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에서 아침공양 마치고 나오는데 비가 든다. 비는 운무를 동반하여 보광전의 지붕을 덮고, 바리때를 엎어놓은 탑의 복발(覆鉢)까지 내려왔다. 날은 흐려도, 겨울 산사는 맑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이내 눈으로 바뀌어 싸락싸락 내린다.
“여기가 이 정도면 지리산 못 넘어 갈 건데 통 제할 거야”
스님의 걱정을 뒤로하고, 우리는 차를 몰아 성삼재로 향했다. 지리산을 북에서 남으로 넘는 길, 싸리 눈은 함박눈이 되어 펑펑 퍼붓는다. 달궁, 정령치 지나 비탈이 급한 곳에서 차는 더 오르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헛바퀴 돈다. 저 앞에 관광버스도, 용용한 SUV도 꿈틀꿈틀 헤매고 있다. 우리는 후퇴했다. 달궁에 숙소를 정하고 집주인께 통사정하여 스노우 체인을 단 트럭을 얻어 타고 올 라갔다. 오도 가도 못한 차량들을 스치면서 올라 가는 기분, 대리운전 불러 가는데 음주단속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 것을 고소해 하는 나의 고약한 심보를 지리산은 고쳐주겠지. 성삼재에서 노고단을 향해 걷는다. 무넹기에서 화엄사쪽 하산 길로 들어섰다.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한 20여 분 내려갔을까, 거기서 등산객 둘을 만났다. 그런데 우번대가 이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길을 잘못 들었다. 다시 올라가야 한다. 등에 진땀을 흘리며 원래 자리로 돌 아왔다. 그들이 가르쳐준 대로 드디어 우번대 찾아가는 길, 푸른 산죽 위에 눈이 쌓인 오솔길을 따 라간다. 우리는 타인들로부터 두 번의 도움을 얻어 제 길에 들어선 것이다. 눈길에 막혀 하루를 허송하고 보냈거나, 저 화엄사로 끝없이 내려가고 말았을 것을, 어떤 인연의 한 자락이 보살펴 주셨으리라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눈길에 어찌 오셨소?” 스님이 눈이 동그래져 묻는다. 산에 들어 거의 두 시간을 헤맨 끝에, 돌담에 초록색 양철 ‘맞배 지붕’을 보았을 때, 아 여기로구나, 여기가 진짜 토굴이구나, 하고 마당을 돌아 나왔을 때, 스님이 어인 일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우번암(牛飜庵)’이 라고 작은 널빤지에 흘려 쓴 편액 하나 처마에 걸려 있다. 작고 좁고 낮은 법당, 연등이 걸린 법당이 냉방이다. 문수보살 전에 시주하고 삼배했다. 토굴 갈 때는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여 말린 소채라도 좀 사가려고 다짐하였건만, 눈길에 서둘다 잊어버렸다. 스님이 오미자차 두 잔 내어준다.
“여수 신도들이 김장했다고 오늘 온다 했는데, 눈이 하도 내려 천은사에서 차 돌려 내려갔어. 김치는 구례 떡집에다 맡겨놓고 간다고 전화 왔었는데, 이 눈길을 헤치고 용케도 찾아왔네?” 그래서 두 번의 도움을 얻어 온 사연을 얘기했더니, “연이 닿은 거지. 보살을 만난 거라”한다.
법종스님, 70년대 백운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화엄사, 범어사에 살다가 여기 우번암에 들어온 지 40년이다. 세납이 곧 여든이니, 반생을 지리산에서 살았다. 성삼재 찻길이 올림픽 앞두고 1985년에 개설되었으니까, 산에 길이 없던 때부터 산 셈 이다. 스님 젊을 때는 산을 날아다녔다고 한다. 천은사는 마실 다녀오는 정도이고, 화엄사도 1시간 이면 내려가고, 반야봉 묘향대까지 그야말로 ‘축지법’을 쓰면서 지리산을 주름잡던 시절이 있었다. 해발 1200m의 고도에서 세상을 굽어보며, 여기가 극락이던가 하고 도취하던 시간은 그러나 길 수 없다. 사람이 몇 날 며칠을 구름을 품고 이슬만 먹고는 살 수 없는 일이다. 또 천하명당 기도처라는 곳이 보통사람은 기운에 눌려 버텨내기 어렵다고 하니. 법종스님 이전에 살던 스님들이 한 철을 넘기지 못하고 떠난 것이 다 그런 이유일 것이다.
“매일 밤 꿈에 삼신 할매가 나타나는 거야, 노고단 할매 유명하잖아. 우리 민족의 창세기에도 나오는 데 마고, 궁희, 소희 삼신 중에 노고단은 마고 할매가 지키고 있는 거라. 내가 신라 때부터 여기서 살았는데 어디서 굴러온 중놈이냐 이거지. 쫓아내려고 계속 따라다니는 거라. 자다가 새벽에 깨고 엄청 시달렸어요. 얼른 이해가 안 되겠지만, 여기는 뭐가 좀 이상한 일들이 있어. 벌써 30년도 넘은 얘기인데, 하루는 중년 남자 둘이 찾아왔더라고. 커피를 한 잔 건네줘서 마셨지. 그길로 혼절한 거라. 간신히 눈을 떠보니 법당에 혼자 쓰러져 있더라 고. 엄동에 불 안 때면 얼어 죽겠다 싶어 겨우 몸을 일으켜 아궁이에 불 넣고 다시 쓰러져 자고, 그렇게 사경을 헤매기를 한 이레쯤 지났을까, 그날 누군가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란 찻잔을 건네주는 거야, 그것을 받아 마셨지. 그리고 쳐다봤더니, 문수보살이라. 10대 약사여래불 중에 내가 모시는 바로 그 문수보살이라. 잠에서 깼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깨끗이 나았어. 머리도 맑고, 몸도 좋고. 노란 찻잔에 든 것이 약이었구나, 다 때가 있구나, 나쁜 일도 지나고 나면 약이 되는구나하고 깨달았지.”
