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내가 집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도 좀 멀쩡한 집에서 삽시다.”
우리 집에는 모과나무가 한 그루 있고, 손바닥만 한 마당에 봄이면 보랏빛 제비꽃과 하얀 둥굴레가 앙증맞게 피고, 여름이면 시뻘건 능소화에 분홍빛 수국이 요염하고, 가을이면 분꽃이 마당 가득 향기를 내뿜고, 겨울이면 마루에 앉아 쌓였다 녹는 눈을 가만히 지켜볼 수 있다. 게다가 고개를 살짝만 들어도 밝았다 어두워지는 하늘에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을 오래오래 바라볼 수 있으니,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하지만 우리 집은 또 처마가 다닥다닥한 좁은 골목길 안쪽에 자리한 50년 된 집이고, 시멘트 블록 골조에 기와로 지붕을 올리고 그것도 반은 슬레이트인 집이며, 뒷마당에 놓인 프로판 가스를 교체할 때마다 방을 두 개나 건너야 하는 집이다. 그러니 아내에게는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내는 ‘아파트에서는 이제 도저히 살 자신이 없다’는 나의 의견을 수용하여 근교의 단독주택을 알아보자고 제안했다. 풍광 좋은 곳에서 노년을 여유롭게 보내고 싶은 것은 많은 이들의 로망이다. 해서 이참에 우리도 그 대열에 합류하자 싶어 소위 ‘전원주택’이라고 지어놓은 집들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러다 맘에 드는 집을 하나 찾았다.
널찍한 품을 가진 큰 산이 날개를 편 학처럼 뒤편을 두르고, 봉긋한 작은 둔덕에 자리 잡고서 앞쪽으로 너른 들판과 강을 낀 집, 말끔한 신축 건물에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집, 그야말로 나와 아내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그런 집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었다. 수중에 현금이 없으니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처분하고도 새집 계약서를 들고 은행을 찾아가 대출을 받아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니 어디 돈 많은 지인에게 돈을 꾸어야 할 판이었다. 아내와 둘이서 한참을 궁리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그냥 살던 대로 삽시다.”
아내는 없던 일로 하자며 제법 환하게 웃어보였지만, 마음이 영 개운치 않았다. 오랜 세월 꾹꾹 누르다가 겨우 꺼내놓은 아내의 불만도 해소해 주지 못하는 무능한 가장, 그것이 현재 나의 모습이란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더니 뒷산이 아름답던 그 전원주택이 문득문득 떠오르면서 어제까지 맘에 들던 우리 집이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졌다.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 탐심貪心은 좀처럼 고개를 숙일 줄 몰랐고, 채워지지 않는 욕심에 헛헛함과 자괴감이 요동쳤다. 이 맘을 어떻게 다잡아야 할까? 문득 10여 년 전에 읽었던 『십송률十誦律』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십송률』 제1권 「4바라이법에 대한 설명(明四波羅夷法)」에 다음 이야기가 나온다.
부처님께서 왕사성에 계실 때 있었던 일이다. 그 무렵 많은 비구들이 한 곳에 모여 여름 안거를 보냈는데 방사房舍가 부족했다. 비구들은 각자 아는 이들에게 풀과 나무를 얻어 암자를 짓기로 했다. 수행자들이 지은 집은 허술했다. 집을 지어본 경험도 없고, 얻어온 목재와 숲에 버려진 목재로 지었기에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수행자들은 만족했다. 얼기설기 처마를 엮고 풀을 덮었지만 따가운 햇살과 폭우를 피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성으로 들어가 걸식을 하고 돌아온 수행자들은 깜짝 놀랐다. 자신들이 지은 집들이 몽땅 사라지고 지붕을 덮었던 풀과 잔가지만 널브러져 있었다. 걸식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무꾼들이 집을 허물고 쓸 만한 목재를 몽땅 가져간 것이었다. 비구들은 상심했지만 곧 마음을 추슬렀다.
“다시 아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목재를 얻어서 암자를 지읍시다.”
그때 그 대중 가운데 달리가達尼迦라는 이름을 가진 한 비구가 있었다. 그는 도공의 아들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맞아. 진흙을 구워 벽돌집을 지으면 되겠네. 그러면 더 튼튼하고, 더 멋지고, 나무꾼들이 허물면 어쩌나 걱정할 필요도 없잖아.’
