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에도 아이들과 그리 어울리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때에도 그랬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더욱 그랬다. 대학 마당의 거대한 마로니에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늘 담배를 피우며 혼자서 생각에 잠기곤 했다. 서예는 동아리에서 동료들과 함께 배웠지만 저녁에도 빈 방에서 혼자 쓰는 시간이 많았다.
사군자도 배웠다. 동시에 데생도 열심히 하며 광선이 빚어내는 오묘한 그림자에 매혹되었다. 유화는 혼자서 그렸다. 색 배합은 영문으로 된 책을 사서 배웠으나 그저 혼자서 마음대로 그렸다. 누가 시킨 적은 없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홀로 했다. 전국 각지를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독문학과를 다녔지만 그 당시 명강名講이라고 알려진 강의는 교실을 바꾸어가며 모조리 들었다. 물론 아는 친구는 없이 홀로 들었다. 학점을 따야 하므로 함께 다닌 친구가 있을 리 없었다.
미학美學강의를 부전공으로 40학점 취득했어도 고고인류학과의 교수는 받아들이지 않아 60년도에 입학했지만 28세에 학부 2학년으로 학사 편입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한 학기 만에 흥미를 잃고 중퇴했다. 그해에 결혼하고 미술사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다. 미술사학이 무엇인지 알아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저 박물관의 작품들이 좋아서였다.
12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님은 항상 애처로운 눈길을 구석에 앉아있는 막내에게 보내곤 하셨다. 부산 피난 시절에는 큰 방을 하나 썼는데 늘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칭병稱病하고 부산 큰 누님 집에 내려가 매일 빠지지 않고 영화를 보는 중에 아버님은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대학교 때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나 홀로 선택하고 결정해야했겠다. 대학 진학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나마 고고인류학과 한 학기 다닌 인연으로 1968년 가을 간절히 소망했던 국립박물관 학예사가 되었다. 9월이었다.
인적도 드믄 고요한 고궁인 덕수궁으로 들어가 맑고 파아란 하늘을 쳐다보고 잔디밭을 걸으며 돌로 건축한 최초의 궁전宮殿인 석조전石造殿으로 향해 가는 길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기억하고 있다. 박물관 출근 첫 걸음이다. 그날부터 미술사학을 독학하기 시작하여 퇴임하기까지 계속되었다. 미술사 강의를 평생 들은 적이 거의 없다. 스스로 주제를 정하여 논문을 끊임없이 써나갔다. 그 당시 동료들은 모두 외국으로 유학했지만 학위 같은 것은 평생 한 번도 욕심낸 적이 없었다. 학사 편입하자마자 이미 아사히 펜탁스 카메라를 서서 작품들을 찍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한국미술 5천 년 미국 순회전시 때에 보스턴에서 열렸던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표를 잘했는지, 그 발표를 들은 하버드대 죤 로젠필드 교수는 발표 그날로 박사 과정의 대학생으로 초청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의 이름이 넓은 미국 학계에 널리 퍼졌었다. 학사 평점이 C학점이요 석사도 아니하였으니 그런 월반은 그 대학 역사에서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을 것이다. 박사학위는 논문을 쓰다가 제쳐두고 기초를 다지기 위해 중국미술과 인도미술을 공부하고, 미국 각지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두루 다니며 여러 나라의 작품들을 사진으로 촬영하며 관찰했다.
그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독학을 해오다가 2000년 즈음 이화여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서면서 예상하지 못한 학문적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시간적으로 구석기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창조해온 일체의 조형예술품과, 공간적으로 세계 모든 나라에 남아 있는 조형예술품을 「영기화생론靈氣化生論」이란 이론을 정립해 갔다.
조형언어를 완벽히 해독하며 독각獨覺이 되었음을 느꼈다. 아무도 몰라서 보지 못하는 인류가 창조한 조형예술품에 ‘조형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을 세계적으로 처음 찾아내어 그 조형언어가 문자언어처럼 음소音素가 있고 음소가 모여서 음절音節을 만들고 음절이 모여 문장文章이 되듯이, 조형언어에도 나름의 문법이 있음을 세계역사상 처음으로 독학으로 찾아내어 정확히 해독하는데 성공했고 조형언어가 전개하여 가는 법칙을 찾아냈다.
