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부처님은 크게 두 가지 면모를 지니셨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부처님을 두 갈래로 바라보고 있다. 인간의 차원을 훌쩍 넘어선 ‘신적인 존재’로 보는가 하면, 인간으로서 모든 생명체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분으로 보기도 한다. 첫 번째 차원의 부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자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고, 두 번째 차원의 부처님은 우리가 수행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해당한다.
우리는 어떤 차원의 부처님을 찾아야 하는가? 불교의 훌륭한 용어 중에 ‘대기설법(對機說法)’이 있다. 그것은 병에 따라 의사의 처방이 다르듯이, 부처님의 법문도 중생의 근기에 따라 내용과 형식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부처님이 두 가지 면모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대기설법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부처님의 생애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신화적인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부처님은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태어나셔서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사시고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떠나셨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부처님의 육신은 떠나셨지만 법신은 영원히 남아 우리를 지켜보신다는 것이 붓다 신화의 골자이다.
오늘날에는 신적인 부처님보다는 인간적인 부처님을 찾는 경우가 많아졌다. 수행을 통해 붓다의 경지에 들고자 하는 이들이 스스로 닮아갈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적인 부처님을 찾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신화적인 부처님의 생애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까지 말한다. 호진 스님 같은 경우는 『성지에서 쓴 편지』라는 책에서 “역사적인 부처님의 참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신화와 전설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다. 나의 공격 목표는 신화와 전설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신화와 전설을 걷어내고 온전히 역사적인 부처님을 찾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로 인해 불교의 역사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며, 부처님을 닮아가기 위한 실천행 또한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부처님의 신화 속에도 우리의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고 본다. 이 글은 오늘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무장된 세대를 위해 붓다 신화 속에 담긴 교훈을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생을 마치며 태어날 곳을 선택한 부처님
많은 사람들이 부모에 대해 불만을 가져본 적 있을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왜 나를 낳으셨나요? 낳으셨으면 책임을 져야죠.” 이런 푸념 속에는 부모가 자식을 선택했다는 생각이 담겨 있을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옳지만, 붓다의 신화를 통해 생각해보건대 자식이 부모를 원망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붓다의 신화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인지를 확인할 수 없는 신화라 할 수 있다. 부처님의 마지막 전생은 도솔천의 조띠빨라(Jotipāla, 護明)보살이다. 여기서 보살은 붓다의 전생을 지칭하는 것이다. 보살이 붓다가 되기 직전 도솔천에 서 사는 이유도 신화적이다.
도솔천은 선행을 많이 닦은 이들이 태어나는 세계이다. 그 세계 사람들은 모두 4요자나(yojana: 소가 멍에를 메고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가 1요자나이니, 그들의 키는 가히 상상 불가이다)의 키에 아름답고 빛나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생각만 하면 옷과 음식이 눈앞에 나타났고, 그 옷은 가볍고 부드럽기가 잠자리의 날개 같았다. 그들이 함께 어울려 노래하고 춤출 때면 미묘한 음악이 저절로 울려 퍼졌다. 그들은 인간 세계의 사백 년이 단 하루인 그곳에서 4천 년의 수명을 누리며 살았다. 수명 역시 상상이 가지 않는 수치이다.
호명보살이 도솔천에 태어난 이유는, 도솔천보다 아래 세계인 사왕천이나 도리천·야마천 등에 태어나면 게으름과 욕정이 남아 있어 속박이 너무 두텁고, 이보다 높은 위치인 화락천이나 타화자재천에 태어나면 속박이 너무 얇아 고요한 선정만을 즐기게 되어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결국 보살은 스스로의 의지로 많은 세계 가운데 속박이 두텁지도 얇지도 않은 도솔천을 선택하였고, 도솔천에서 보살행을 펼치다가 인연이 다하자 과거 전생에서부터 세운 서원에 따라 다음 생애는 붓다가 되리라 결심한다.
『대지도론』에 따르면 보살은 붓다로 태어나기 전 인간 세상을 네 가지 관점으로 관찰한다. 첫 번째는 때를 관찰하고, 두 번째는 장소를 관찰하며, 세 번째는 가문을 관찰하고, 네 번째는 어머니를 관찰한다.
때를 관찰하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인연에 따라 인간의 수명이 100세인 때를 선택하기 위함이다*. 장소를 관찰한다는 것은 붓다들은 늘 중앙 지방을 선택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야 붓다의 가르침이 세상에 골고루 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문을 관찰한다는 것은 그곳에서 가장 존중받는 가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붓다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기 위함이다. 어머니를 선택할 때는 많은 공덕을 쌓은 분으로 단정하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분을 찾는다. 그 결과 보살은 사람의 수명이 100세일 때, 수메루 남쪽 잠부디빠(Jambudipa, 閻浮提)의 까삘라왓투의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왕의 왕비 마야(Māya)부인을 선택했다.
이러한 신화가 역사적 사실인지를 증명할 길은 없지만, 이 신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들의 다음 생애는 우리들이 지은 업(業)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업은 의도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우리의 업에 따라 우리가 부모를 선택하는 것이지 부모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부처님처럼 선업을 많이 닦았다면 ‘원력’에 따라 명료한 상태에서 부모님을 선택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업력’에 따라 태어날 곳을 향해 가게 된다. 원력이나 업력이나 스스로 만든 것이므로 자신의 삶에 대해 부모를 원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고 자책할 것은 없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전생에 대단한 선업을 쌓았음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티베트의 역대 달라이 라마는 제자들에게 다음 생애를 암시하는 전언을 던지고 현생을 마친다. 그 근거가 붓다의 신화 속에 있었으니,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부처님께서 당신이 태어날 곳을 스스로 선택하셨다는 신화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부처님께서 원력에 따라 명료하게 자신의 다음 생애를 선택하셨듯이 우리도 ‘업력’이 아닌 ‘원력’에 따라 다음 생애를 선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 『디가니까야』 「대전기경」에 따르면 붓다의 수명은 위빳시(Vipassi)불 때 8만 세, 시키(Sikhi)불 때 7만 세, 웻사부(Vessabhū)불 때 6만 세, 까꾸산다(Kakusanda)불 때 4만 세, 꼬나까마나(Kanakamuni)불 때 3만 세, 까사빠(Kāśyapa)불 때 2만 세, 석가모니불 때 1백 세다.
글_ 동명 스님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지홍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 출가하여 사미계를 받았고, 2015년 중앙승가대를 졸업한 후 구족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 대학원 선학과에서 공부하면서 북한산 중흥사에서 살고 있다. 출가 전 펴낸 책으로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