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자의 꿈, 스승의 위로
부처님 일대기에 등장하는 왕들은 부처님에게 우호적이어서, 자신의 영토에 부처님 같은 귀한 분이 머무시도록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인 왕도 있습니다. 서인도에 자리한 아반티국의 악생왕(惡生王)입니다.
가전연 존자는 바로 이 나라의 수도 웃제니에서 태어났습니다. 존자의 아버지가 악생왕의 신하였다고 하지만 악생왕은 가전연 존자가 스님이 되어 나타나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괴롭힙니다. 삭발한 스님만 보면 기분이 나쁘다고 대놓고 말할 정도입니다.
가전연 존자의 제자인 사라나 스님은 이웃 나라인 우다나국의 왕자 출신으로서 가전연 존자를 스승으로 모시며 열심히 수행하였습니다. 아직은 깨달음의 가장 낮은 경지에도 이르지 못했지만 언제나 숲속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며 지내고 있었지요. 어느 날, 악생왕이 아름다운 여인들을 거느리고 그 숲으로 놀러 나왔습니다. 미녀들과 웃고 떠들고 즐기다 지친 왕은 잠이 들었고, 여인들은 자기들끼리 숲을 산책하기로 했지요.
그런데 숲속으로 조금 더 들어갔을 때 나무 아래에서 고요히 참선하고 있는 사라나 스님을 발견했습니다. 스님은 참선에서 깨어나 자신을 둘러싼 아름다운 여인들과 인사를 주고받은 뒤 부처님 가르침을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왕과 함께 쾌락의 시간을 보내던 여인들은 스님이 들려주는 맑고 청량한 법문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한편, 잠에서 깨어난 악생왕은 주변에 아무도 없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미녀들을 찾아 숲을 헤매던 왕은 나무 아래 젊은 스님이 미녀들에게 법문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왕의 심사가 뒤틀려져 버렸습니다. 어딘가 우아하고 귀족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젊은 비구 스님도 비위 상했고, 자신만을 우러르며 복종하던 미인들이 홀린 듯 그 스님 이야기에 빠져버린 모습은 더더욱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왕은 여인들을 제치고 스님 앞으로 나아가 물었습니다.
“너는 최고의 성자인 아라한인가?”
젊은 스님은 대답했습니다.
“아직 아라한의 경지에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보다 아래 단계인지를 물어봤고, 스님은 솔직하게 자신은 아직 그 어떤 성자의 단계에도 들지 못한 초보 수행자라고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왕은 다시 물었습니다.
“좋다. 성자의 단계에는 아직 발을 들이지 못했다면, 수행하는 자가 처음에 익혀야 할 부정관은 얻었는가?”
부정관이란 자신의 육체가 덧없고 허물어지는 것이라고 관찰하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집착을 하지 않는 힘을 기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라나 스님은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왕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왕은 소리쳤지요.
“결국 일개 범부에 지나지 않구나! 그런 주제에 어떻게 왕의 여인들과 한자리에 앉아 있었는가!”
왕이 화를 참지 못하고 스님을 때리기 시작하자 여인들이 울면서 말렸습니다.
“이 스님은 잘못이 없습니다.”
여인들까지 이 젊은 수행자 편을 들자 왕은 더더욱 화가 솟구쳤습니다. ‘이 까까머리 중이 뭐 대단하다고 울기까지 해?’ 왕의 폭행은 더욱 세졌습니다. 사라나 스님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참았습니다.
‘과거의 부처님들도 이런 모욕을 참으셨기 때문에 성불하셨다. 인욕선인께서는 자기 귀와 코, 손과 발이 끊기면서도 그 모욕과 폭행을 참아내셨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 지경까지는 아니지 않은가.’
결국 사라나 스님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 억울함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묵묵히 견디던 스님에게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한 나라의 왕자였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왕자의 자리를 떠나 홀로 숲속에서 수행을 하다 보니 이런 모욕을 받는구나.’
왕에게서 간신히 벗어난 사라나 스님은 스승인 가전연 존자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당한 일을 고하면서 환속하겠노라며 하직 인사를 드렸습니다. 가전연 존자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하직 인사를 올리는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그대는 너무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니 오늘 밤은 여기서 쉬거라. 몸이 좀 나아지거든 내일 떠나는 것이 어떻겠느냐?”
