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창작과비평’ 사옥 내 위치한 카페 안. 점원이 테이크아웃 컵에 커피를 담아주자 박준 시인은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다. 인터뷰가 끝날 때 즈음에야 그는 텀블러를 사무실에 두고 와 플라스틱을 사용하게 된 한 시간 전 일을 언급하며 “지금부터 세 시간 동안 후회할 것”이란다. 박준 시인에게 ‘큰일’이란 역설적으로 ‘너무 사소해서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작은 일’들이다. “요즘 날씨가 참 따뜻하다”라는 사소한 인사말이 환경 문제로 크게 다가왔을 때 박준 시인은 플라스틱 적게 쓰기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작은 일로 늘 걱정하고 후회한다는 박준 시인에게 시란 무엇인지, 시를 쓰는 일이 불교 수행과 맞닿은 부분은 없는지 들어봤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겸허함과 조심스러움이 느껴지는 박준 시인은 ‘시인계의 아이돌’이라는 의외의 별명을 가지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 붙은 건 그의 인기 때문이다.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후 2012년 출간한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가 시집으로선 드물게 11만 부 이상 판매되며 인기를 끌었고, 이어 출간한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2017년),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2018년) 모두 대박을 터트리며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Q ─ 시를 쓰게 된 이유와 시인이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어려서부터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거란 근본적인 회의감과 열패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유용한 학과, 현실적인 직업 등에 욕심도 없었고요. 여기에는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수능 보기 전날에도 시험 잘 보라는 응원 대신 ‘내일 시험을 보지 않으면 대학, 군대, 취업, 결혼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삶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며 출가를 권할 정도로 보통의 부모와 다른 분이셨거든요. 시를 쓰는 일은 부나 사회적 명예를 얻는 것과 거리가 멀지만, 오히려 그런 ‘쓸모없는 일’이란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고3 때 시인이 되기로 하고 스무 살 때부터 신춘문예와 문예지 신인상에 빼놓지 않고 응모했는데 계속 떨어졌어요. 처음 3~4년은 결과를 납득하지 못하고 시스템을 부정하며 보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자기 객관화를 하게 되는 순간이 오고 제 시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창작자로서 자아존중감과 자기검열이 균형을 이룰 때 즈음 등단하게 됐습니다.”

Q ─ 시를 쓰는 것과 불교 수행이 닮은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시와 불교는 ‘자유롭다’라는 점에서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불교 계율이 엄격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불교는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 상태’를 인정하잖아요. 문학도 최소한의 윤리적 토대 위에서 굉장히 자유롭거든요.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엄마가 죽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뫼르소는 불효자지만, 문학에서는 엄마가 죽어도 슬프지 않은 인간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거예요. 시와 불교가 서로 다른 지점도 있습니다. 시를 쓰는 건 내게 상처를 준 과거의 경험, 힘들었던 기억을 끊임없이 현재로 불러내는 행위에서 시작됩니다. 스스로 자처해서 끙끙 앓는 행위는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고자 하는 불교 수행과 다른 지점이지요. 다만 이런 마음의 고통이 객관화, 일반화의 과정을 거쳐 시로 완성되면서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이렇게 대중과 소통하는 시의 역할은 불교와 맞닿아 있습니다.”

과거 일을 현재로 불러와 마음을 앓는 데서 창작이 시작된다는 말처럼 그의 시에서는 종종 후회와 자책의 감정이 눈에 띈다. 하지만 박준 시인에게는 후회나 자책의 과정이 보람을 느끼거나 미래를 꿈꾸는 과정보다 더 소중하다. 이런 과거 지향성은 그의 시 ‘지금은 우리가’ 중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는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Q ─ 박준 시인에게 시란 무엇이고, 일반 독자에게 시는 어떤 의미일까요?
“제게 시는 슬퍼하고 아파했던 순간들의 감정을 현재로 불러내 ‘잘 보내주는 일’입니다. 허겁지겁 마음속에 파묻었던 감정들을 꺼내 잘 태워서 보내주는 게 ‘시를 쓴다’는 행위고요. 과거 일을 끄집어내 아름답게, 성공적으로 애도할 수 있다면 그 일에 대해 더는 슬프지 않겠지요. 누구나 가방 속에 시집 한 권씩 넣어 다니고, 대학생들이 소개팅할 때 소지품으로 시집을 꺼내놓는 게 어색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시가 소수 마니아층이 즐기는 문화가 된 것 같습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시를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누구에게나 ‘시가 필요한 시간’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읽는 행위는 주로 늦은 밤에 조용한 데서 이뤄지고, 내 눈에 오래 머무는 한 문장을 곱씹어보는 굉장히 정적인 일이잖아요. 가장 시적인 순간이기도 한, 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예요.”

