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부・상좌부・유부・정량부라는 인도의 유력한] 네 부파에서 대승과 소승의 구분은 정해져 있지 않다. … 보살을 예배하고 대승경을 읽으면 대승으로 불리고,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소승으로 불릴 뿐이다.” (『남해기귀내법전』-7세기 후반 인도에 유학한 중국 구법승 의정義淨의 인도불교 견문기)
| 인도불교 시대사 구분의 난점과 ‘초기불교’라는 용어의 애매함
인도불교의 역사를 시대적으로 구분할 때, 보통 ‘초기불교’ 다음에 ‘부파불교(=소승불교)’가 전개되고 그 뒤를 ‘대승불교’가 잇는다고 설명한다. 이 도식적 설명은 오해를 불러오기도 한다. 마치 통일신라 시대가 끝나고 난 뒤, 고려가 시작되고, 고려의 멸망과 함께 새로이 조선 시대가 개시되는 것처럼, 초기 → 부파→ 대승으로 전개되어 갔다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초기 → 부파→ 대승’이라는 인도불교 시대사 구분은 왕조의 교체에서처럼 그 당시 사람들이 스스로 정한 시대 구분이 아니다. 근대의 학자들이 사상의 흐름과 교단에 일어난 큰 변화를 중심으로 편의적으로 나눈 구분일 뿐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시대 구분을 하기도 한다. 중국과 우리나라 등 동아시아의 불교 전통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소승과 대승으로만 구분했을 뿐이다.
이처럼 인도불교 역사에 대한 이해와 시대 구분이 어려운 것은 자료의 부족 때문이다. 고대 인도에서는 역사적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겨우 개별 부파가 전하는 불교 역사서나 스리랑카의 고대 역사서 등에 근거하여 그 역사를 규명해 왔지만 최근에는 이들 자료의 객관적 신빙성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지금은 인도불교 역사의 진실을 찾기 위해 다방면에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비문과 같은 고고학적 자료, 율장과 부파의 논서, 경전 등에 나오는 관련 부분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서로 연결 짓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언제 획기적인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지 모르며, 그때는 인도불교의 역사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술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일반적으로 승인된 바에 따르면, 불멸 후 100년 정도 지났을 때 계율 등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불교교단에 분열이 일어나 부파들이 생겨났다. 이 최초의 분열을 근본분열이라 부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분열은 심화되어 20개에 이르는 부파들로 분열된다. 이러한 부파들에 의해 지속된 불교를 부파불교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기원 전후의 시기에 이르러 기존 부파들의 사상과는 다른 새로운 불교가 일어났으니 그것이 대승불교다.
그런데 ‘부파불교 시대’라고 하면 대승불교가 흥기하기 전까지만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하여, 대승불교 시대에는 부파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대승불교 흥기 이후에도 부파불교와 대승불교는 오랜 세월 동안 병존해 왔다. 따라서 ‘부파불교 시대’는 ‘대승불교 시대’ 이후부터는 대승과 서로 겹치는 시기를 갖는다. 한편 ‘초기불교 시대’는 석가모니 생존 시기부터 부파 분열이 일어나기 전까지를 말한다.
서구에서 잉태된 근대 불교학이 동아시아의 전통에서는 없었던 ‘초기불교(Early Buddhism)’라는 구간을 새로이 만든 이유는 변형을 겪지 않은 순수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지속되어 온 시기를 상정하여 그것을 찾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영향 때문인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초기불교 시대’라고 하면,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아무런 변용 없이 그대로 지속된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아함과 니까야가 바로 ‘변용 없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으로서의 초기경전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작년 11월호에서 밝혔듯이, 지금의 아함과 니까야는 개개의 부파들이 독립적으로 전승해 온 것이며, 그 전승 과정에서 내용상으로 많은 변용을 겪은 것이다. 이 사실은 이미 학계의 정설이 되어 있다. 이러한 아함과 니까야에서 순수 석가모니의 가르침만을 추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연구를 통해 ‘상대적으로’ 조금 더 오래되었다고 추정되는 가르침을 가려낼 수는 있으나, 그것이 석가모니 가르침 그대로라고는 결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 현 단계 초기불교 연구의 실정이다.