스승은 제자에게 자신의 방에서 마지막 밤을 묵고 가라고 권했습니다. 은근한 권유에 사라나 스님도 그리 하기로 했습니다. 제자는 출가자로서의 마지막 밤을 스승의 방에서 보내게 됐습니다. 금세 깊은 잠에 빠진 제자의 머리맡에서 스승 가전연 존자는 가만히 선정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잠든 제자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 꿈꾸게 했습니다. 꿈에서 사라나는 환속했습니다. 부왕은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왕위에 오른 사라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악생왕을 치러 군사들을 출동시켰습니다. ‘악생왕을 잡아서 가장 잔인하게 죽이고 말겠다.’
그런데 전황은 사라나의 마음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백병전을 벌이다 사라나 군대는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악생왕의 군대가 생각보다 훨씬 셌기 때문입니다. 군사들이 다 뿔뿔이 도망치자 사라나는 그만 산채로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악생왕은 적국의 왕 사라나의 목을 치라고 명했습니다. 목숨이 일각에 달린 사라나는 그제야 스승이신 가전연 존자가 생각났습니다. ‘아, 죽기 전에 스승님을 한 번 뵙고 죽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련만.’
그때 가전연 존자는 제자의 마음을 알고서 그 앞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아들아, 이기고 싶어서 싸움을 벌였지만 싸움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내 그토록 이르지 않았더냐.”
사라나는 간절하게 빌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스승님. 저를 살려만 주신다면 다시는 스승님 가르침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가전연 존자는 제자의 긴박하고 절박한 간청을 듣고서 악생왕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칼을 들고 있던 망나니는 그 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사라나의 목을 향해 칼을 내리쳤습니다.
아~~~~~악!
사라나는 비명을 질렀고,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가전연 존자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습니다.
“죽자 살자 벌이는 싸움에는 이기는 편이 없다. 싸움이란 대체로 남을 죽이는 것으로 제 승리를 삼는 잔인한 길이기 때문이지. 어리석은 사람은 현재 이겨서 속 시원할지 몰라도 다음 세상에는 삼악도에 떨어져 끝없는 괴로움을 겪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너를 못 견디게 괴롭힌 것이 악생왕뿐이더냐. 그때마다 원수를 갚겠다고 칼을 들고 나섰더냐. 그런데 지금 너는 어찌 악생왕의 원수만 갚으려 드느냐. 정말 원수를 없애버리려거든 먼저 번뇌부터 없애라. 번뇌라는 원수는 지금까지 너를 끝도 없이 해쳐왔기 때문이다. 이번 생의 악생왕이란 원수는 네 한 몸만을 해쳤을 뿐이지만, 번뇌라는 원수는 세세생생 너를 해친다. 악생왕이 네 몸을 해쳤느냐? 그건 덧없기 짝이 없는 몸만을 해쳤을 뿐이다. 그렇다면, 진짜 너의 원수는 번뇌일 것이다. 진짜 원수는 버려두고 어찌 악생왕만 치려 하느냐?”
스승 가전연은 꿈에서 깨어난 제자 사라나에게 간곡하게 말했습니다. 사라나는 스승의 말씀을 듣자 환속하려는 마음이 점차 약해져 갔습니다. 저 악생왕을 향해 불타오르던 적개심도 사그라져 갔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성자의 첫 번째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후 더욱 깊고 치밀하게 수행하여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출가 전 왕자였던 사라나를 성자로 인도한 가전연 존자는 ‘논의 제일’이라 칭송받은 분입니다. 부처님이 요점만 말씀하시면 그것을 쉽고 자세하게 풀어서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데에 누구보다 으뜸인 분이었지요. 하지만 『잡보장경』에 실린 이 일화를 보면,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도 으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의 꿈속에까지 들어가 그를 타이르고 일깨워 성자의 최고 자리인 아라한이 되게 인도를 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 사납고 잔인한 악생왕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가전연 존자의 가르침을 받고 불자가 됩니다. 천만다행입니다. 가전연 존자의 인욕과 감화력이 폭군을 성군으로 탈바꿈시켰으니 말입니다.
세상이 점점 더 어지러워지고 사나워져 갑니다. 지구가 병들어가는 이때 세상 사람들의 꿈속에라도 나타나서 이토록 간절하게 선업을 짓고 바른 길을 가도록 일깨워줄 가전연 존자 같은 스승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이미령
불교강사이며, 불교칼럼리스트, 그리고 경전이야기꾼이다. 동국역경위원을 지냈고, 현재 BBS불교방송 ‘멋진 오후 이미령입니다’를 진행하고 있고, 불교책읽기 모임인 ‘붓다와 떠나는 책여행’을 이끌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붓다 한 말씀』,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간경수행입문』, 『이미령의 명작산책』, 『타인의 슬픔을 들여다볼 때 내 슬픔도 끝난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