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에세이-살며 사랑하며] 대성리, 부다가야와 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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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에세이-살며 사랑하며] 대성리, 부다가야와 모기
  • 박종인
  • 승인 2019.12.0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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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사무실에서 격심한 살기를 느낀다. 모기다. 이제는 여름만 아니라 사계절 출몰하는 그 작은 생명체로 인해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살기로 충만해 글이고 뭐고 집어던지고 손바닥을 피로 물들일 준비를 한다. 내 정신을 혼란시키는 내 마음으로 인해 몇 찰나의 내 인생 방향이 바뀌는 것이다.
기억해보면, 변심(變心)으로 인해 인생이 극적으로 바뀐 적이 몇 차례 있었다. 1984년 6월 6일이었다. 재수 시절 소나기 내리는 수요일이었다. 대학 시험에 떨어진 고등학교 동창 악동들과함께 강원도로 갔다. 서울 종로와 노량진 통에서 술에 찌든 재수생들이 비둘기호를 타고 대학생들 엠티 떠나는 대성리로 간 것이다.
남들 다 가는 대학에 못 갔다는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때이기도 했다. 나는 그 연민이 굉장히 심했다. 그래서 이제 며칠 뒤 나는 온 방에 백합꽃을 가득 흩뿌려놓고 선풍기를 밤새 틀어서 죽겠다고 결심해놓은 터였다. 아주 심각했다. 이까짓 인생 덧없다, 대충 그런 뒤죽박죽된 생각으로 인생을 정리해놓고 나는 아이들과 함께 기차를 탔다.
몇 놈이 술에 취해 모래 위에 자빠져 자는 사이 그 악동 가운데 최악의 악동과 나는 강에 대놓은 나무배에 올라탔다. 한참 노를 젓는데 멀쩡한 하늘에서 비가 퍼붓는 것이다. 격랑이 배를 때리고, 그 악동은 겁에 질려 배를 바깥으로 몰아 내려버렸다.
그래, 시간도 아끼고 꽃 살 돈도 아끼자. 나는 다시 배를 탔다. 열심히 노를 저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빗방울이 눈구멍과 콧구멍을 아프도록 두드렸다. 강 가운데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배를 내 마음대로 저었고 내 마음대로 소리를 질렀다. 고함을 구체적으로 지르면 아이들이 눈치를 챌 터이니, 그냥 짐승들이 지르는 그 소리를 내며 배가 전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거짓말처럼 싹 멈추더니 하늘이 갈라지며 태양광선이 내 머리 위로 내려 비추는 게 아닌가. 저 멀리서는 여전히 폭우가 퍼붓는데, 내 주변은 비가 멈추고 하늘까지 파랬다. 왜인지는 모르나, 그때 백합 100송이와 선풍기와 자기 연민과 죽음에 대한 망상은 싹 사라져버렸다. 자살을 결정할 때까지 내가 겪었던 그 긴 번민과 자살 수단을 찾느라 투입됐던 노력은 억울할 정도로 완전히 물거품이 됐다.
그리하여 나는 툭하면 학원을 결석하고 술집을 전전하며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며 인생을 즐기다가 경상북도 풍기에 있는 성혈사에 두 달 동안 살면서 재수를 마무리했다. 욕쟁이 봉철 스님한테 욕도 원 없이 들어보았고, 만 배를 하면 시험 편하게 본다는 유혹에 사흘 동안 절을 하고선 ‘이러다 시험도 못 보고 죽지’ 하며 앓다가 귀경해 시험을 치렀다. 다행히 삼수는 하지 않았다.
세월이 갔다. 어찌어찌하여 나는 신문 기자가 되었고 1999년 가을 나는 인도로 갔다. 부다가야 평화로운 보리수 아래에서 나는 물람 푸속을 만났다. 물람 푸속은 멕시코계 프랑스 청년이었다. 신도 없고 종교도 당연히 없고 신념과 철학도 애매했던 내가 그에게 물었다. “왜 여기에 왔지?” 그가 말했다. “성지 순례다.” 옳거니, 너 잘걸렸다. “성지라고? 부처님은 마음속에 있다고 하던데? 돈, 시간 들여가며 여기 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역시 엉터리구나.” 물람 푸속이 말했다. “사람들이 부다가야를 성지라고 생각하며 오니까 부다가야가 성지인 거다. 그 마음이 모여서 이 낡은 도시를 성지로 만드는 거지. 나도 마찬가지고. 저 사람들 얼굴을 보라. 다들 성스럽지 않은가, 친구.”
성지라고 생각하니까 성지인 것이다! 진실로 그러하였다. 반골 정신으로 무장한 나마저도 그 순간만큼은 보리수 아래에서 성(聖)의 공간을 만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후 여행 기자라는 직업상 여러 종교의 성지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물람 푸속의 맑은 눈동자로 그들을 보니, 모두 성자들이었다. 삶에 빛을 뿌리고 사라진 대성리 소낙비가 어느 틈에 다시 내 가슴 속에 비를 퍼붓고 사라진 것이다. 이후 살다가 지쳐서 자기 연민에 패배할 징조가 보이거나 삶이 지겹고 세상이 몹시 밉게 느껴질 때면 나는 어린 시절 대성리와 젊은 날 부다가야를 생각한다. 그렇게 맑은 눈망울을 그 이후로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 저놈의 모기는 어찌할 것이냐. 모기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내 살기는 끝이 없을 터이니, 대성리 폭우도 부다가야 보리수도 어찌할 수 없는 내 마음을 천지사방 성자들은 용서하시라.

 

박종인
1992년부터 조선일보 기자다. 2015년부터 조선일보에 <박종인의 땅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역사기행 기사를 연재하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 잘못 기록된 역사, 왜곡된 역사를 땅에 남은 흔적을 통해 알아보는 연재물이다. TV조선에 같은 제목으로 역사기행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2008년 재중 탈북자 문제를 다룬 ‘천국의 국경을 넘다’로 삼성언론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한일관계사로 본 조선 왕조 실패의 경영학 『대한민국 징비록』, 숨겨진 역사,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찾는 『박종인의 땅의 역사 1·2』와 역사 기행 『여행의 품격』, 글쓰기 가이드 『기자의 글쓰기』, 인물기행 『한국의 고집쟁이들』, 『행복한 고집쟁이들』,『골목길 근대사』(공저), 여행 에세이 『내가 만난 노자』, 인도 기행서 『나마스떼』, 『우리는 천사의 눈물을 보았다』(공저)와 한국 여행 가이드북 『다섯가지 지독한 여행 이야기』가 있다. 옮긴 책으로는 미국인에 의해 뉴욕으로 끌려온 에스키모 소년 이야기 『뉴욕 에스키모, 미닉의 일생』과 인도 서사시 『마하바라타』가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을, 뉴질랜드 UNITEC School of Design에서 현대사진학을, 사회에서는 인생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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