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因地而倒者 因地而起)’ 당연한 말이고 쉬운 뜻으로 보인다. 그런데 ‘술 마시면 취한다’거나 ‘겨울이 오면 춥다’거나 하는 유의 하나 마나 한 말 같지는 않고, 뭔가 깊은 뜻을 품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얼른 잡히지 않는다. 불교의 말이 대개 그렇듯이, 어려운가 하면 쉽고, 쉬운가 하면 어렵다. 화두처럼, 지눌 스님(知訥, 1158~1210)의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첫 문장이 그렇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는 이 말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속담처럼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것이니, 무슨 문제가 있거든 그 속에서 답을 찾아라, 일차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말하자면 술을 많이 마셔 알코올중독이 되었거든, 다른 탓하지 말고 얼른 술을 끊어라, 그 말이다.
그런데 지눌 스님이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는 그게 아니라, 땅을 짚고 일어날 때 부처님이 일으켜주지 않는다는 사실, 즉 “혼자서 일어나라.”는 것이다. 이 말 역시 쉬운 말 같이 들려도 사실은 세상을 뒤집는 말이다. ‘이곳의 더러운 세계와 저곳의 깨끗한 세계가 따로 있느니, 부처가 있는 세계니 부처가 없는 세계니, 상법이니 말법이니, 그런 것은 모두 헛소리(不了義經)다. 부처는 출현하심도 없고 감춰짐도 없다.’ 얼마나 명쾌한가.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란 마음이다, 마음은 사람 몸속에 있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춥고 덥다고 느끼는 것, 성내고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불성이다, 이제껏 네가 믿고 의지했던 것들은 다 허상이니 마음 밖에서 찾지 마라, 너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너 자신뿐, 너를 믿고 네가 너의 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라. 이런 내용의 정혜결사문은 서방의 니체가 ‘신의 죽음’을 말하기 700여 년 전인 1190년, 그의 나이 33세 때 쓴 것이다. 지금이야 ‘이 땅이 정토’이고 ‘내가 부처(卽心卽佛)’라는 말이 출근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되었지만, 지눌 당대에는 기득권적 기복 신앙을 정면 타격하는 폭탄선언이자 혁명의 언어였다. 때는 바야흐로 고려 무신정권기, 권력과 결탁한 불교의 타락은 극에 달했다. 사찰 소유의 땅은 어마어마하여 소작을 치는 지주 노릇을 했고, 고리대금업과 숙박업을 하고, 심지어 양조장을 만들어 술까지 팔았다. 불교의 정신은 위태롭고, 진리의 등불은 꺼져가던 시대, 지눌은 새벽별처럼 등장하여 우리 불교사에 가장 빛나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썼으니, 바로 정혜결사(定慧結社)다.
함양군 마천면 영원사에 차를 대고 ‘상무주암(上無住庵)’에 오른다. 1.8km, 1시간 반 거리다. 빗기재까지 30여 분 오르는 길이 급하고 힘들다. 지리산의 북사면(北斜面), 그러니까 주능선을 타고 올 때는 토끼봉, 명선봉, 연하천 지나고 형제봉 못 가 삼각봉 삼거리에서 좌측 별바위등 쪽으로 삼정능선을 타고 내려가는 길이다. 그 길이 영원사에서 올라오는 길 하고 빗기재에서 만난다. 지리산 전체를, 동두서미(東頭西尾)하고 앉은 한 마리 거대한 푸른 소(牛)라고 할 경우에 소의 등뼈가 종주 다니는 주능선이다. 하동 산청의 북사면 갈래가 소의 좌측 갈비뼈이고, 구례 하동의 남사면 갈래가 우측 갈비뼈인 셈이다. 북사면 어느 정점에서 보면 굽이굽이 장강처럼 흐르는 100리길 지리산의 주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져 한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 조망이 장관 중의 장관인데, 뷰 포인트가 3곳 있다. 셋째가 지리산 제1관문이라고 하는 ‘오도재(悟道峙)’로 제일 멀리서 보는 풍경이다. 능선의 곡선들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둘째가 조금 더 안으로 들어와 조망하는 ‘금대암(金臺庵)’ 자리다. 금대는 부처님 앉는 자리라는 뜻이니, 금대에서 바라보는 주능선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첫째가 상무주암 자리다. 금대는 임천(林川)의 물줄기가 산자락을 끊은 뒷산에 자리한 것이고, 상무주는 지리산 본산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상무주암이 지리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제일 가까운 점이다. 공연 좌석으로 치면 R석이고, 금대가 S석, 오도재가 A석쯤 되는 것이다.
비탈을 차고 올라선 빗기재부터 상무주암까지 가는 길이 좋다. 낙엽은 레드카펫보다 더 푹신하고, 길은 뒷짐 지고 느릿느릿 걸어도 좋을 오솔길이다. 봄 숲을 걸을 때는 조심조심해야 한다더니, 발 디딜 곳에 새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젖은 흙 사이로 돋아난 그 새 생명을 그냥 뭉개버릴 수 없다. 그것을 밟지 않으려고 걸음을 좀 띄엄띄엄 디디면서 몸을 기우뚱기우뚱하고, 그렇게 걷는 품이 뒤에서 보면 춤을 추는 듯, 술에 취한 듯, 봄 길에는 그런 즐거움이 있다. 능선의 아름다운 곡선들이 나무들 사이로 나왔다 사라졌다 한다. 응달엔 아직도 잔설(殘雪)이 남아 길이 미끄러운 곳도 있다. 저런 것을 보면 우리가 뭔가를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가, 선악이 그렇고, 분별이 그렇고, 겨울과 봄도 무 자르듯이 가를 수 없다.
