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법당 앞에 핀 여름 꽃들이 아름답다. 연꽃, 배롱나무, 자귀나무, 능소화, 수국, 해바라기 등 등. 연꽃은 주위에 못이 있으면 온통 점령하듯이 피어 ‘연못(蓮池)’이다. 못이 없어도 절 마당 절구 통 안에 꼭 한자리는 차지하고 있다. 배롱나무의 마른 표피는 산사에 갇혀 있던 오랜 침묵, 혹은 노인의 등뼈 같다. 그것을 무욕으로 보아 절 마당에 많이 심는다. 흰 배롱나무꽃이 석탑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마음을 맑게 가라앉혀 준다. 수국 은 녹색을 띤 흰 꽃, 청색, 홍색, 자색 등으로 종류가 여럿이다. 청색은 깊은 바다색 같다. 꽃 색이 종자에 따라 다른 줄 알았더니, 산성은 청색, 알칼리성은 적색, 이런 식으로 토양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안국사(安國寺)에 들어서니, 법당 앞에 진파랑 수국, 작은 배롱나무 한 그루, 담장에 능소화가 피어 있는, 어디에선가 보았던 옛 절집이다. 무성 한 여름 오전, 절 마당엔 불볕이 쏟아지고 있다. 아직 사시예불 전인데, 법당에서 흘러나오는 청 아한 목탁 소리, 묵직한 염불 소리, 한줄기 바람처럼 소나기처럼, 한여름의 적막을 베고 지나간 다. 스님 혼자 기도를 올리고 있는 중이다. 아무 도 없는 암자에서, 듣는 이 없는 법당에서, 가사 장삼 갖춰 입고 벌써 1시간 넘게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독경을 한참 하고, 기도 말미에 ‘서 울시 종로구 창신동 아무개 보체(保體)’ 하는 식의 축원도 잊지 않는다. 보는 이 없으니 기도를 거르 고 대략 하건마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바른 지 계(持戒)의 시간이 지나간다. 나는 이날 말고 전에 도 안국사에 들렀었는데, 그날도 이와 똑같은 모습을 보았다. 나는 기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지 만, 스님은 다음에 오라고 하여, 그 길로 내려갔 다가, 지금 다시 찾은 것이다. “자, 차 한잔하러 갑시다!” 사람들이 그러하듯 스님들도 그런다. 두 번 만나면 구면이고, 구면이면 반갑다. 말이 쉽게 나 오고, 나가는 말들이 많아지고, 사이는 좋아지는 것이다. “텅 빈 산중 암자에서 홀로 독경하는 모습이 경건하고요, 진짜 절에 온 것 같습니다.”
“양쪽에 그 믿음을 지켜주시는 거네요.”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 동기가 순수 한 믿음, 알음알이를 떠난 믿음. 자신을 믿지 못 하는 사람은 남도 믿지 못하지. 불교는 지혜의 종 교이지만, 사실은 믿음이 지혜보다 빠르거든.” 현보 스님, 용타 스님 상좌고 청화 스님 손상 좌다. 3년 늦어 전남대 경제학과 72학번. 교지 편 집장으로 일했고, 5· 18의 마지막 수배자 고(故) 윤 한봉 열사와 한 시대를 보낸 운동권 출신이다.
스스로 “목포 선창 출신이라 독하다”고 했다. 사 업을 거덜 내고, 이레를 술만 먹고 헤매다가, 죽 고 싶어도 죽지도 못하다가, 어느 날 인연이 닿아 백장암에서 ‘동사섭(同事攝)’을 하고, 그 길로 출가 했다. 동사섭은 불교의 사섭(四攝) 중 하나. 아낌없 이 베풀고(布施攝),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愛語攝), 이타행으로 도와주고(利行攝), 그리고 동사섭. 보 살이 중생과 같은 눈높이로 희로애락을 함께하 면서 법을 깨치게 하는 높은 수준의 실천행이다. 원효 스님이 거지로 살면서 했던 무애행이 그것 이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지만, 그 사지(死地)를 헤 매던 몸이 가뿐해지고, 마음이 밝아지고, 한 순간 이 열립디다. 그 길로 비구가 되었지요. 사미, 비 구 하는 그 비구 말고 진짜 비구. 비구가 뭔지 알 아요?” “…” “비구를 출가 수행승이라고 하지요? 그 핵심 이 뭐요? 거지야. 좋은 말로 ‘걸사(乞士)’라 하지. 거 지가 뭘까? 거지는 ‘탐심(貪心)’이 없는 자요. 비구가 거지임을 알고 거지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야. 안거 때 선방에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거지의 마음이라….” “내가 중노릇하면서 종정이 한번 돼봐야겠 다, 주지를 한번 해봐야겠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비구가 아니야. 겉으로는 침이 마르도록 공(空)과 무아(無我)를 얘기하면서 부처 행세를 하 지만, 그런 것은 다 가짜지. 내가 없는데 종정을 할 나는 어디 있나? 다 탐욕이요. 탐욕을 못 벗어 나니까 비구가 아닌 거요.”
탐이 제거된 사람이 깨달은 사람인 거요 몸과 마음이 다 공한 사람. 진짜 거지!