Q ─ 출판사 편집자 일을 겸하고 있는데 편집 능력이 시를 쓰는 데 도움이 되나요?
“글을 쓸 때 자아존중감과 자기검열이 각각 50대 50 비율로 균형을 이루어야 비로소 창작이 가능한데, 그 균형을 맞추는 데에 편집자 시각이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자아존중감이 높고 자기애가 흘러넘칠 때 그 ‘자뻑’의 힘으로 초고를 씁니다. 반면 퇴고는 나 스스로 엄격해졌을 때, 혹은 내가 나인 것이 싫을 때 가능해요. 도공들이 자기가 빚은 도자기라도 마음에 안 들면 도자기를 깨잖아요. 균형 있는 창작자라면 100개의 도자기를 구웠을 때 50개는 깨고 50개는 남겨둘 거 같아요. 스스로 필요 이상으로 엄격하면 어떤 결과물도 나오지 않을 것이고, 너무 관대하면 객관적 수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창작자가 되겠지요. 창작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자아존중감과 자기검열 사이 균형을 50대 50으로 맞추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 강연을 많이 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시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시를 쓰는 일인 것 같습니다. 다양한 창작자에게서 나온 다양한 경향의 시가 공존할 때 각각의 시가 아름다워지는 거니까요. 시인의 역할 중 또 하나는 ‘시는 우리 삶에 뿌리를 두고 있다’라는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는 거예요. 우리 모두의 일상이 시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전하는 거지요. 시적인 순간들이 멀리 있지 않거든요. 시적 순간은 비유하자면 걸레를 빨아서 물기를 제거하려고 걸레를 한 번 짰는데, 그래도 혹시 몰라서 한 번 더 짜는 마음이에요. 마침 제가 시집을 낸 지 얼마 안 돼서 당장 시를 많이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상태예요. 시가 어렵지 않다는 걸 알리고 수강생들과 재밌게 놀자는 생각으로 강연을 다니고 있습니다. 시나 문학에 전혀 관심 없는 어르신들 앞에서 시 얘기할 때 정말 재미있어요.”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그의 시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속 문장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과거를 자책하는 사람일 수도, 아픈 일을 현재 겪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가장 명예로운 슬픔, 그의 말대로 자랑이 될 만한 슬픔은 무엇일까. 바로 누군가의 슬픔에 공감해 함께 눈물 흘리는 슬픔이다. 박준 시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타인을 공감하는 데서 오는 슬픔’이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Q ─ 박준 시인이 생각하는 좋은 시는 무엇인가요?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달리기에 비교하면 좋은 시는 ‘얼마나 빨리 결승점에 도착하냐’가 아니라 ‘얼마나 아름답게 뛰냐’의 문제 같아요. ‘좋다’라는 건 추상적인 개념이라 취향도 많이 타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한 번에 이해 안 가서 책장을 덮어두지만, 나중에 다시 펼쳐보게 되는 시, 음식에 비유하면 ‘평양냉면’ 같은 시를 좋아합니다. 먹을 땐 맛있는지 잘 모르지만, 나중에 생각나서 다시 찾아 먹게 되는. 하지만 이는 제 취향일 뿐이고, 좋은 시는 다양한 형태로 공존한다고 생각해요. 불교 수행법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어떤 수행법이 더 나은 수행법이라고 말할 수 없잖아요. 물론 최소한의 판단 기준은 있습니다. 시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영역, 즉 자유로운 예술의 영역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먼저 객관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종이에 점 하나 찍어놓은 시를 좋은 시라고 얘기할 순 없거든요. 세대를 초월해 공감을 얻는 것, 시가 넘어야 할 최소한의 관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터뷰가 끝난 후, 기자가 갖고 있던 시집을 박준 시인에게 건네며 사인을 요청하자 수줍은 듯이 웃으며 말한다. “책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로 사인을 요청받는 상황이 익숙할 법한데도 마치 첫 팬을 만난 듯 부끄러워하는 태도가 박준 시인답다. 그가 사인하면서 적어준 ‘그 숲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으므로 아무도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란 시구를 오랫동안 음미했다.     

글. 
허진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