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강의실 357호] 무아無我와 자비慈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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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강의실 357호] 무아無我와 자비慈悲
  • 홍창성
  • 승인 2018.10.26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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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거듭될수록 학생들은 불교를 철학적으로 더 깊이 이해한다. 대부분 미국학생은 내 강의를 듣기 전까지 불교를 종교로만 여겨 왔다. 그들은 철학으로서의 불교가 동시에 종교도 되는지 궁금하다.

불교는 창조주이고 절대자인 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 불교가 어떻게 종교가 됩니까? 그리고 영혼의 존재조차 믿지 않는 불자들이 어떻게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기독교도가 절대다수인 미국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이렇게 서양적 사고思考에 치우친 질문을 받게 된다. 나는 이 질문에 직접 답하기보다는 질문을 둘로 나누어 에세이 과제로 내준다.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해 보고 깨닫게 하기 원해서 그렇게 한다.

(1) 창조주이며 절대자인 신을 믿지 않는 불교가 종교인가?
(2) 불교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불자들이 어떻게 도덕적이고 이타적利他的인 삶을 살 수 있는가?

학생들은 이런저런 자료를 찾고 또 서로 토론을 통해 꽤 열린 관점에서 에세이를 쓴다. 첫째 질문은 쉽다. 사전을 찾으면 ‘종교’에 대한 여러 정의定義가 있다. 위대한 성인聖人이 있고 내세來世를 인정하며 도덕률을 제시해서 권선징악의 가르침을 보여주면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이를 모두 충족하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자격이 있다. 절대적인 신의 존재는 필요조건이 아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가르친 거의 모든 미국학생이 불교도 종교라고 인정했다. 

둘째 질문에 대해서도 대다수 학생이 비교적 쉽게 답한다. 영혼의 존재를 믿는 것은 도덕적 삶을 위한 불가피한 조건이 아니다. 불교는 업業을 통한 인과응보因果應報를 가르치고 또 팔정도八正道의 여러 가르침이 도덕률과 관련되기 때문에 불자들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다. 서구에는 불교가 생명을 보호하며 평화를 사랑하는 고귀한 종교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어서 실제로 불자들의 도덕성을 의심하는 서구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대다수 서구인은 업業을 믿지 않고 또 팔정도도 그들이 불자가 아닌 한 따라야 할 의무가 없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가 도덕적으로 산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자신과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철학적으로 이치에 맞는 불교의 근본교리로부터 도덕적으로 옳은 삶의 방식이 나온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지 않으면 서구인이 불교 윤리학을 받아들이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다음 제안으로 학생들을 유도한다.
    
불교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무아(와 연기緣起)의 진리를 깨달은 불자들이 한없는 자비심慈悲心을 가진다고 한다. 무아에 대한 깨달음이 어떻게 자비심을 일으키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자.  

소중히 간직해야 할 스스로의 자아自我나 영혼이 없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잃을 것이 없다 (nothing to lose)’는 식으로 막행막식莫行莫食할 법도 한데, 불교는 오히려 그 반대로 무아에 대한 깨달음이 이타행利他行으로 향하는 자비심을 불러온다고 한다. 이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자비(慈悲 compassion)란 무엇인가. 자비심이란 다른 이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인가?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리고 어루만져 주려는 사랑과 연민의 마음인가? 정情이 많은 동아시아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불교의 자비는 뜨거운 감정이 넘치는 핫hot한 자비가 아니라 이성理性을 바탕으로 차분히 이루어지는 쿨cool한 자비다. 이 점을 이해하려면 핫한 사랑(love)과 쿨한 배려 또는 보살핌(concern)의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먼저 사랑과 배려 / 보살핌의 차이에 대해 살펴보겠다. 

