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역자 | 이중표 | 정가 | 20,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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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 2020-05-18 | 분야 | 불교 |
책정보 |
384쪽|판형 152mm×225mm|책등 두께 20mm ISBN 978-89-7479-800-0 (03220) |
존재가 갖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 붓다의 연기법
우리는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인식하면서 살아간다. 과학은 단지 보이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다. 진리는 보이는 것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에 적용되는 것이다. 붓다는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에 기초하여 생사의 세계와 열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붓다가 어떤 진리를 어떻게 깨달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까닭은 바로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위해서이다. 붓다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연기법이다. 그리고 연기법의 사유를 통해 드러난 진리가 4성제이다. ‘연기법과 4성제’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붓다가 제시한 방법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석학 이중표 명예교수의 답이 바로 이 책이다. 정확한 핵심을 놓치지 않는 쉽고 간결한 강의로 정평이 나 있는 저자의 명강연을 고스란히 지면에 옮긴 이 책은, 1995년 한 방송사에서 100일 동안 진행했던 교리강좌를 바탕으로 한 최신 개정판이다.
이중표 (전남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전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정년 후 동 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로 위촉됐다. 호남불교문화연구소 소장, 범한철학회 회장, 불교학연구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불교 신행 단체인 ‘붓다나라’를 설립하여 포교와 교육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정선 디가 니까야』, 『정선 맛지마 니까야』, 『붓다의 철학』, 『니까야로 읽는 반야심경』, 『불교란 무엇인가』 외 여러 책이 있으며, 역서로 『붓다의 연기법과 인공지능』 등이 있다.
이 책을 읽는 분들께
1장 붓다의 깨달음
1 불교의 목적
2 붓다가 깨달은 진리
2장 중도(中道)
1 실천을 통한 진리의 체험
2 고락중도(苦樂中道) - 8정도(八正道)의 발견
3 유무중도(有無中道) - 존재의 실상을 깨닫는 길
3장 12입처(十二入處)
1 불교의 존재론적 입장
2 불교 해석의 새로운 모색 - 12입처란 무엇인가
3 자아와 세계의 근원 - 12입처
4 욕탐(欲貪)과 욕탐의 지멸(止滅)
5 불교의 세계관과 그 의의
6 존재란 인식된 것이다
7 존재[有, Bhāva]와 법(法, Dharma)
8 법(法, Dharma)이란 무엇인가
9 생명현상과 의식현상
4장 18계(十八界)
1 분별심[六識]의 발생
2 분별심과 지혜
3 18계의 의식상태
4 촉(觸)의 발생
5 촉과 6계(六界)의 관계
5장 5온(五蘊)
1 촉과 5온의 관계
2 5온의 발생
3 5온의 질료
4 식온(識蘊)의 성립
5 5온의 성립 순서
6 왜 5온을 버려야 하는가
7 5온의 참모습[實相]
8 5온의 종합적 이해
6장 5온과 연기설의 관계
1 5온으로 살아가는 중생의 삶
2 식(識)의 증장(增長)과 새로운 5온의 형성
3 5온의 연기(緣起) 구조
7장 12연기(十二緣起)
1 12연기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
2 3세(三世)에 걸쳐 윤회하는 모습 - 유전문(流轉門)
3 생사(生死)를 벗어나는 길 - 환멸문(還滅門)과 8정도
4 연기법(緣起法)
5 괴로움의 원인 - 집(集)
6 연기설(緣起說)의 인과관계
7 법(法)과 법계(法界)의 의미
8 무명(無明)에 휩싸인 삶 - 무명과 행(行)
9 자기 존재에 대한 애착과 취착 - 애(愛)·취(取)·유(有)
8장 9차제정(九次第定)과 8해탈(八解脫)
1 중생의 마음 따라 연기(緣起)하는 세계
2 중생의 세계를 벗어나는 길 - 9차제정
3 욕계(欲界)에서의 해탈
4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서의 해탈
9장 9차제정(九次第定)과 12연기(十二緣起)
1 왜 태어나서 죽는가
2 자신의 존재에 대한 사유 - 4선(四禪)과 12연기의 촉(觸)
3 4무색정(四無色定)과 무명(無明)의 자각
4 멸진정(滅盡定)에서 깨달은 12연기
색인
연기법(緣起法)이 붓다가 깨달은
진리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붓다가 깨달은 진리가 ‘연기법’이라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4성제, 8정도의 내용도 이 연기법과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그만큼 불교에서 연기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붓다는 실재하는 모든 존재를 연기법으로 이해하고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 바로 ‘깨달음’이고, 이 연기법을 체득함으로써 범부 싯다르타는 비로소 깨달은 ‘붓다’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연기법은 무엇인가. 요약하면, ‘모든 존재는 상호 의존하고 있으므로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바꿔말하면, 모든 존재는 수많은 인과관계 속에서 얽히고설켜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의존 상태의 어느 한쪽이 사라지거나 무언가가 더해지면 그 존재는 변화하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변화는 태어남일 수도, 죽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법의 체득은 책이나 인간의 이성적 사고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 붓다의 깨달음은 사변(思辨)으로 얻은 게 아니라 철저한 수행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물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붓다는 연기법을 체득할 수 있는 9차제정(九次第定)이라는 구체적인 수행법을 우리에게 남겼다.
