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에세이] 달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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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에세이] 달 그림자
  • 황건
  • 승인 2019.01.03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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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인하대 의대 교수

불심을 가진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우리나라에서는 불교미술을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어느 지역이고 명승지 목록에 사찰이 들어있을 뿐 아니라 학생 시절 수학여행지에서도 빠지지 않아 그럴 것이다. 즉 우리나라에서 불교는 종교라기보다 ‘생활’에 가깝다고 하겠다. 이렇게 익숙한 덕택에 늘 보면서 천편일률적으로 같다고 생각했던 불상이나 불화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큰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내가 교환교수로 갔던 미국에 함께 가서 일년 반 뒤에 돌아온 아이들은 삼국시대가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기본적인 우리나라 역사도 모르기에 큰일 났다고 생각하고는 독립기념관을 시작으로 거의 매 주말마다 박물관을 데리고 다녔다. 

여주 목아박물관의 잔디밭에서 대리석으로 조각된 관세음보살 좌상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그곳에서 『알기 쉬운 불교미술』이라는 책을 얼른 구입하였다. 책을 읽고서야 그 동안 수많은 사찰을 돌아 보았어도 구별하지 못하였던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비로자나불을 비로소 구별하게 되었다. 이후 얼굴계측을 이용하여 미인도와 부처의 얼굴을 비교하는 논문까지 쓰게 되었으니 이만저만한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즈음 서점에서 책들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이용범 작가의 『일만 년 동안의 화두』라는 책을 발견하고 구입하였다. 화두는 자주 쓰는 단어이지만 부처가 꽃 한 송이를 들어 청중에게 보였을 때 마하가섭만이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에 그 기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어느 대통령이 즐겨 쓰던 ‘대도무문’은 남송의 무문혜개가 쓴 『무문관』에서 나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깨달음의 비밀 중 하나가 마음속의 분별을 없애는 것이다”는 이야기와 「안심문답」, 『달마어록』, 『임제어록』, 『벽암록』 등이 소개되어 있었다. 호기심에 빠져 이것저것 읽다 보니 결국 『벽암록』까지 사서 보게 되었다.

2004년 가을 어느 금요일이었다. 원주 연세대학교에서 연구팀이 회의를 마치고 다들 서울로 올라갔는데, 나는 혼자 강릉에 가서 바다가 보이는 여관에 묵었다. 난간에서 보름달을 보았고 그 달이 바다에 비치는 광경을 보았다. 

다음날 미시령을 넘어 서울로 향했다. 강을 왼편에 두고 달리다가 백담사 표지판을 지나친 후 얼마 되지 않아 강 건너편에 몇 개월 전 신문에서 본 ‘백담사 만해마을’이라는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궁금했다. 차를 돌려 들어가 보았다. 주차장에는 조선일보사 버스와 승용차들이 여러 대 있었다. 현수막에 ‘만해 유품전달식’이라고 써 있었다. 조선일보사에서 소장하고 있던 만해 한용운의 육필 원고들을 만해마을에 기증하는 행사가 막 끝난 터였다. ‘문인의 집’의 벽에는 저명인사들과 서예가들이 쓴 편액들이 걸려 있었다. 한 노승이 그 편액에 대해 신문사에서 온 이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잘 들리지 않아 나는 모두들 곁에 가길 어려워하는 신문사 대표 옆에 바짝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노승은 편액 중에 ‘무염영無染影’에 대해 경상도 억양으로 설명하였다. “달 그림자는 연못에 잠겨도 물에 젖지 않는 기라, 똥에 닿아도 똥에 묻지 않는 기라 ….” 

설명이 끝나자마자 입구에 가서 저 스님이 누군지 물어보았다. 우연히도 『벽암록』을 해설한 책의 저자임을 알게 되었다. 스님에게 다가갔다. 

내가 말했다. “『벽암록』을 잘 읽고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니 모하노?”
내가 답했다. “칼잡이 입니다.”

그 스님을 다시 뵙게 된 것은 반 년 뒤였고, 그 때에야 그 스님은 ‘칼잡이’가 ‘조폭’이나 ‘백정’이 아니라 ‘외과의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년 뒤 나는 그의 추천으로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가끔 뵈러 가면 사람들에게 “내 상좌야” 하고 자랑스럽게 소개하셨다. 

지난 여름 그 스님이 입적하였을 때 설악산으로 문상을 갔다. 올해 4월에 받았으나 직접 보여드리지 못한 ‘과학기술훈장’을 달고 큰절을 했다. 며칠 전에는 스님의 ‘은관문화훈장’ 추증식이 열린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진료 시간이라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생전에 써 주신 연구실의 ‘백락일고伯樂一顧’만 바라보며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의 의미를 되새길 뿐이었다.

달 그림자처럼 물에 젖지 않는 그 경지에 언제 도달할 수 있을 것인지….(無染影)                           

 

황건
서울대 의과대학 졸업. 현재 인하대 의과대학 성형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4 《창작수필》로 등단. 2005 《시와 시학》으로 시 등단 후 의과대학생들의 ‘의학과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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