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논문집을 낸 후 4월, 평생 처음으로 위장이 아파서 잠을 자지 못했다. 5층 아파트에서 누워있는데 창밖에 탐스러운 흰 목련이 피어 있었다. 그래서 매년 4월 목련이 필 무렵이면 첫 위통이 연상된다. 목련 봉오리, 조금 핀 봉오리 그리고 활짝 핀 봉오리 등, 그 목련들을 스케치했다. 그려보니 연꽃과 비슷한 아름다운 곡선의 꽃잎이어서 목련이란 이름이 생긴 것임을 알았다. 만성위염으로 정착된 위장병은 그 이후 조금도 낫지 않고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뇌와 위는 직결되어 있다고한다. 위가 매우 예민한 것은 어렸을 때부터 알았으나 병으로 되지는 않았으나 첫 논문집을 내고부터 그랬으니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불사리장엄전(佛舍利莊嚴展)>이란 야심찬 전시를 1991년에 기획했다. 전국의 탑에서 발견된 일체의 사리 관련 작품들을 수집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작품들을 광범위하게 조사하여 박물관 수장고에 모두 모아 두고 전시 준비에 들어갔다. 사리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기획하게 되었으나 그 당시 특별한 병이 생긴 것도 아닌데 식사도 못 할 만큼 몸이 매우 좋지 않았다. 실은 사리기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적이 없어서 다른 학자가 쓴 논문 가운데 훌륭한 것이 있으면 실을 생각이었다. 몇몇 논문을 읽어보니 자료 수집에 그친
것이라 내가 직접 쓰기로 했다. 몸이 좋지 않은 상태라 100매 정도 써서 싣기로 하고 논문을 써나가기로 했다. 불상, 불화, 중요한 사리기들, 석탑 등은 이미 오래전부터 공부해온 터라 감히 펜을 들었던 것이다. 사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사리기와 관련 문제들을 다루다 보니 무려 700매를 쓰게 되었다. 사리장엄의 본격적 연구의 신호탄을 올린 것이지만, 그 후에 이루어진 연구는 세분화되어 오직 사리기만을 다루어 오히려 퇴보된 듯하다.
논문을 쓰면서 나의 마음은 매우 고양되어 있었다. 사리 연구는 사리기라는 건축적 요소, 사리병의 다양한 형태,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탑의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사리기의 형식만을 다루는 연구는 생명이 길 수 없다. 그때만 해도 왕궁리 석탑과 발견 사리기 일괄을 고려 것으로 다루고 있었다. 나는 탑 비례의 미감이 백제의 정림사 석탑이나 익산 미륵사 석탑과 같아서 백제 탑으로 홀로 주장해 왔었다. 붓글씨를 써 본 나는 그 탑에서 발견한 금은판경(金銀板經) 『금강반야반야심경』이 뛰어난 백제의 글씨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당시 모든 학자들은 반응이 없었지만 따르는 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후 30년 만에 익산 미륵사 탑에서 사리기가 발견되었을 때 나의 주장을 입증하게 되어 매우 기뻤다.
그런데 그 경전을 만난 것은 이후 나의 삶을 지배했다. 『금강경』 전문을 새긴 기법도 뛰어났고 글씨도 삼국시대 글씨 가운데 단연 백미였다(사진1). 그런데 동양 어느 나라도 탑에 법신사리인 불경을 봉안했을 때 난해한 『금강경』 같은 최승의 경전을 봉안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다라니같은 경전을 납입한다. 그러니 백제는 얼마나 고고한 나라인가. 마음속으로 감탄하며 백제인들은 『금강경』을 이해했는데 나라고 읽기 어려운 경전일까, 생각하며 『금강경』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매우 어려워 신소천이 주석한 금강경을 읽
다 보니 주석이 번거로워 경전만 있는 얇은 책을 사서 항상 몸에 지니고 어디서든 읽었다. 여러 번 반복하면서, 깊은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매우 감동적이었다. 특히 누구나 다 아는 사구게는 삶뿐만 아니라 불상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제1구게: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제2구게: 응당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제3구게: 만약 색신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제4구게: 일체의 함이 있는 법(유의법-현상계)은 꿈과 같고, 환영과 물거품 같으며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이 사구게를 마음에 새기고 살았다. 경전을 항상 몸에 지니며 얼마나 반복하여 읽고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는지 모른다. 몇 해 전에 갑자기 『금강경』 사구게 생각이 나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서예가인 이용윤 여사에게 부탁하여 글씨를 받았다. 멋진 제4구게였다.