바로 이 ‘연기법’과 ‘9차제정’의 핵심을 담은 책이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이다. 지난 50여 년간 불교 연구에 매진해온 저자 이중표 명예교수가 독자들에게 전하는 ‘불교 수행법과 진리’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연기법은 무엇이고, 어떻게 4성제, 8정도와 연결되었는지, 그리고 이를 체득하기 위한 수행법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려는 독자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왜 모든 ‘존재’를 연기법으로
인식해야 하는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체를 보거나 감정과 같은 정신 작용이 일어날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존재한다, 있다’라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이 ‘있는 것’,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반인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말을 들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 있는 이것, 저것들은 뭐고,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의 실체는 뭐냐며 의문을 제기한다. 정말 ‘그것들’은 실재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서 불교는 시작한다. 그리고 그 해답이 바로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모든 사물의 실상을 보여준다. 여러 사람이 다르게 본다고 할지라도 ‘꽃’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 생각대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나무에 꽃이 피기 전에 꽃은 존재하지 않는다. 봄에 핀 꽃은 여름이 되면 사라진다. 꽃은 어디에서 나와서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꽃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인과관계 속에서 피어난다. 적절한 온도, 땅, 물 등이 서로 의존해서 나온 결과물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인과관계로 인해 어느 요소가 하나라도 사라지거나 더해지면, 꽃은 지게 된다.
이것을 붓다는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나타날 때 저것이 나타난다”라는 말로 설명했다. 연기법을 이해하는 첫걸음과 같은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점차 심화화여,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론, 즉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붓다의 출가 이유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 있었다. 많은 시행착오와 수행을 거친 끝에 붓다는 세상 모든 것이 연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괴로움에 고통받았던 원인은 마음속 생각작용이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을 대상으로 ‘이름’을 붙여 존재로 인식하고, 그 존재에 집착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無明)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상호 의존하고, 연기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름을 붙잡고 실체로 인식하며 애착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움’이라는 이름의 감정은 없다. 연기하기 때문이다. 조건이 변화하면 미움이라는 감정도 사라지거나 변한다. 어디에 미움이 있는가. 책상, 자동차, 돈, 기쁨, 슬픔 등 이 모든 것들이 이름만 붙여진 채 존재하지 않는 허구라는 뜻이다. 그래서 붓다는 “연기를 통찰하고 체득해야만 열반에 이를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행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붓다는 말한다. “연기를 모르는 자,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모든 존재를 연기법으로 인식해야 하는 이유이다.
연기법이라는 진리로 인도하는
단계적인 수행법, 9차제정(九次第定)
붓다는 9차제정이라는 선정(禪定)을 통해 연기법을 깨달았다. 불교 선정 수행은 산란한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싸마타(samatha)’와 집중된 마음으로 법(法)을 관찰하는 ‘위빠싸나(vipassanā)’, 이렇게 두 가지를 함께 실천한다. 한문으로는 싸마타를 ‘지(止)’, 위빠싸나를 ‘관(觀)’이라고 번역한다. 이 지관 수행을 세분화하고 구체화한 것이 9차제정이다.
9차제정은 열반에 이르는 아홉 단계의 선정으로서 4선(四禪) · 4무색정(四無色定) · 멸진정(滅盡定)을 차례로 닦는 것을 뜻한다. 4선을 통해서 고락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평정한 마음을 얻고, 그 마음으로 4무색정을 닦아 멸진정에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 각각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① 초선(初禪)에서 언어가 적멸한다. ② 제2선(第二禪)에서 언어적 지각과 사유가 적멸한다. ③ 제3선(第三禪)에서 희심(喜心)이 적멸한다. ④ 제4선(第四禪)에서 출입식(出入息)이 적멸한다. ⑤ 공처(空處)에서 색상(色想)이 적멸한다. ⑥ 식처(識處)에서 공처상(空處想)이 적멸한다. ⑦ 무소유처(無所有處)에서 식처상(識處想)이 적멸한다. ⑧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서 무소유처상(無所有處想)이 적멸한다. ⑨ 멸진정(滅盡定)에서 무명이 멸하고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
『잡아함경』 379에 의하면(377쪽) 붓다는 이 9차제정을 세 번에 걸쳐 반복 수행했다고 한다. 첫 번째 수행에서 12연기라는 진리를 발견했고, 두 번째는 그 진리에 따라 수행했고, 세 번째는 그 진리를 성취했다.
이와 같은 세 단계의 수행을 견도(見道) · 수도(修道) · 무학도(無學道)라고 한다. 붓다는 견도의 차원에서 9차제정을 수행하여 무명을 자각하고, 수도의 차원에서 다시 9차제정을 수행했으며, 무학도의 차원에서 9차제정을 수행한 끝에 열반을 성취한 것이다. 여기서 견도는 진리의 인식이고, 수도는 진리의 실천이며, 무학도는 진리의 성취이다.