“…” “스님, 재(齋)를 지내거나 등(燈)을 달거나 어 떤 의식을 할 때, 그때뿐인 줄 알았습니다만, 사 람들이 다 돌아간 뒤에도 홀로 축원 기도를 하시 는군요.” “약속이잖아요?” “듣는 이가 산밖에 없는데, 홀로 기도를 하시 면 부처님은 알아주십니까?” “부처님이 어떻게 알겠나, 내가 알지. 기도는 그 사람들하고 약속이 아니고, 나하고 약속이요.”
함양 지리산 안국사는 절 뒤편 가파른 산 중턱에 작고 단아한 모습의 ‘은광대화상부도’가 있다. 은 광 스님의 기록은 없고, 승탑 기단의 연꽃무늬 양 식이 통일 신라 말기 것이어서 그즈음에 창건한 것으로 본다. 그 후 폐사지였던 것을 1430년(세종 12) 천태종 행호 스님이 중건했다. 행호 스님은 조 선의 척불(斥佛) 속에서도 세종의 신임을 얻어 안 국사와 금대암, 백련사 등을 중창했고, 어려운 시 대 불교의 맥을 이으려 노력했던 인물이다. 행호 조사 부도가 절 아래에 있다. 지금은 작은 암자지
만, 당시 안국사는 금대암 등 부속 암자를 거느린 꽤 큰 절이었다. 임란 때 왜군 500여 명이 지리산 으로 들어와 수많은 사암을 불태웠는데 그때 안 국사와 금대암도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그 뒤 다시 중건했지만 한국 전쟁 때 재차 전소됐다. 지 금 당우는 그 이후 것들이다. 안국사 마당에 서면 지리산 능선의 툭 트인 풍광이 시원스레 펼쳐진 다. 동쪽으로는 삼정산이 길게 앉아 장쾌한 멋을 준다. 법당 그늘에 쪼그리고 앉아 얘기를 듣고 있 노라니, 여름 산바람 솔솔 불어온다.
중노릇 40년이 돼 가니, 목탁 소리만 듣고도 알겠어. 저것은 정진하는 소리다, 저것은 돈 목탁 이다, 저것은 억지로 하는구나 하고 다 들려. 중 이 돈을 알면 안 돼. 돈을 알면 세상 모든 기준이 돈이 되어버려. 사람 버리는 거라. 우리나라 유명 한 기도처 많지요? 기도하는 스님들은 그런데 가 면 대접 받지. 돈을 많이 주거든. 돈 받고 기도하 면 그게 기도인가? 중이 돈맛이 드는 거지. 법복 은 입었어도 중이 아니지. 빌어먹는 거지나 다를 게 없어.” “스님, 아까 스님은 거지가 돼야 한다고….” “허허 그게 아니고, 그 거지하고 이 거지하고 달라.” “뭐가 다릅니까?” “마음이 달라. 거지는 돈이 없잖아. 돈이 있으 면 거지가 아니지. 돈이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진짜 거지야. 주면 먹고 안 주면 안 먹고, 배고프면 나가서 걸식하고. 돈이 없으면 불안한 사람이 가짜 거지라, 옷은 있는데 좋은 모피가 갖 고 싶고, 차는 있는데 벤츠가 갖고 싶고, 만족이 안 되는 사람.” “스님, 참 어려운 일입니다.” “탐(貪). 탐하는 마음. 탐은 탐진치(貪瞋癡), 삼 독(三毒)의 첫째요. 물론 삼독의 중독을 푸는 삼학 (三學)의 해독도 있지. 계(戒)로 욕심을, 정(定)으로 노여움을, 혜(慧)로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그런데 부처님이 왜 탐을 가장 앞에 뒀을까? 탐이 공(空) 의 적(賊)이기 때문이라. 색즉시공이지만, 탐하고 공은 같이 갈 수 없어. 공한데 어찌 탐이 있겠으며, 탐을 내는데 어찌 공이 있겠나. 그러니까 탐 이 없는 사람, 탐이 제거된 사람이 깨달은 사람인 거요. 말로만 하는 사람 말고, 몸과 마음이 다 공 한 사람. 즉 다시 말하면 진짜 거지!”
현보 스님, 거의 거지가 되어간다고 했다. 출가 하고 돈이 없어서 물질적으로는 평생 거지였고, 칠십 다 돼서 이제야 탐으로부터 좀 벗어나서 정 신적으로도 상당한 거지가 됐다는 것이다. 돈이 나 다른 욕심을 내보고 싶어도 한평생 중노릇 한 지난 세월이 너무 아까워서 이제는 못 하겠다고 한다. “암자는 보림(保任)하는 곳이거든. 깨친 후에 자성을 보호하는, 말하자면 숙성시키는 곳이라. 숙성 시간이 긴 술이 좋은 술이지. 진짜 거지가 되어보려고 들어왔는데 진짜 거지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고. 아무튼 더 오랫동안 숙성시키면서, 그러다가 내 생은 여기서 끝나겠지….”
이광이
60년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따라 대흥사를 자주 다녔다. 서강대 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했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와 더욱 친해졌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을 하나 냈고, 도법 스님, 윤구병 선생과 ‘법성게’를 공부하면서 정리한 책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