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암자의 스님들] 원통암 진현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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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암자의 스님들] 원통암 진현 스님
  • 이광이
  • 승인 2019.03.2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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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세숫물에 비친 나를 보니, 어느덧 진짜 노옹(老翁)이 되었구나.”

은근히 올라간다. 산이야 오르는 맛이지만, 비탈이 급해지면서 숨이 턱 차온다. 화개 의신 마을 입구에서 우측으로 꺾어 오르는 길, 원통암 가는 길. 마을 끝 집 지나자 더 이상 찻길은 없다. 느릿느릿 걸어 오르는데 갈수록 경사가 만만치 않다. 그 급경사에 축대가 쌓아져 있다. 축대는 사면(斜面)을 평면(平面)으로 바꾼다. 평면은 논이었다. 다랑논, 아파트 거실보다 작은 논. 다시 오르면 축대, 축대 위에 다랑논, 논 지나면 축대, 축대 너머에 다랑논. 그런 배열이 끝없이 이어진다. 헤아리며 가는 길에 10층이 넘는다. 화전민이었거나 빨치산이었거나 혹은 은자이었거나,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누군가의 생명이었을 저 논들. 하지만 지금은 응달, 하늘로 뻗은 나뭇가지들이 논 볕을 가로채, 논이 아닌 그 위에 벼 아닌 것들이 자란다. 오래도록 변하지 않은 것은 없으니, 축대는 귀부터 허물어지고, 사람들 떠난 땅은 논에서 산으로, 다시 비탈로 되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사진: 최배문

원통암은 칠불사 선원장 스님이 혼자 산다. 여름 겨울 안거는 칠불사에서 정좌하시고, 해제되는 봄가을에 암자로 돌아온다. 법명은 진현, 그런데 법호가 노옹(老翁)이다. 노옹은 할아비보다 높은 어르신쯤 된다. 법호를 언제부터 쓰셨냐고 물었더니, “마흔셋”이라며 웃는다. 
“보라, 산과 물의 경계가 없었던 성철 퇴옹(退翁), 물을 보면 물이 되고 꽃을 보면 꽃이 되었던 백양사 서옹(西翁), 이른 봄볕에 벙그는 꽃 한 송이 보고 깨달았던 칠불사 지옹(智翁),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했던 왕사 나옹(懶翁), 그리고 여기 서산대사가 출가했던 자리에 원통 노옹(老翁). 하하하! 수덕사 안거 들어가는데, ‘노옹’이면 조계종 제일 어른스님이라고 이름 바꾸기 전에는 못 들어간다는 거라, 사실은 ‘옹(翁)’자가 훨훨 날아간다는 뜻도 있어요, 내가 젊었을 때 몸이 별로 안 좋아서 일부러 그렇게 지은 거요. 지금은 아침에 세수하면서 물에 비친 나를 보고 그러지, 어느덧 진짜 노옹이 되었구나 하고.”

지리산 덕평봉 남쪽 산자락이 지금의 의신 마을이다. 나말여초 이곳에 ‘의신사’라는 큰 가람이 있었고, 원통암은 그 산내 암자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리산 일대에 선풍이 휘날린 것은 조선 중종 때다. 벽송조사가 마천골에 초막을 지어 정진하니,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 대선림(大禪林)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초막이 지금의 벽송사다. 원통암도 벽송, 부용, 경성, 숭인, 추월 스님 등 당시 고승들의 수행처로 이름이 높았다. “그래서 한 마리 학이 구름을 타고 날아들지요. 운학(雲鶴, 서산대사 아명)이라, 15세에 지리산 유람을 나섰다가 원통암에 들러 숭인 스님의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출가한 거요.” 운학은 휴정(休靜) 스님이 되어 6년 뒤인 1540년 벗을 찾아 남원 나들이 가는 길에 한낮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명문 오도송 한 대목. ‘홀연히 본성 자리 깨닫고 보니 / 온갖 것이 다 이러하구나 / 팔만팔천 금쪽같은 대장경도 / 본시 하나의 빈 종잇조각이었으니’      

사진: 최배문
사진: 최배문

  

원통암은 천년을 내려오다 구한말에 불타 사라졌다. 그 뒤 100여 년 방치되었던 것을 1997년 동림 스님이 인법당(人法堂) 하나, 산신각 하나를 세우고 ‘원통암(圓通庵)’ 현판을 달아 터는 다시 집이 되었다. 동림 스님은 노옹 스님의 사형이다. 

“사형이 청주시청인가 농협인가를 다녔는데, 등산을 워낙 좋아해서 지리산에 온 길에 칠불에 들른 거요. 거기서 내 은사인 통광 스님에게 하루만 재워 달라고 했나 봐. 이튿날 하루만 더 자게 해달라고, 그러다 닷새가 되고, 한 달 되고, 그 길로 눌러앉은 거요. 사표도 못 쓰고 머리를 깎은 거지. 그런 거 보면 서산대사하고 비슷하지 않으우? 공부를 참 잘했어요. 그런데 공부가 어느 정도 되면 여유가 생기고, 그러면 세속의 ‘업(業)’이 나오는 거요. 본시 알피니스트라, 워낙 산을 좋아해서 산으로 산으로 떠돌았지. 2006년 겨울에 저 남미 안데스의 최고봉 아콩카과(6,960m)에 갔다가 이듬해 정상 정복하고 하산하던 길에 탈진해가지고 입적했어. 1월 23일이 기일이라, 내가 저기에 동림 스님 부도 세워줬어요.”

