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망명지 다람살라, 1959년 중국 공산군을 피해 히말라야를 넘은 제14대 달라이 라마 스님이 인도 땅에서 자리 잡은 곳이다. 당시 네루 수상이 제시한 세 곳 중에 달라이 라마 스님은 이곳을 선택했다. 고향의 모습과 가장 닮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다람살라라는 인도 말의 뜻은 ‘진리의 피난처’란 의미를 가졌다.
러시아 비탈리 만스키 감독의 영화 <선라이즈 선셋(Sunrise/Sunset, 2008)>은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의 하루 일상을 담았다. 아마도 감독은 러시아 불자들의 순례길을 따라나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일행들처럼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다람살라를 찾아간다. 걸어서 30분이면 동네 한 바퀴를 다 돌 만큼 작은 마을, 볼거리라고는 옆 마을의 작은 폭포 하나뿐인 산마루의 외딴 동네에 세상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오직 하나, 그곳에 달라이 라마 스님이 있고 그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람살라에 머물다 보면 수 없는 카메라와 방송팀, 다큐멘터리 제작팀을 볼 수 있다. 세계적인 방송사부터 젊은 학생까지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다람살라를 살펴보기 위해 드나든다. 때로는 뉴스거리를 찾아 더러는 영적 탐구를 위해 카메라를 들고 다람살라로 오는 것이다. 추측건대 아마도 현세의 종교 지도자 중 가장 많은 뉴스와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달라이 라마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과 생각과 행동에 눈길을 준다.
달라이 라마에 대한 가장 큰 규모의 영화는 <티벳에서의 7년(1997)>과 <쿤둔(1997)>이 있다. 1989년 자신을 히말라야에서 온 평범한 비구승이라 밝힌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 전까지 불교신자들이나 관심을 갖던 달라이 라마 스님에게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시점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달라이 라마 스님은 그의 조국이 처한 침략과 파괴, 종교와 신념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불교의 제1계율인 비폭력을 주장했다. 노벨 평화상은 스님의 노력에 대한 세계의 화답이다.
<티벳에서의 7년>과 <쿤둔>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두 영화 모두 달라이 라마 스님의 어린 시절 티베트가 역사의 암흑 앞에 놓였던 시절을 그리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 특유의 세련됨과 화려함으로 그림엽서와 같은 티베트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티베트의 현재가 아니다. <선라이즈 선셋>은 두 영화뿐 아니라 달라이 라마를 다룬 다른 영화와 다큐멘터리들에 비해 거칠고 서투르다. 심지어 분량을 늘리기 위해 달라이 라마와 무관한 영상들도 끼워 넣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탁월한 미덕이 있다. 다른 영화와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없었던 달라이 라마의 일상을 바로 곁에서 어떤 왜곡과 과장 없이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영화 속 새벽 3시 달라이 라마 스님의 방에 불이 켜지면, 스님은 이를 닦고 부처님 전에 참배하고 명상하며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스님은 건강을 걱정하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러닝머신 위를 땀 흘려 달리고 아침을 대신해 차 한 잔을 마신다. 경전을 읽고 오늘 만날 사람들을 위해 법문할 내용을 되짚어 본다. 텔레비전을 켜 뉴스를 보는 수행자의 탁자 위엔 병고를 피할 수 없는 무상한 육신 탓에 약병들이 늘어서 있다.
멀리 러시아에서 온 불자들을 만나고 그들을 위해 법문하고 마음을 다해 선한 삶의 길을 걸을 것을 축원한다. 잠깐 마주친 비탈리 만스키 감독을 위해 아주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 삶이 마주치는 찰나들은 반은 과거이고 반은 미래입니다. 우리는 어제의 결과로 살아가지만 지금 이 순간 내일의 원인을 만들며 살고 있습니다. 어제의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지금 우리 마음과 행동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 닥친 업보에 괴로워하면서도 우리는 무엇을 해야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를 혼돈하고 있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바로 선한 마음을 내고 어제와 다르게 착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스님은 강조한다.
법회 때 종종 스님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한다. “예전 나를 알던 이들을 지금 만난다면, 참 많이 사람 됐다고 할 것입니다. 제멋대로고 성질도 고약했었는데, 아주 조금씩 차츰차츰 나아졌습니다. 지금도 나아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진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처럼 비록 미세하지 만 점점 나아진다면 아주 다른 삶으로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속 품은 서원으로 조금씩 조금씩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달라이 라마 스님의 권유다.
해가 지면 가로등 켜진 비탈길을 걸어 방으로 들어가 스님은 부처님께 참배하고 세상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을 위해 기도한다. 잠시 후 달라이 라마 스님의 방에 불이 꺼진다. 스님의 하루 일과가 끝난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왜 <선라이즈 선셋>일까? 달라이 라마의 하루, 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를 보여주기 때문일까. 감독은 자신의 육성으로 그 까닭을 직접 이야기하고 있다. “태양은 떠오르면 반드시 진다. 태양이 떠 있을 때 그 빛과 볕을 온전히 즐기자.”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을 때 한껏 듣고 배우자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 스님에 대해 많은 이들이 그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증을 갖는다. 이 영화에서, 또 많은 법회에서 스님은 그 질문에 대해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로 되짚어 말한다. 우리가 때때로 좌절과 절망의 시간을 맞을 때에도 결코 폭력과 분노와 야만에 굴복하지 말라고 답한다. 오히려 우리를 해치려는 이들의 무명을 슬프게 바라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한다. 대승 보살도가 분명히 옳은 길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면 달라이 라마 스님의 하루를 들여다보라.
● <선라이즈 선셋>은 국내 서점에서 DVD를 구할 수 있다.
글_ 김천
동국대 인도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방송작가, 프로듀서로 일했으며 신문 객원기자로 종교 관련기사를 연재하기도 했다. 여러 편의 독립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지금도 인간의 정신과 종교, 명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