문자언어로 이루어진 3,000년 동안의 세계만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제 조형언어로 이루어진 300,000년 동안의 역사를 되찾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게다가 부처님의 설법이 문자언어로 기록된 경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형언어로 표현된 조형예술품에 표현된 다른 방법의 설법임을 혼자의 힘으로 찾아냈으니 독각獨覺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우리가 그동안 알았던 세계보다 훨씬 넓으며 훨씬 더 신비한 세계를 발견했으니 역사 상 이렇게 큰 사건이 또 있겠는가.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는 산기슭의 봉은사 근처에 살았다. 좁은 안방의 머리맡에는 미황사美黃寺 괘불 사진을 붙여놓았었다. 특히 그 괘불의 부처님의 얼굴을 사랑한 까닭은 그 애처로운 눈빛 때문이었다. 우수에 잠긴 얼굴은 항상 마음을 끌었다. 아마도 싯다르타 태자가 정각을 이룬 후 중생이 괴로워 내는 소리를 보고 지었던 얼굴이 바로 그런 얼굴, 자비심의 얼굴이었으리라.
매일 그 부처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머리의 붕긋붕긋한 검은 머리털이 아무리 보아도 이상했다. 어찌하여 부처님 머리에 머리칼이 있단 말인가. 그 머리칼 위로 정상계주라는 둥근 민머리가 엿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검은 머리칼을 무시하고 나니 얼굴과 정상계주가 연이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림으로 그려서 이발을 시원하게 해드리고 선으로 이어보니 정확히 이어졌다. 수행이 깊어지면 정수리가 붕긋 오른다고 한다. 그 기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처님 얼굴은 얼굴이 아니고 보주임을 증명하였으니 그 무량한 환희심은 지금까지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보주 위에는 작은 구멍이 있고 그 구멍으로부터 보주가 뿅! 하고 솟아나와 그 보주에서 긴 영기문靈氣文이 태극무늬를 이루며 양쪽으로 뻗어나가고 있지 않은가. 팔만대장경에는 부처님이 보주라는 기록은 한 줄도 없다. 그러나 조형언어로는 정각을 이룬 여래를 보주로 표현하고 있음을 읽어내니 상상도 못할 일이라 하겠다. 조형언어로 여래의 본질을 독학으로 깨친 셈이다. 이 진리를 출발점으로 「영기화생론」이란 이론은 점점 방대하게 체계화되어 오고 있다.
지난 달 일본 나라 방문의 큰 목적은 「정창원전正倉院展」이었다. 페르시아를 비롯하여 중국과 한국과 일본 등, 7~8세기에 걸친 말 그대로 찬란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서양에 대한 동양의 자존심을 지키게 되었다. 매년 가을 정창원전이 열리고 그 때를 겨냥하여 전 세계의 학자들이 나라로 모여든다. 나흘째 마지막 날, 10명으로 각각 이루어진 팀에게 주제를 주고 연구하여 발표하라고 했다.
그 팀들은 최선을 다하여 훌륭한 정답을 발표했다. 너무 고마워 어깨를 들썩이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었다. 그러나 깨어나서도 계속하여 흐느껴 울었다. 동행이 곁에 있었지만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너무도 감사하여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흐느꼈다. 외로움과 기쁨과 감사가 뒤엉킨 흐느낌이었다. 내가 찾아낸 조형언어의 세계를 누군가가 계승해야 할 터인데 아직 그런 제자를 두지 못하여 10년 넘어 참았던 감격의 울음이리라.
8만 4천 경전이라 해도 부처님은 참으로 말하고 싶은 진리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하던데 바로 그 이야기가 조형언어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과거에도 갠지스 강가의 모래알만큼 무량한 부처님이 계셨고, 현재에도 갠지스 강가의 모래알만큼 무량한 여래가 계시고, 미래에도 갠지스 강가의 모래알만큼 무량한 여래가 계실 것이라 했는데, 아아! 구석기 시대 이래 인류가 창조한 일체의 조형예술품에 절대적 진리인 보주寶珠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으니 바로 조형언어에 불교를 초월한 보편적 진리가 표현되어 있지 않은가. 절대적 진리를 깨쳐서 문자언어로 기록한 경전과, 절대적 진리를 조형언어로 표현한 조형예술품, 두 가지 표현 방법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하여도 조형예술품이 더 뛰어난 것 같다. 그래서 「수월관음의 탄생」이란 저서, 고려불화 한 점으로 낸 저서에서 부제로 이렇게 말했다. ‘한 폭의 불화는 하나의 경전과 같다’고.
비록 꿈이었지만 100명의 최초의 제자가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으렸다! 간절한 소망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리니 무엇을 두려워하랴. 매일 정정진正精進하며 매일 매일 아니 매순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