땀 흘리고 걸어서 찾아가는 암자는 쓰개치마를 둘러쓴 조선의 여인처럼 쉽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골을 건너고 모퉁이를 돌고, 모퉁이를 한 번 더 돌아야 처마가 드러나는 법. 드디어 상무주암 마당에 들어섰다. 마당 가운데 정방형의 돌이 놓여있다. 천연석은 아니고, 아득한 옛날 삼층석탑의 기단석으로 쓰였을 법한 큼직한 돌덩이, 무슨 돌일까 하면서 법당에 삼배하고 암주 현기 스님께 인사했다.
1198년 봄, 지눌은 몇몇 동지들과 함께 가사 한 벌, 바리때 하나 들고 상무주암에 들어온다. 이곳이 결사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한 곳이다. 정혜쌍수(定慧雙修), 정은 선정의 선(禪)이고, 혜는 지혜의 교(敎)다.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이니, 참선만을 고집하는 어리석은 선객(痴禪)이 되겠는가, 글만 찾아 헤매는 미친 혜자(狂慧)가 되겠는가?” 이렇게 준엄하게 꾸짖고는 ‘정혜쌍수’를 가르친다. 지눌은 상무주암에 3년 동안 머물면서 정혜쌍수와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두 자루의 심검(心劍)을 완성한다. 그것이 훗날 고려불교를 나락에서 구한 수선사(지금의 松廣寺) 결사의 뼈대가 된다.
“스님, 저 돌이 지눌 스님 때부터 있던 것인가요?”
“그것이 궁금한가? 상무주암은 천년고찰인데, 이승만이가 빨갱이 잡는다고 다 태워 먹었어. 나쁜 놈이지, 지 권력 지키려고 젊은 애들 총살시키고. 절은 불타도 돌은 남는 법이라, 저것이 무슨 돌일까? 내가 여기 온 기념으로 그것을 공안(公案)으로 줄 테니까 갈 때 가지고 가시게나.”
윽, 말문이 막힌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그 공안도 아직 못 풀고 있는데, 돌보다 더 무거운 공안이라니…. “지눌 스님이 상무주암을 ‘천하의 으뜸’이라고 했다더니 과연 그러네요.” 하고 말머리를 돌리는데, “처사는 그런 허망한 말을 쫓아다니나.” 한다. 말문이 한 번 더 막힌다. 내친김에 “스님, 여기서 혼자 30여 년 사셨다는데 안 외로우시든가요?” 하고는 나도 한 자락 깔 것 없이 물었다. “외롭지.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거라.” 수좌스님들이 초면은 까칠해도 질문이 세 개쯤 들어가면 서서히 말문을 여는데, 그럴 때는 외로움에 관한 질문이 좋다.
“사람들이 다 더 배우고, 더 벌고, 더 예뻐지려고 하고, 더 높은 자리 올라가려고 기를 쓰지? 왜 그런지 알아? 외롭게 될까 봐 두려워서 그런 거야.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리가 있는 거거든. 금수저 물고 나온 사람, 흙수저 물고 나온 사람, 부모도 없는 사람, 다 다르잖아? 그런데 자기가 앉은 자리에서 만족을 못 해. 쌀 천 석이 있어도 만석을 갖고 싶거든. 그러니까 쫓아가지. 내 자리는 여기가 아니고 더 높은 곳에 있어야 돼, 그러면서 보이는 것, 들리는 것, 허망한 것들을 쫓아가요. 창고에 쌀이 가득 찼어도 창고를 하나 더 짓는 게 사람이야. 많으면 뭐하나, 하루에 몇 끼를 먹을 거야?”
“스님은 하루 몇 끼 드세요?” 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창공이 저 아래 있고, 까마귀가 발밑으로 날아가는 것이 신기하다. “세끼 먹지. 나는 하루 세끼 먹고 만족하니까 여기 사는 거야. 서울 강남 살면 안 외롭고, 강북 살면 외로운가? 그럼 산중에 살면 외로워서 죽었겠네. 앉은 자리에서 부족함을 느끼는 게 외로움이라. 소욕지족이라 하잖아? 여기가 내 자리구나 하고 만족을 하면 외로움이 사라지는 거라.”
스님은 그러더니 이낙연 총리 얘기를 꺼냈다.
“내가 보니까 소욕지족으로 좀 안 흔들리는 사람이 총리야. 국회에서 답변하는 거 봐 이치에 맞는 말을 하니까 사이다 총리라고 하지. 누가 그만두라는 사람이 없잖아. 소욕이 되는 사람이 큰일을 해야 되는 거야.”
“스님, 여기 지리산 첩첩산중에서 차기 대통령 점지하시는 건가요?”
“하, 그것이 그렇게 되나?”
“저기 기단도 없는 3층 석탑을 여기 마당 돌 위에 올려놓으면 완전한 3층 석탑이 되고 딱 좋겠는데요.”
“처사가 주지해라, 나는 곧 떠날 것이니. 이 상무주암 개혁도 좀 하고.”
“어떻게 여기서 혼자 30년을 사셨어요?”
“글쎄, 한 사흘 지난 거 같어….”
스님이 주신 모과차 한잔 다 마셨더니,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내려가라.”고 한다. 나는 스님한테 뜨거운 물 두 컵 얻어서 가져간 컵라면에 붓고는, 사진작가랑 둘이 양지바른 곳에 걸터앉아 지리산 주능선을 바라보면서 라면을 먹었다. 그러고는 땅을 짚고 일어나, 쉬엄쉬엄 산을 내려왔다.
이광이
60년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 따라 대흥사를 자주 다녔다. 서강대 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했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와 더욱 친해졌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을 하나 냈고, 도법 스님, 윤구병 선생과 ‘법성게’를 공부하면서 정리한 책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