우리가 자기를 사랑하기에 하는 일을 나열해 보자.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도 아껴서 매일 꼬박꼬박 먹고 자고 씻고 쉬고 공부하고 일하고 노는 등 자신을 위해 많은 시간과 마음을 투자한다. 평생 그렇게 한다. 스스로를 오죽 사랑하면 그렇게 할까. 그런데 놀랍게도 서구인은 이런 경우를 자기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런다고 보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사랑(self-love)과 관련된 일이 아니고 자기배려 또는 자기보살핌(self-concern) 때문에 그런다고 이해한다. 나도 미국에 와서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이 차이를 알게 되었는데 결국 서구적 사고방식이 옳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 이유를 설명해 보겠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자신에 대해 위에서 나열한 모든 배려 및 보살피는 행위를 계속할 수 있다. 교도소에서 진심으로 참회하며 자기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형수도 매일 먹고 자고 씻고 쉬며 스스로를 보살피는 모든 일을 그대로 한다. 사랑과 배려가 다르기에 사랑하지 않아도 배려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서구 여러 나라는 굶주리는 적성국 사람들에 대해서도 인도적 지원을 하는데 이것은 그들을 뜨겁게 사랑해서가 아니라 차분한 마음으로 그들의 건강을 배려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사랑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들의 생존을 배려해야 할 도덕적 책임은 있다. 그래서 서구인은 따뜻한 마음 없이도 배려심만으로도 때마다 자선단체에 기부한다. 변덕스런 감정으로 기부한다면 그렇게 오래 계속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정情이 넘치는 동아시아보다 차분한 서구에서 기부문화가 더 발달했다. 

이타행利他行은 따뜻하거나 안쓰러워하는 감정으로 하기보다 차분하게 쿨cool한 판단으로 할 때 더 좋은 결과를 낸다는 심리학자들의 연구도 차고 넘친다. 그리고 붓다의 자비는 처음부터 핫hot한 사랑이 아니라 쿨cool한 배려 및 보살핌이다. 뜨거운 감정이 초래하는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자유로운 각자覺者가 뜨거운 사랑으로 중생을 제도하리라고 믿는 것은 큰 오해다. 서구의 불교철학자들은 이 점에 대해 물론 나와 같은 생각인데, 이들은 내가 그런 문제로 한때 씨름했다는 점에 의아해 한다.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문젯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자비가 무엇인지 정의해 보자. 자비심이란 타인을 향한 이해타산 없는, 즉 이기심 없는 배려심 또는 보살피는 마음(unselfish, selfless concern)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심私心없이 쿨cool한 배려심은 붓다의 무아無我에 대한 가르침을 체득했을 때 자연스레 우러나오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가진 자기배려심과 자기를 보살피는 마음에서 자기가 사라지게 되니까 그 배려심과 보살피는 마음이 타인에게로 더 향하여 이타행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무아를 깨쳐야 비로소 타인에 대한 진정으로 사심 없는 배려가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붓다의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사회적으로 맺는 관계로도 연장시켜 이해한다면 우리와 연결되어 함께 살아가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까지 이 배려심과 보살피는 마음이 미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무아無我와 연기緣起에 대한 깨침이 사심 없는 자비심을 모든 이에게 베풀게 해 주는 원천이다. 무아와 연기를 바탕으로 할 불교윤리학이 설득력 있을 이유다.

글을 마치려다가 문득 영혼의 존재를 믿는 유아론有我論을 견지하는 다른 종교에서도 타인에 대해 진정으로 사심 없는 배려가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 이들 종교를 믿는 많은 훌륭한 분들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 평소 도덕적으로 살며 이타행을 행하는 것을 많이도 보아 왔다. 그런데 그분들의 선행善行이 자신의 영혼을 보호하고 구제하기 위해서라면 순수하게 사심 없는 행위라고 볼 수 있을까. 이타행을 위해 자신의 육신이나 명예를 희생하는 분도 계신데, 만약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행위여도 그렇게 할까. 또 반대로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는 일이라면 무슨 험한 일이라도 하지 않을까, 옛 십자군이나 오늘날 무슬림 테러리스트처럼. 예전에는 이웃종교의 가르침에 대해 그쪽 신자도 아니면서 비판적 논의를 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자제해 왔는데, 그분들이 영혼에 대한 무한한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는 의문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혹시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이 서구종교의 유아론有我論이 가질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가 될 수는 없을까.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존경하는 이웃종교 신도들께 죄송스럽기만 하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 교수와 함께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 (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을 집필중이고,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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