어느 날, 미국의 The Asia Society Gallery의 데싸이 관장이 방문해 한국미술전을 열고 싶은 데 주제를 정해 달라고 했다. 나는 조선 시대 영조와 정조에 걸친 1세기가 18세기 마지막 문예 부흥기라 할 수 있으니, 당시의 작품들로 기획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고 모두의 동의를 얻었다. 정양모 씨와 나는 모든 장르에 걸친 작품들을 선정하였다. 특히 정조는 모두가 알다시피 정조대왕이라 부를 정도로 세종대왕에 비견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분이었다. 정양모 씨와 김홍남 씨(당시 아시아 소사이티 갤러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와 함께 몇년 동안 준비했다. 1994년 한 달 동안 그곳에서 머물며 전시를 지휘해 전시를 마치고 개막식 전에 귀국했다. 그런데 출품작품 가운데 내가 선정한 특이한 불화가 있었다. 바로 ‘감로탱’이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불화로 대웅전 왼쪽에 걸며 천도재를 치를 때의 장면을 불화로 그린 것이다. 그 불화가 다른 불화와 다른 점은 하단에 현실에서 여러 가지 사건으로 죽는 장면을 그렸으며, 중단에는 감로단과 그 중앙에 아귀를 그려 넣은 점이다. 불화에 현실을 표현한 것은 감로탱이 유일하다. 전시 준비는 4년 정도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18세기 미술에 그리 밝지 못하여 우선 시선을 사로잡은 감로탱을 연구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감로탱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 성과가 전혀 없어서 난감했다. 우선 다른 감로탱을 본 적이 없어서 수많은 감로탱을 보아야 전시 도록에 논문을 쓸 수 있지 않겠는가. 전국의 모든 사찰의 감로탱을 조사해야 한다! 그로부터 3년 동안 우리나라 전국 사찰은 물론, 이른 시기의 16세기 감로탱은 일본에 있으므로 현지에 가서 모두 조사했다. 그제야 논문을 쓸 수 있었고 마침내 자료가 모두 수집되었다. 자료가 너무 많아 혼자서는 감당키 어려워서 1995년 미술부 학예사인 김승희님과 함께 공저로 타블로이드판 500페이지에 이르는 대 저서를 낼 수 있었다(사진2). 당시 미술사학 관련 저서로는 24만 원이란 고가였지만 독자의 뜨거운 호응으로 모두가 찬탄했으며 금방 절판되었다. 15년 후에 새 자료를 추가하여 증보판
을 출간했으며 값은 31만 5천 원(온라인서점 할인가)이 다. 뒤늦게 이 저서를 본 어느 민속학자는 우리나
라 민속학의 보고라고 놀라워했다. 왜냐하면 하단부에 현실적 인간들의 삶의 모습들이 빠짐없이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95년 어느 날, 호암미술관의 김재열 부관장이 나를 찾아와 호암미술관과 국립박물관 소장의 단원 김홍도 그림을 모아 호암미술관에서 전시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니까 국립박물관 소장품을 내달라는 셈이었다. 회화 전공은 아니지만, 언젠가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모두 모아 전시하는 것이 나의 꿈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김군, 김홍도 회화 전시는 호암미술관에서 할 성격이 아니다.” 두 기관과 간송박물관 소장품, 그리고 개인 소장품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집하여 국립박물관에서 대대적으로 전시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런데 문제는 간송미술관이었다. 김홍도의 주요 작품들이 많으나 그곳의 실장인 최완수 씨의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국립박물관에는 한두 점 정도는 가능해도 수십 점 회화 작품은 국립박물관이라 해도 절대로 출품하지 않을 것이고 감히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나의 집념도 그에 지지 않는다. 한 번 찾아가 기획전에 간송미술관 김홍도 그림을 함께 전시하되 주최를 세 박물관으로 하자고 제의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얼마 후 다시 가서 간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며칠 후 다시 가서 그 전시회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설득해서 마침내 간송박물관 소장 김홍도 그림 전부를 대여받는 데 성공했다. 세 기관 학자들이 힘을 합하여 기획한 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당시 김홍도 연구를 오주석 님에게 맡겼다. 그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 김홍도에 관한 자료들을 모으고 새로 밝히기도 하면서 김홍도의 인격을 존경하게 될 정도가 되었고, 그 시대의 문예부흥을 꿈꾸었던 정조대왕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나는 회화 전공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으므로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국립박물관에서 김홍도에 대한 심포지엄이 있었을 때 나도 김홍도 그림 양식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다. 