변용 없는 순수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친설親說’이라고 부른다면, 친설만이 지속되던 ‘초기불교 시대’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친설만을 담은 경전이나 율장은 없고, 현 단계에서 100% 친설이라고 객관적으로 단정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렇다면 초기불교 시대는 그 면모를 알 수 없는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시대가 아닐까?
불교학에서 말하는 ‘초기불교’는 학자마다 정의가 조금씩 다를 수는 있으나, ‘친설의 불교’라기보다 ‘부파가 전승한 아함・니까야・율장 등에서 추출한, 상대적으로 더 오래된 불교’에 가깝다. ‘초기경전’도 ‘통째로 친설 그 자체인 아함과 니까야’가 아니라 ‘아함과 니까야 중에 오래된 부분(古層)으로 입증되는 경전 또는 경전의 일부’로 국한된다.
우리나라의 거의 대다수 불교인들은 초기불교를 ‘친설의 불교’, 초기경전을 ‘친설 그 자체인 아함과 니까야’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학계에서는 방금 전에 언급했듯이 그렇게 보지 않는다.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의미하는 바는 각각 다르다. 한쪽으로 치우친 신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중도의 시각에서 냉철히 보는 것이 불교다.
| 대승불교의 특징과 히라카와의 대승불교 기원설
대승불교는 불멸 후 약 400~500년이 경과한 기원 전후의 시기에 인도에서 일어난 새로운 불교 운동이다. 석가모니의 진의를 찾고자 한 이 혁신적인 불교 운동의 담당자들은 자신들의 불교를 ‘대승불교’라고 부른 반면, 기존의 불교인 부파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폄하했다. 대승(大乘, mahāyāna)이란 쉽게 말해 ‘해탈로 가는 큰 수레’라는 의미로, ‘만인을 해탈로 이끄는 가르침’을 뜻한다. 이에 반해, 소승(小乘, hīnayāna)은 ‘해탈로 가는 작은 수레’, 즉 ‘출가자 자신만의 해탈을 지향하는 가르침’을 뜻한다.
대승불교는 종래의 부파불교와는 다른 새로운 사상과 수행법을 표방하고 실천한다. 부파불교가 이상으로 삼은 것은 출가・수행하여 아라한이 되는 것이었다. 아라한은 붓다에 대한 칭호 중의 하나지만, 여기서의 아라한은 불제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를 가리키며 붓다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편 대승불교는 출가・재가를 불문하고 누구라도 붓다와 동등한 깨달음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覺)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으며, 그것을 향해 뜻을 세운 자는 모두 보살菩薩이라고 불렀다. 보살은 ‘보리살타(bodhisattva의 음역)’의 약어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라는 뜻이다. 대승불교는 보살도菩薩道, 즉 ‘붓다가 되는 길’에 대한 다양한 가르침이었고, 그 가르침을 설하는 경전들을 편찬해 간 불교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는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한국・일본으로 전파되었고, 티베트에는 직접 전해져 몽골에까지 확대되었다. 한편 부파불교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은 스리랑카를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의 ‘남방 상좌부 불교’이다. 남방 상좌부 불교를 남전南傳불교라고도 부르며, 이에 대해 대승불교가 확산된 티베트・몽골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불교를 북전北傳불교라고도 부른다.
대승불교는 어디서 왜 일어났을까? 이에 대해 두 가지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기존의 부파 출가 승단에서 생겨났을 가능성이고, 두 번째는 부파 승단과는 전혀 관계없는 다른 무엇으로부터 발생했을 가능성이다. 첫 번째 가능성이 맞는다면, 적어도 대승이 출현할 시기에 이르면 부파 승단 내에서 대승적 사상을 가진 이들이 다발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해 종전까지 결정적 영향을 미쳐 온 것은 일본의 히라카와 아키라(平川 彰) 교수 설이었다. 1968년에 발표된 그의 학설은 이후 30년 이상 동안 강력한 정설로 자리 잡아 왔다. 그는 대승이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히라카와 설의 전반에 대해서는 사사키 시즈카(佐々木閑) 교수가 잘 정리해 놓았으므로 이를 참조했다.
