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도구를 사용한 이래, 문명의 발달 속에서 기술의 발전은 점차 노동을 줄이고 보다 편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부르는 현재는 스마트 기기가 상용화되고, AI 로봇들이 인간의 자리를 대체하는 중이다. 많은 부분 삶이 편리해진 반면, 자동화된 기계에 밀려 갈수록 사람들의 설 자리가 줄어든다며 불안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앞으로의 사회에서 인간과 기술은 어떻게 공존해야 할까.
: 먼저 ‘기술’의 정의부터 짚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기술’이란무엇인가요?
기술이라는 것은 굉장히 초보적인 수준에서 이야기한다면, 인간이 삶을 펼쳐가기 위해 자신의 신체 아닌 것을 도구로 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대표적으로 떠올리겠지만, 따지고 보면 나무 막대를 들고 열매를 따는 것도 기술이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정의 중에 하나가 잘 보여주듯이 기술은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인간과 함께했던 생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나아가 인공지능 등으로 대표되는 현재의 기술이 현대인의 삶에 스며들며 편리함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요. 우리는 이 ‘기술’이란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기술이라고 하는 것은 기계나 도구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과 기계가, 인간과 그 어떤 기술이라고 상정되는 요소들이 맺는 ‘관계’가 핵심이다. 그 관계는 인간의 편의와 생산의 효율성 극대화가 기술적 요소들의 능력을 최대한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고안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기계가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은 지난 역사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초과하는 힘을 행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는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산업 혁명 이후 컴퓨터가 만들어지고 인터넷과 연결되고 인간보다 바둑을 잘 두는 로봇까지 등장하니 기계가 인간을 초월하는 시대가 온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이 또다시 반복됐다. 다만 과거에는 육체적인 부분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힘에 대해 그러한 우려가 나왔다면, 이제는 정신적인 능력까지 인간을 추월할 것이라는 걱정에서 나온 물음이다. 어떻게 보면 불가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이 워낙 빨라 신기술의 유입 시기가 단축되고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이와 같은 두려움이 출현한 것이 처음은 아니라는 것이고, 과거 두려움의 기술이던 불도저나 포크레인 등도 지금은 익숙해져 누구 하나 무섭다고 하는 이가 없는 만큼 아마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발전된 기술들도 익숙해지지 않을까 싶다.
: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 노동을 기계들이 대신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미래에는 기술이 어떤 부분까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게 될까요?
‘인간에게 쉬운 것은 컴퓨터에게 어렵고 반대로 인간에게 어려운 것은 컴퓨터에게 쉽다.’ 미국의 과학자 모라벡이 1970년대에 말한 역설(Moravec’s Paradox)이다. 체스에서 딥블루가 카스파로프를 이긴 게 1997년이지만, 이족 보행을 하는 로봇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2000년이다. 인간은 너무나 쉽게 걷지만 기계는 어렵게 느낀다. 심지어 지금의 수준에서도 조금만 환경이 복잡하게 변하면 쉽게 걷지 못한다. 청소도 마찬가지다. 로봇청소기가 많이 나왔지만, 청소하는 게 섬세하지 못하다. 조건이 필요하다. 문턱이 없어야 하고, 조금만 두꺼운 전선이 있어도 돌아간다. 개와 고양이 구분도 그렇다. 이걸 보면 기계가 잘하는 것과 인간이 잘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공학 과학자들이 미래에 인간 노동력 전반의 80% 정도가 기계로 대체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과 기계가 잘하는 것이 다른 만큼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인간이 더 잘할 것이고 대체되는 시기도 늦을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기계와 인간 사이에서 누가 더 잘하는가?’ 하는 경쟁의 관점으로 바라봐서는 안 되겠다. 도구와 인간은 협업하는 관계다. 막대기를 들고 있는 사람이나, 불도저를 타고 있는 사람처럼 기계는 인간이라는 결합자를 필요로 하고, 인간은 기계라는 결합자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결합자 내지 연결자로 봐야 한다. 결합해서 작동하는 게 기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 요즘에는 인(人)테크라고 하여 기술의 목적이 사람의 신체, 환경, 사회적 어려움의 해소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인공지능이 이러한 목적을 충분히 담아내고 발전되어 갈까요?
원래 기계라는 것은 인간들이 잘할 수 없는 것을 잘하게 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대신하게 만든 것이고, 그런 보충적인 관계와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더라도 그 기술을 사용하면서 인간이 달라진다. 도구를 사용하면서 인간 손의 활용이 달라진 것처럼 말이다. 가령 핸드폰 사용이 늘어 번호를 못 외우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예전보다 기억력이 감퇴한 것은 아닌가.’ 하는 말이 나온다. 이는 쇠퇴가 아니고 환경이 변하면서 다른 것을 보고 기억하는 데 신경 써야 할 일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인간과 기계는 서로 보충적인 관계고, 서로를 변화시킨다. 인간이 기계 구조를 만들어가는 만큼이나 그 기계가 인간 구조와 주변 환경을 바꿔낸다. 심지어 정신력도 바꿔내고 사람들의 인식이나 감각도 달라지게 만든다. 카메라에 있어서도 머이브릿지(Eadweard Muybridge)라는 사람이 연속 셔터를 쓰기 전에는 달리는 말의 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볼 수 없었다. 연사로 찍은 사진을 사람들이 직접 보고 나서야 지각할 수 있었고, 말의 움직임 구조가 머릿속에서 연상됐다. 혹은 하늘에서 본 시각도 그렇다. 요즘에는 드론이 상용화되어 인간이 볼 수 없는 관점에도 보게 되면서, 높은 관점에서의 시각도 익숙하게 지각해낸다. 사람과 기계는 이러한 공진화의 과정 속에서 변해간다.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기계와 인간은 복합체로 생각해야 되고, 그게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도구를 들고 사냥을 할 때부터 인간은 사이보그였다. 사이보그가 별건가? 안경을 끼는 것도 사이보그다. 그런 관점에서 기계와 인간이 결합되면서 인간의 어려움을 해결해 왔다.
: 일상에서 이러한 기술을 활용하는 데 필요한 지혜라고 한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게 될 것인지 구체적으로 따져 보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지혜란 1차적으로 아는 것이라 생각한다. 가령 불교에서 위빠사나를 이야기하며 가르치는 것도 그런 게 아닌가. 외부의 것들로 향하던 마음을 자기 안으로 향해 자신의 마음 상태나 몸의 감각, 현상들을 알아차리는 것.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그 현상들에 대해서 어떤 종류의 분별이나 그러한 인식을 덧붙이지 않는 것. 그것이 아마 지혜의 출발점인 것 같다. 알아차리는 것 위에서 기계와 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고 인간은 기계와 어떻게 연결자로 자리를 잡아가야 할지, 혹은 인간이 기계로 인해 신체와 마음이 어떻게 변형될지가 결정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기계를 부리면서 살아야지, 부림당하면 안 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기계 파괴 운동을 다시 하자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을 다시 받을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은 인간 삶에 도움이 안 되는 생각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