달리가 비구는 진흙을 모아 벽돌을 만들었다. 그리고 솜씨를 발휘하여 창과 문, 들보와 서까래, 소머리와 상아 장식, 옷걸이까지 모두 진흙으로 멋들어지게 만들어 숲의 풀과 나무들을 모아서 구웠다. 그러자 붉은빛이 찬란한 아름다운 벽돌집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집을 짓느라 애쓰다 보니 어느새 3개월의 안거 기간이 끝나버렸다. 달리가 비구는 자신이 지은 멋진 집에서 하룻밤도 자지 못하고 유행遊行을 떠나야만 했다. 달리가 비구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면서 남아있는 동료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이 집은 제가 3개월 동안 공들여 지은 집입니다. 제가 2개월 뒤에 돌아와 이 집에서 먹고 마시며 지낼 것이니, 절대로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뒤에 이곳에 오는 비구들에게도 이 말을 꼭 전해 주십시오.”
며칠 후, 부처님께서 유행을 떠나시기에 앞서 아난을 데리고 수행자들이 머물던 여러 곳의 방사들을 점검하셨다. 부처님은 수행자들의 엉성한 오두막 틈에서 붉은빛이 찬란한 벽돌집을 발견하고 아난에게 물으셨다.
“붉은빛이 찬란한 저 아름다운 집은 뭐냐?”
“달리가 비구가 지은 집입니다.”
아난은 나무꾼들이 수행자들의 집을 허물고 목재를 훔쳐 간 일, 도공의 아들이었던 달리가 비구가 진흙을 구워 집을 지은 일, 떠나면서 주변 수행자들에게 신신당부했던 일을 부처님께 상세히 말씀드렸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달리가 비구가 지은 저 붉은 벽돌집을 부숴라.”
이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에는 ‘주인 없는 진흙을 모아 벽돌을 만들고, 주인 없는 풀과 나뭇가지를 모아 벽돌을 굽고, 그것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지었는데 부수라고 하실 것까지야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이제는 부처님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부처님은 온갖 고뇌와 다툼이 소유욕에 비롯됨을 깨닫고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분이었다. 그래서 교화를 펴시던 초기에는 “같은 나무 아래에서 이틀 밤을 보내지 말라”고 출가자들에게 요구하셨다. 행여 머무는 곳에 애착을 가질까 염려하신 까닭이었다. 이후 안거라는 제도가 생기면서 승원僧院이란 것이 생기긴 하였지만 말 그대로 그곳은 ‘승려들이 잠시 머무는 곳’일 뿐이었다.
하지만 달리가 비구가 지은 붉은 벽돌집은 잠시 ‘머무는 곳’이 아니라 ‘나의 집’이었다. 다른 비구들은 3개월의 수행을 위해 집을 지었지만 달리가 비구는 집을 짓기 위해 3개월을 사용한 것이다. 이것이 전도顚倒다. 아마 달리가 비구는 유행을 떠난 뒤에도 온통 ‘내 집’에 대한 염려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소유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고뇌의 소멸을 맛볼 수 있다”고 가르치신 부처님께서 어찌 “저 집을 부숴라”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박경리 선생님의 「옛날의 그 집」이란 시 마지막에 이런 구절이 있다.
모진 세월 가고
아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출가자에게도 재가자에게도 집은 필요하다. 하지만 집은 ‘머물 곳’에 그쳐야지 ‘가질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파트값에 목매고 살아가는 세상 모든 이에게 그래야 마땅하다고 요구할 수야 없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다짐한 불제자라면 그래야 한다. ‘가질 것’이 되는 순간, 집이건 절이건 고뇌와 다툼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고뇌와 다툼의 구렁으로 뛰어드는 것은 붓다께서 열어주신 길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성재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해군 군종법사를 역임하였으며, 동국대학교 역경원에서 근무하였다. 현재 동국역경위원, 한국불교전서번역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계종 간행 『부처님의 생애』, 『청소년 불교입문』 집필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저서로 『커피와 달마』, 『붓다를 만난 사람들』, 『육바라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