사형 떠나고 노옹 스님이 맏시봉이 되어 원통암으로 들어왔다. 스님은 서산대사에 매달렸다. 원통암이 서산대사의 수도처라는 기록은 있다. 하지만 구전되어 올 뿐, 출가처의 기록은 없었다. 그때부터 서산대사 관련 모든 어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방대한 기록의 <한글대장경>, 14책에 이르는 <한국불교전서>를 낱낱이 읽던 2년여 어느 날 드디어 한 문장을 찾아낸다. <한국불교전서> 8권 조선시대 제월당대사집 상권 p120 ‘청허대사행적’에 실린 ‘의숭인장로낙발우원통암(依崇印長老落髮于圓通庵)’, ‘숭인장로에 의하여 원통암에서 삭발했다’는 기록이다. 제월당 경헌(1544~1633)은 서산의 제자이고, 숭인장로는 서산의 은사이다. 다행스럽게도 제자가 스승의 행적을 듣고 적어 놓은 기록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환희용락(歡喜踊樂)이라, 내가 그 문구를 처음 확인했을 때의 감회란 것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너무나 희유한 공덕을 성취했던 수보리의 환희용락, 기뻐 춤출 듯 뛰어오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했지요.” 스님은 그 증빙을 들고 그 길로 하동군수를 찾아갔다. “근자, 스토리텔링이다 뭐다 하여 없는 이야기도 만들어내는 판에, 조선불교의 중흥조 서산대사가 이곳 하동 땅 천년고찰 원통암에 초발심 출가했다는 고증이 이리도 명백한데, 소중한 국보급 문화유산을 한낱 토굴로 방치하고 말 것이냐.” 하고 사자후를 토한 뒤, 담판을 지었다. 그 뒤 얼마 안 가 남쪽에서 헬기가 빈번하게 왕래하더니 인법당 옆에 ‘ㄱ자’ 형태로 서산대사 영정을 모실 맞배지붕의 ‘청허당’이 반듯하게 들어선 것이었다. 양철지붕 뒷간도 하나 마련했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축대를 손질하여 마당을 정비하고는 아담하게 일주문까지 세웠으니, 이제 제법 ‘가람’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사진: 최배문
사진: 최배문

그 일주문 현판에 쓰기를 ‘서산선림(西山禪林)’. 토굴, 암자도 아니고, 선방, 선원도 아니고, 선림은 여러 선객들의 수행 모습을 울창한 숲에 비유한 것으로 총림(叢林)이라는 뜻이니, 노옹 스님 배포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방에 앉아 창문을 열면 멀리 색이 옅어지며 겹겹이 늘어선 산들이 한 폭의 수묵화다. “도량이 작아도 말쑥해. 정면에 백운산 세 봉우리가 안산으로 솟아있고, 청학이 날갯짓하며 비상하는 형국이라, 천혜의 명당이요. 서산대사가 출가하고 5백 년이 흘러 내가 완성한 도량이라, 여기는 본사 급 암자요.” 하고는 스님 웃는다.

나는 원통암의 ‘원통’에 대해 물었다. “원효 ‘화쟁사상’의 핵심 원융회통(圓融會通),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둥글게 녹아들어 하나로 통한다는 뜻 아닙니까? 원통(圓通), 화쟁(和諍), 불이(不二), 일심(一心), 다 같은 말이요. 대립하는 둘이 좀 위에서 보면 원래 하나였다는 거지. 정반합(正反合)은 정과 반이 각각 존재하면서 둘이 타협해 합을 이룬 상태인 반면에, 원통은 정과 반의 근원을 꿰뚫어 보면 사실은 하나이고, 정반은 그 하나의 양면이라는 거지. 있고 없음(空有), 흐리고 맑음(染淨), 원인과 결과(因果)가 다 한 뿌리 아닌가. 원효의 화쟁은 한국불교의 꽃이라. 원효는 지눌로 이어져 정혜쌍수, 선종과 교종이 다르지 않다는 것 아니에요, 그리고 다시 휴정 서산대사로 넘어와 대통합이 시작되는 거지. 불교 안으로는 선과 교와 염불, 밖으로는 유불선 3교 회통으로 나아가는 거라.”고 설명했다. 원통암은 그 이름과 자취로서 원효와 휴정을 잇는 어마어마한 본사 급 암자라는 사실을 누차 강조했다.

스님이 하동군수를 만나 담판 지을 때, 원통암까지 찻길 얘기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끝 길에서 그리 먼 거리는 아니라, 1차선 정도 콘크리트 찻길을 내자면 꼭 못 낼 일도 아니었다. 혼자 섭생도 힘들고, 노옹에게 산길도 날로 힘들어, 찻길 생각을 좀 해보다가 그만뒀다고 한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편리함은 좋지만 번잡함은 더 참을 수 없는 것. 그러고는 백운산을 바라보며 서산대사가 원통암에서 지었다는 시 한 수를 들려준다.

“‘소쩍새 우는 소리 들려와 내다보니 봄빛에 물든 산들 모두 고향이구나, 물 길어오다 문득 돌아보니, 푸른 산 흰 구름에 걸려 있구나.’ 초봄 지금 이때, 이 자리에 서서 지은 것 같지요? 수행자를 걸사(乞士)라 하잖아요? 물욕을 떠나 사는 사람이라, 차가 들어가면 더 이상 수행처가 아니지. 물 길어오다가 쉬는 참에 청산을 바라볼 수 있어야 수행처지. 그리고 서산대사가  여기 찻길이 뚫리는 것을 가만뒀겠나 싶기도 하고.”                                  
           

이광이
60년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 따라 대흥사를 자주 다녔다. 서강대 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했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와 더욱 친해졌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을 하나 냈고, 도법 스님, 윤구병 선생과 ‘법성게’를 공부하면서 정리한 책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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