대승불교가 흥기하기 전 불교는 부파의 출가자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출가자들은 그들만의 생활공동체인 승단(=상가, sam.gha)을 형성하여 계율에 따른 생활을 하고 있었다. 불교에는 승단 구성원의 생활 규범을 정한 ‘율장’이라 불리는 법률이 있고, 모든 구성원은 의무적으로 이 율장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도록 되어 있다. 인도불교의 승단은 중앙집권적 체제 없이 인도 곳곳에 산재해 있었으며, 승단별로 경계를 정해 놓고 소속 출가자의 자치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어느 때 그 불교 세계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출가자가 아닌 일반인, 즉 재가자들이었다.
이들 재가자들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신봉했지만 그들은 출가하지 않아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점이 종래의 출가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이었다. 더구나 그 수행의 결과 도달할 수 있는 경지도 출가자의 목표인 아라한을 뛰어넘어 붓다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재가자였기에 그들은 승단에 거주하지 않았다. 그들이 대승이라는 새로운 불교 운동을 일으킨 거점은 석가모니의 사리(=유골)를 모신 불탑(佛塔, stūpa)이었다. 불탑은 승단의 관할에서 벗어난 성역이었으며, 승단이 아닌 다른 장소에 건립되는 일도 많았다. 불탑신앙자들인 그들은 거기에 모여 대승경전을 편찬해 갔다.
이상이 히라카와 교수의 대승기원설이다. ‘대승불교는 재가의 불탑신앙자들이 시작한 새로운 불교 운동이다’로 압축되는 이 설에 따르면 대승불교는 그 이전의 부파불교와는 단절된 장소에서 새로이 창출된 재가자 중심의 불교다. 부파(=소승)와 대승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별개의 불교가 되는 것이다.
히라카와 설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 중 대표적인 한두 가지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불탑이 승단의 관할 밖이라는 것은 실제 율장의 기술과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 부파의 출가 승단이 이미 불탑신앙과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탑신앙이 새로운 불교 운동의 원동력이 되기는 어렵다는 점 등이다.
최근 세계 학계의 무게 중심은 대승불교가 부파의 출가 승단 내부에서 발생했다는 쪽으로 옮겨져 있다. 하지만 부파 내부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동기와 형태로 대승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실로 다양한 가설들이 제시되고 있으며 아직 통일된 결론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기는 하나 대승이 하나의 기원에서 출현한 것이 아니라, 개별 부파의 경계를 넘어 광범위한 범위에 걸친 출가 승단에서 뭔가의 미지의 과정을 거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이미 고인이 된 히라카와(1915~2002) 교수는 대승은 부파불교와는 별개라고 처음부터 예단하고 시작했기 때문에 문제점이 있는 결론에 이르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방대한 자료의 엄선과 섭렵을 통한 치밀한 논증을 구사했다. 율장을 통해 대승경전을 재해석하는 등, 그의 대단한 실증적・역사적 연구 방법이 다음 세대에 이어져 다방면에 철저히 적용된 결과, 오히려 그의 기원설 자체에 수정을 가할 필요성이 발견된 것이다. 비록 히라카와 교수의 대승기원설에 문제점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그는 불교학에 수많은 업적을 남긴 대학자로 지금도 존경받고 있다.
| 대승경전은 어떤 동기로 누구에 의해 편찬되었을까
히라카와 교수의 대승기원설을 비판한 대표적 학자는 미국의 그레고리 쇼펜Gregory Schopen 교수다. 그는 율장과 비문의 기록을 연결 짓는 독창적 방법을 사용했다. 비판 과정에서 그는 대승경전과 대승교단의 성립은 각각 별개라고 주장했다. 비문 등의 기록에 근거할 때 5세기 무렵까지 대승은 교단으로서 성립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 것이다. 영국 학자 폴 윌리암즈Paul Williams 등은 대승경전의 편찬자는 재가자가 아니라 출가자라고 보았다.
