 발간하는 친일인명대사전에 구하 스님이 포함되는 일을 지켜볼 수 없었다. 창호지로 몇 겹을 싼 문건을 발견했고, 김구하 스님이 일제강점기 때 도산 안창호 선생 등에 독립자금을 보냈던 기록을 찾아냈다. 결국 시봉했던 구하 스님의 불명예를 말끔히 씻어냈다. 각별하게 여기는 구하 스님이니, 「축산보림」 창간 100주년인 올해 뭔가를 궁리할까 싶었다.
“16년 전 통도사 주지로 살 때 구하 스님 세미나도 했어. 지금은 딱히 별 기획은 없는데, 앞으로도 구하 스님 관련 뭔가 있지. 주지할 때 업무일지와 일기가 있는데, 너무 초서로 써서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지금 박물관에 뒀는데, 조만간 번역하면 우리가 모르는 근대사가 많이 나올 거야. 기대해.”
| 두 번째 주지, 달라진 통도사
현문 스님은 출가 후 줄곧 통도사에서 살았다. 대중과 정진하고 예불 드리고 울력했다. 1963년 입산했으니 60년 가까이 통도사를 품고 있는 자연이 사시사철 옷 갈아입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영축총림 살림살이를 두 번째 관리하고 있다. 2019년 5월 주지 임명장을 받았으니 취임 꼭 1년째였다. 소회를 물었다. 지난해 주지 임명장을 받을 때의 근엄한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때마침 또 다시 보광전 안으로 청량한 바람 한 줄기가 객처럼 왔다 갔다.
“경험도 있고, 연륜이 쌓이니 사람 만날 때 편해. 보통 나보다 세납이 적잖아? 허허허. 요즘 웃음이 많은데 누가 그래. 너무 자주 웃어도 싱거워 보인대. 웃는 게 좋잖아? (여유가 생기니)따끔한 소리도 기분 나쁘지 않게 할 수 있어. 굳이 어려운 소리 할 것도 없어. 차 한 잔 대접해서 배웅해도 되고, 허허허.”
웃음은 한없이 여유로웠지만, 사실 1년 동안 현문 스님은 숨 가쁘게 달려왔다. 전통을 보존하고 근대사를 조명하며 산중화합을 이뤄냈다. 무형문화 자료를 집대성할 영축문화연구원을 개원하고, 용화전 미륵불 복장 유물을 공개했으며, 동국대와 아카이브 구축 협약을 맺었다.
영축문화연구원은 통도사 사중 역사를 집대성해 현대 언어로 기록하는 사지 발간을 전담하는 기구다. 도량석, 예불 등 일상의례부터 이운 등 특별의례까지 통도사에 면면이 이어지는 산중의 무형문화를 문화재로 등록하는 일도 한다. 통도사 창건 당시 자장 율사 업적을 조명하는 작업도 애쓴다. 특히 통도사가 배출한 근현대 선지식과 당대 역사적 사건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다는 계획이다.
한국전쟁 때 통도사가 3,000명 환자를 돌보던 야전병원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한국사회를 놀랍게 했다. 용화전 미륵전 복장 유물에서 나온 기록이었다. 통도사 사중스님들과 재가자들의 구전으로만 전해져온 통도사 야전병원 운영이 사실로 처음 입증된 사건이기도 했다. 이러니 근현대사 조명에 현문 스님의 관심은 각별하다. 다시 라떼가 끓기 시작했다.
“방장스님도 굉장히 관심이 많으셔. 우리는 어른스님들 모시고 살면서 이야기를 다 들었잖아. 그런 기억이 희미해지다가도 이야기가 나오면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방장스님도 나도 산중에 오래 살다 보니 많이 들었지. 통도사라는 공간에서 근현대라는 시간을 거친 어른스님들을 조명해야지. 은사는 월하 스님이었고, 구하 스님은 내가 모신 어른이자 높고 거대한 산이야. 그 산을 보고 자랐기에 지금 우리가 있는 거야.”
다른 문중의 줄기를 가진 수백 대중을 통도사 품으로 들인 일은 놀라웠다. 정작 현문 스님은 아무 일도 아닌 듯 “허허허” 웃고 말았지만.
“통도사는 2대만 올라가면 다 한 문중이라. 내 문도 네 문도 하면서 1년에 12번 제사를 지내. 상좌스님들이 일렬로 와. 그게 파벌일 수도 있지. 어른스님들 다 모셔서 음력 3월 보름, 9월 보름 이렇게 두 차례로 통일하기로 했지. 나부터 구하, 월하 스님 내려놓겠다 선언했어. 3월 보름 때 상좌스님들 모두 모여 절했지. 장엄했어.”
| “중노릇 잘 하라”는 죽비
“라떼는 말이야”는 계속됐다. 주지 진산식 대신 이웃을 위한 나눔으로 회향한 일을 물었더니, 돌아온 것은 “라떼는 말이야”였다. 라떼는 뜨겁고 썼다.
“중은 항상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해. 늘 자기를 돌아봐야지. 통도사 가풍이 그래. 어른스님들이 그렇게 사셨고 우리는 보고 자랐어. 잘하는 중노릇? 조석예불, 아침공양 대중들과 함께 해야지. 더 잘 살려면 빗자루 들고 마당 쓸면 돼. 노는 스님들은 부처님 밥 먹을 자격이 없어.”
시주(자비심으로 조건 없이 절이나 스님에게 베푸는 일) 소중하게 여기고, 사중스님들과 정진하며 출가수행자로서 위의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죽비였다. 그러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없다는 이 시대, 탈종교화로 기우는 현대사회에서도 불교는 희망이 있다는 말씀도 했다. 성보문화재는 물론 천혜의 자연을 보존해 후손에게 물려 줘야 할 의무가 스님들에게 있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산문에서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무풍한송(舞風寒松)길’, 적멸보궁과 금강계단(국보 제290호), 다보탑벽화(보물 제1711호)가 봉안된 영산전, 석조봉발(보물 제471호) 등 통도사를 보면 현문 스님의 당부와 자긍심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현문 스님에게 ‘주지스님 강력 추천 통도사 3선(選)’을 요청했다.
“불지종가잖아. 대웅전에 불상이 없어. 사리탑이 있어서지. 적멸보궁이야. 꼭 참배하고 가시길 바라.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에도 소실 안 된 대광명전 그리고 천혜의 자연 이 세 가지는 꼭 마음에 담아두고 가면 좋겠어.”
보광전 마루에 앉아 통도사를 살피는 현문 스님. 무풍한송길에서 바람이 춤춘다. 그 바람 따라 일어나는 청량한 기운에 노송이 물결쳤다. 스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시원하고 달콤했다. “(아이스)라떼는 말이야~.”
글. 최호승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