곡식은 별 걱정이 없다. 깊은 산중이어도 신도와 등산객들이 꼭 쌀 한 봉지는 불전에 놓고 간다. 문제는 찬(饌)이다. 스님은 텃밭에 무 배추를 가꿔 혼자 김장을 한다. 찹쌀로 죽 쓴 것에 청각 생강 무청 들깻가루 고춧가루로 속을 만들어 비빈다. 그 김치가 그렇게 맛있어서 신도들이 김치 좀 싸가고 싶어 한다. 찬거리는 보름에 한 번 구례에 나가 장 을 봐온다. 미역 파래 시금치 오이 가지 버섯 같은 해조류 소채류들, 그리고 양배추를 제일 많이 산다. 스님은 양배추를 왜 그렇게 좋아하시냐고 하는데, 그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빨리 안 시들어 두고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게 힘들지. 봉암사 한철 살던 시절이 제일 그리워. 해주는 밥 먹으며 공부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입재하고 선 방에 앉았는데 두어 시간 지나니 하나 둘 일어나고, 서암 노장님하고 둘 남은 거라, 결국 노장님 일어나시고 나 혼자 남았지. 큰스님이 내가 근기가 좋다고 못 떠나게 했는데... 지금도 봉암사 송이버섯 메밀국수 생각이 나”
우번대는 ‘지리 10대’중 하나로 꼽힌다. 신라때 우번 선사가 토굴을 짓고 살았고, 근래에는 경허의 삼월 중 하나인 수월스님이 머물다 가기도 했다. 스님을 따라 남쪽 봉우리 진 곳에 올라서니, 과연 이곳이 전설의 ‘아랸야’로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눈 내린 산맥 위에 바람이 불고, 그 바람결에 운무가 모였다 흩어지는 변화무쌍한 풍경들. 천상의 바다 같고, 저 겹겹이 굽이치는 산봉우리들은 밀려오는 파도의 포말같다. 구름 틈으로 신비로운 빛이 쏟아져 내린다. 멀리 붉게 물든 산봉우리, 광주 무등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비경이다.
“정말 극락 같지?”
꼭 한번은 호텔에서 자보고 싶어서 도반 스님께 부탁하여 대전 유성 최고급 호텔에 들었는데, 별 것도 없더라, 냉장고에 든 것은 비싸기만 하고, 마음은 불편하고. 그날 밤에 방을 나와 버스 타고 지리산으로 돌아와 버렸다고 한다.
그런 날들이 모여 40년이다. 어찌 하루하루가 금욕과 수행으로만 저물 것인가? 외롭고 춥고 쓸쓸하고 아프고 귀찮고 권태로웠을 시간들, 어디론가 훅 떠나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왜 없었을까? 어느 날, 기도했다. “부처님이 진짜 계시면 내 눈 앞에 좀 나타나 보여 달라고. 그리고 목탁을 들었는데 갑자기 새가 한 마리 들어와 천장을 두 바퀴 돌 더니 불상 옆에 떡 앉는 거요. 20여 분 기도 올리는 내내 앉아 있다가 목탁을 내려놓으니까 다시 천장 을 두 바퀴 돌더니 밖으로 나가 사라지는 거라. 그 뒤로 모든 의심 덩어리가 다 사라지더라고”
스님은 새벽 3시에 일어나 도량석하고 혼자 예불을 올린다. 그리고 아침 공양하고, 11시에 사시 예불 올리고 점심공양하고, 오후 5시에 저녁예불 올리고, 저녁 공양한다. “나보고 하루하루를 심심해서 어떻게 사느냐고 하는데 하루가 바빠. 토굴 살면서 삼시 예불만 올려도 잘 사는 거라고 하잖아? 나 여기서 공밥 먹는거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노스님 얼굴이 무구(無垢)하다.
“스님 노고단 할매는 어찌 됐나요?”
“지금도 가끔 꿈에 나오는데 인제는 나한테 꼼짝도 못해.벌벌 기어.내가 그 할매보다 더 늙어 버렸잖아”
“회향은 안하십니까?
“회향이 따로 있나? 매일 매일이 입재고 매일 매일이 회향이지”
눈이 내렸다 그쳤다 한다. 산죽 위에 쌓인 흰 눈이 저무는 겨울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인다. 늘 건강하시라고 합장 하고 떠나오는 길,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말이 생각난다. “인생은 낯선 여인 숙에서의 하룻밤”이라던. 인생이 그러하니, 저 기 나긴 우번대에서의 40년도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 그런 것이 아닐까?
글. 이광이 / 사진. 최배문
이광이
60년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 따라 대흥사를 자주 다녔다. 서강대 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했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와 더욱 친해졌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을 하나 냈고, 도법 스님, 윤구병 선생과 ‘법성게’를 공부하면서 정리한 책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