일본의 시모다(下田正弘) 교수는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대승경전의 편찬자는 ‘경사經師’들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의 경사經師란, 부파불교의 출가 승단 내에서 경장經藏, 즉 ‘오늘날의 아함이나 니까야의 모태가 된 경전’을 담당하여 전승해 오던 출가승이다. 쉽게 말해, 아함・니까야 전문가였던 일부 출가승들이 대승경전을 편찬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새로이 대승경전을 편찬했던 것일까?
기원 전후의 시기에 아함・니까야를 문자로 기록하는 서사書寫가 시작되어, 그것을 계기로 아함・니까야에 수록된 개개의 경전들은 고정화되고 지적 활동에서 이탈하여 과거의 유물이 되어 갔다. 이때 경전의 중요성을 자각한 일부 경사들이 과거의 유물이 되어 버린 경전을 부활시키고자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은 무엇일까?’를 지속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다르게 표현하면 ‘참된 불설佛說’이 된다.
이 경사들은 과거부터 계승되어 온 붓다의 말을 직접 체득하여, 참된 불설을 펼치려는 확신과 사명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하여 체화體化된 붓다의 말씀,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그들은 경전으로 편찬했다. 그것이 바로 대승경전이다. 경사들은 참된 불설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이어 갔고, 그 결과를 대승경전으로 지속해서 편찬해 갔다.
경전을 계승하는 일이란 경전 내용의 일부 개편일 수도 있고, 경전의 새로운 창출일 수도 있다. 이것은 니까야에 수록된 여러 경전의 다양성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현실의 다양성에 대응하여 거기에 맞는 참된 불설을 펴기 위해서는 이러한 개편과 확산은 불가결하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범천梵天 권청勸請의 설화’ ‘뗏목 비유의 경전’ ‘해당 지방어로 설법하라는 권유’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대승경전의 편찬 활동은 경장經藏 전승의 전통 속에 이미 있던, 편찬할 때의 이런 관여 방법이 서사書寫의 도입으로 비약적으로 높아진 결과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부파의 출가 승단에 위화감 없이 수용되는 것이었다.
대승경전 편찬 운동으로서 시작된 대승불교는, 수백 년 동안 부파의 출가 승단 속에서 경전의 모습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5~6세기에 이르러 무착無著이나 세친世親을 위시한 대승 논사의 저술에 대승경전이 그 존재를 나타내고, 비문에 대승 신봉자들의 이름이 열거되며, 관세음보살을 위시한 예배의 조형물이 출현할 때 대승은 마침내 그 모습을 외부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승교단이 대승경전을 낳은 것이 아니라 대승경전이 대승교단을 낳은 것이다.
이 사실은 인도에 유학한 법현(法顯, 4~5세기), 현장(玄奘, 602~664), 의정(義淨, 635~713) 등 중국의 구법승들이 남긴 인도 현지 승원의 견문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인도 곳곳의 부파 승단 중에는 대승경전을 독송하는 승원이 있는가 하면, 아함・니까야와 대승경전을 병행하여 독송하는 승원도 있었다.
이상이 학계에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시모다 교수의 대승 기원에 관한 학설을 알기 쉽게 요약한 것이다.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성전의 변용과 확산을 허용하는 불교 전통이, 서사의 도입과 참된 불설에 대한 경사들의 끊임없는 질문이 계기가 되어, 비약적으로 추진된 시점에서 대승경전이 출현했고, 그 결과 대승불교가 탄생했다는 것이 그 요점이라 할 수 있다.
장기이식은 외부의 장기가 이식된 몸에 잘 적응될 때 목적을 이룬다. 불설이라는 진리가 시대와 장소라는 몸에 적응한 것이 대승불교다. 불설이 나에게 적응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등이 있다.
장휘옥ㆍ김사업 두 사람은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1,0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에서 수행・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