세부 사진들이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모양이었다. 확대해서 살펴보면 단원이 얼마나 능숙한 필치로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있다. 오주석 님은 나의 제자나 다름 없는 훌륭한 학자였다. 그 후 그는 『김홍도』라는 저서를 냈고 안타깝게도 이듬해 백혈병으로 타계했다. 사람들은 안휘준 씨나 최완수 씨를 오주석 님의 스승으로 알고 있으나 그들과는 학문 태도가 달라 그들을 떠나 나를 스승처럼 대했고, 나도 그를 제자처럼 대했다. 그의 선후배들이 그의 학문을 기리어 유고집을 내려 했을 때, 유고간행위원장으로 나를 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대부분이 간송박물관에서 공부했는데도 의외로 나를 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김홍도 그림 가운데 스님이나 관음보살이 적지 않은데 그 필치가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른
바 도석화(道釋畵)에 능했는데, 신선을 그릴 때와 보살을 그릴 때 필치가 매우 달랐다. 특히 <절노도해도(折蘆渡海圖)>, <염불서승도(念佛西昇圖)>, <남해관음도(南海觀音圖)>, <노승염송도(老僧念誦圖)> 등 은 나를 매료시켰는데, 바로 그 표현 방법 때문이 었다(사진3). 그의 필력은 아무도 따라가지 못하리라. 오주석 님은 김홍도를 기리는 마음이 너무 커서 그처럼 가야금도 배울 정도였다. 그는 김홍도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1990년 전반은 매우 바쁜 나날이었다. 기획전을 강조하는 까닭은, 연구 성과에 따라 기획전을 열기 때문에 그런 전시를 열 때마다 미술사학이 한층 높이 발전해 나가기 때문이다. 요즘은 교수들은 물론 학생들도 답사를 등한히 하고 작품 조사를 우선시하지 않을뿐더러 사진기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사진기는 미술사학의 가장 강력한 연구 도구다. 이는 마치 천문학자가 천문대에서 천문 망원경을 보지 않는 것과 같다. 망원경을 통해서 천문을 읽지 않은 천문학자들은 만인의 지탄을 받을 것이다. 사진기의 렌즈를 통해 조형예술 작품들을 관찰한다는 진실을 모르는 미술사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지탄을 받아야 한다. 대부분이 도록을 보거나 인터넷을 검색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논문을 쓰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것은 과학자가 실험을 하지 않고 논문을 쓰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런 절대적 필요성조차 인식하고 있지 못하므로 학생들을 어찌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불교 미술 연구자들이 불교 철학 이나 불교 신앙을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불교 미술은 불교 철학이나 불교 신앙의 산물이다. 단지 불경을 읽어서 도상과 관계있는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불교를 철학해야 한다’. 불교 철학을 지식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체험해야 한다. 불교 신앙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고는 2,000년 동안 연면히 이어져 온 한국 미술의 어떤 작품도 올바로 해석할 수 없다. 대부분이 문헌 기록이나 기왕의 논문에 의존한다. 그러나 미술사학의 연구 대상은 조형예술 작품들이다.
불교의 예술 작품들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형태들인데도 현실에서 비슷한 것을 찾아서 설명하고 있으니 완벽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연구를 하여 논문을 쓸수록 오류만 드높이 쌓여갈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사람들에게는 불교 미술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 역시 작품에 즉한 관찰과 사색에 이어, 훗날 고구려 벽화를 풀어내면서 비로소 불교 예술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그 이전에는 보이는 것이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우방
1941년 중국 만주 안동에서 태어나, 1967년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미술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학예연구관과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역임하고 2000년 가을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초빙돼 후학을 가르치다 퇴임했다. 저서로 『원융과 조화』, 『한국 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법공과 장엄』, 『인문학의 꽃 미술사학 그 추체험의 방법론』, 『한국미술의 탄생』, 『수월관음의 탄생』, 『민화』, 『미의 순례』, 『한국불교조각의 흐름』 등이 있다.
글.
강우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