이 중에서 수도와 무학도는 직접 실천하여 체험해야 할 내용이다. 이 내용은 어떠한 경전과 교리 책을 읽어도 행동에 옮기지 않는 한 체득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붓다의 연기법과 9차제정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했다면, 이제는 실천하는 일만 남았다. 망설일 이유는 없다.
■ 저자의 말
불교의 진정한 목적은 맹목적인 진리의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극복하고 갈등과 투쟁이 없는 행복한 세상을 이룩할 수 있는 진리의 깨달음에 있습니다. 불교의 목적은 죽어서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잘 수양하여 성인군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속세를 떠나 선경(仙境)을 노니는 신선이 되는 것도 아니고, 지적인 호기심으로 진리를 찾는 철학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모순과 갈등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진리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여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이룩하는 것이 불교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진리라는 말은 너무 추상적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진리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는 4성제(四聖諦)라고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들은 연기법(緣起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4성제와 연기법은 서로 다른 진리가 아니라 함께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진리입니다. _22쪽
4성제는 연기법의 사유를 통해 드러난 진리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가 연기법인가, 4성제인가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연기법이란 무엇이고, 4성제는 구체적으로 어떤 진리인가?’ 하는 것입니다.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이라는 이름의 이 책은 이런 물음에 대한 필자의 답변입니다. _26쪽
연기법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며, 체험의 내용입니다. 무명이 있으면 생사의 괴로움이 있다는 체험을 통해, 무명을 멸하여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의욕을 가질 수 있고, 그러한 의욕을 가지고 무명을 없애는 수행을 할 때,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체험은 일회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지속적인 수행을 통해 생사의 괴로움이 다시는 생기지 않을 때, 열반은 성취됩니다. _37쪽
9차제정은 열반에 이르는 아홉 단계의 선정으로서 4선(四禪)·4무색정(四無色定)·멸진정(滅盡定)을 차례로 닦는 것입니다. 4선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고락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평정한 마음입니다. 따라서 이 경은 4선을 닦아 평정한 마음을 얻게 되면, 그 마음으로 4무색정을 닦아 멸진정에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을 통해 유무(有無) 2견(二見)을 떠나 중도를 깨닫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_47쪽
연기법은 모든 사물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아무리 다르게 본다고 할지라도 ‘꽃’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듯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나무에 꽃이 피기 전에는 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봄에 핀 꽃은 여름이 되면 사라집니다. 꽃은 어디에서 나와서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나무에서 나와서 땅속으로 사라지는 것일까요? 나무를 들여다보아도, 땅속을 파 보아도, 꽃은 없습니다. 꽃도 이렇게 온 곳도 없고, 간 곳도 없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것입니다. 꽃은 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연에 의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꽃은 공(空)입니다.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인 것입니다. _73쪽
‘존재’는 범어로 ‘bhāva’입니다. 그리고 ‘법’은 범어로 ‘dharma’라고 합니다. 존재를 의미하는 ‘bhāva’라는 말이 있는데 부처님께서 이 말을 사용하지 않고 ‘dharma’라는 말을 사용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존재’라는 말은 우리와는 상관없이 외부에, 즉 시간과 공간 속에 독자
적으로 있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연기법에 의해서 본다면 우리와 상관없이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존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_100쪽
공과 무아는 사변(思辨)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체험되는 것이기 때문에 체험하지 않는 한 의심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연기의 도리를 바르게 이해하면 의심이 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_266쪽
모든 법은 동일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 항상 조건에 따라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모든 법(法)은 연기(緣起)한다’고 합니다. _285쪽
부처님께서는 연기하는 법계를 깨달음으로써 무명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법계의 진리인 연기법을 중생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에 의지해서 법계의 실상을 깨닫기 위해 수행합니다.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는 이렇게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과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와 그 진리를 믿고 따르는 불자(佛子)를 의미합니다. 중생들은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이 있고, 부처님께서 깨달아 현시한 진리가 있고, 그 진리에 따라 수행하면 누구나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법승 삼보에 대한 무지이며 무명입니다. _299~300쪽
불교의 교리를 많이 알고 이해하는 것을 불교 공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바른 불교 공부가 아닙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고 해서 연기의 도리가 깨달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교리를 많이 안다고 해서 연기의 도리를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지관’을 통해서 연기의 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내용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 불교의 교리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교리는 ‘지관’을 통해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 언어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_324쪽
9차제정은 12연기를 깨닫는 수행법임과 동시에 행을 멸하여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수행법이기도 합니다. _377쪽
수도와 무학도는 여러분 스스로 실천하여 체험해야 할 내용입니다. 따라서 제가 말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4념처, 8정도, 9차제정, 8해탈 등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견도의 차원일 뿐입니다. 8정도를 실천하고 9차제정을 수행하여 연기의 도리를 깨닫고 열반을 성취하는 수도와 무학도는 여러분이 스스로 실천하여 체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_3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