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마는 지혜·도력이 출가자보다 뛰어난 재가 거사
『유마경』은 재가 거사居士가 주인공인 희유한 경전이다. 주연은 상인 유마힐, 무대는 상업 도시 비살리. 불교 중심이 출가자에서 재가자로 옮겨가고 대승이 흥기하던 시기에 찬술되었다. 연극적 구성에 유머·반전이 많아 재미있게 읽힌다. 수백 년 후 중국 현장이 비살리를 방문했을 때 유마의 병실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널리 퍼지고 깊이 감화를 주었음을 시사한다.
『유마경』에는 반야부 계통의 뛰어난 지혜들이 녹아있다. 다른 경전들이 공 해석에 치우쳤다면 유마경은 공의 실천을 강조한다. 공상空相에 집착하는 출가자를 나무라며 세속이 공 실천의 현장임을 보인다. 유마는 불이不二에 대해 질문받고서 그냥 침묵한다. 침묵은 불립문자와 무애행의 도리를 일깨운 것. 물에 비친 달(문자)에 의지하되, 허공의 달(진리)과 하나 되어 구름에 걸리지 말라(실천)는 의미이다.
유마는 지혜와 도력이 부처님 다음으로 뛰어나다. 보살·제자들은 유마에게 배우러 왔다가 제압당한다. 유마는 처처가 도량이라며 재가·출가 구분을 부정한다. 앉는 자리를 없애 승단의 조직화를 비판한다. 천녀는 옷에 꽃을 들러붙게 해서 계율의 형식주의를 꼬집는다. 소승 출가자의 한계를 보여주고 대승 재가자의 자신감·자긍심을 드러낸다. 지금 재가자 수준과 역할이 유마 당시보다 크게 후퇴한 듯하다.
유마가 병이 든 이유는 중생이 아프기 때문이다. 보살을 진흙탕에 핀 연꽃으로 비유하면서, 처자 거느리고 장사 하는 것이 모두 보살행인 것이다. 부처님은 상인들에게 장사로 이익 내서 보시하라고 가르쳤다. 출가자의 생업을 금한 것은 수행에 소홀할까 우려해서였다. 유마는 수행·생업의 불이로 승속을 넘나든다. 수행 없이 생업에 급급한 요즘 재가자와 대비가 된다.
거사는 출가 재가자인 동시에 재가 출가자. 머물고 떠남이 무애한 수행·보살행의 실천자이다. 재가자는 유마에 관심을 갖고 그처럼 살아야 한다. 거사 명칭이 실천의 기준과 기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불교에서 유래한 장로·집사가 기독교 용어로 쓰이고 있다. 장자의 아들처럼 옷 속에 보석이 있는데 거지로 살아가는 셈이다. 재가 거사가 제 역할을 다해야 대승의 불교가 세상을 이끌 수 있다. 재가자를 지혜 바탕의 생업으로 자비를 실천하는 거사로 재정의 해야겠다.
| 생업에서 일가를 이루면서 수행을 계속한 밤나무 검사
젊은 시절 밤나무 검사로 불렸던 이가 있다. 초임 검사로 재직할 때 틈틈이 야산에 밤나무를 심었던 탓이다. 천목 거사 송종의. 범부라면 하나도 가기 힘들었을 길을 세 개나 걸었다. 공직자, 영농인 그리고 수행자. 모두 일가를 이루었고 하심으로 일관해 더 돋보인다. 현직에서 성공했고 노후는 보람차며 세간·출세간 경계를 허물었다. 천목 거사, 집에 머물면서 출세간의 도를 실천한 이 시대의 유마이다.
천목 거사는 극빈한 가정에서 자라 1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강직·청렴 검사로 승승장구한 후 법제처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고연봉이 보장된 전관예우를 거부하고 논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오랫동안 가꾸었던 밤나무들이 있는 곳이었다. 군 근무 시절 비행기에서 민둥산들을 내려다본 것이 밤나무를 심기 시작한 계기였다. 인근 농민들이 딸기 판매에 어려움을 겪자 저온창고와 가공시설 도입을 주도했다. 밤·딸기의 채취-수매-가공 사업은 규모가 커져 영농조합에서 주식회사로 발전했다. 밤은 자연, 딸기는 이웃에 대한 자비심에서 일으킨 사업이다.
그는 아들(당시 20세)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슬픔에 빠져 지내다 부산의 한 사찰을 찾아갔다. 거기서 수불 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았다. “이 손가락을 까딱하게 만드는 그놈이 누구인가.” 천목당天目堂이란 곳에서 두문불출하며 화두에 빠져들었다. 13일째 되던 날, 그는 번민·오열이 평상심의 다른 모습임을 깨달았다. 아들 장례 때 들어온 부의금은 인연되는 사찰의 본존불을 조성하는데 희사했다. 밤·딸기로 버는 수익을 갖고는 법치문화재단을 운영한다. 사회정의에 매진하는 후배 법조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다. 아들을 먼저 보낸 아픔이 그를 수행자로 살도록 했다.
천목 거사는 검사로 정의를 실현했고 영농으로 자비를 베풀었다. 바른 생업 종사에 대해 한 치 의심이 없었다. 목적의식이 명확했으며 그것을 진지하게 실천했다. ‘아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었다. 고통스러운 사건과 수행의 삶이 불이가 되었다. 둘이면서 하나인, 둘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 그에게 수행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함이 아니다. 바른 목적을 향해서 바르게 살아가는 과정 자체이다.
재가자는 바른 생업을 실천하고 있는가? 본인이 힘들고 사회가 비판적인 걸 보면 그렇지가 않다. 오래전 길을 잃었으면서 바른길로 나아가려고 마음을 내지 않는다. 마음자리는 통연명백한데 간택·방일이 어긋나게 한다. 바른길은 고통 치유에 초점 맞추어 혁신적 방편으로 돈을 버는 것이다. ‘그놈’을 깨달아야 지혜가 생기고 생각·행동이 여여해진다.
재가자가 열심히 수행하면 생업이 잘 될까? 『유마경』에 돈 버는 내용은 상세하게 나오지 않는다. 생계가 순조롭고 이윤을 좋은 일에 쓴다는 정도이다. 장사를 무심히 바라보고 무애하게 행동해서 가능한 일이다. 수행과 생업 성과는 별개이다. 출가자가 탁발로 음식을 구하지 못하면 굶어야 하듯이. 지혜롭게 열심히 하되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수행의 덕목인 지혜, 정진, 비집착과 통한다. 수행은 바른 과정에 충실하면서 바른 성과를 지향토록 한다.
재가자가 수행자로 거듭나려면? 연꽃은 진흙탕에 뿌리내리고 물에서 줄기 키워 허공에 꽃 피운다. 진흙탕은 고통, 물은 치유, 허공은 행복. 모두가 ‘그놈’의 작용이다. 수행은 ‘그놈’을 지혜로 바라보고 자비로 실천하는 것이다. 좌선만을 수행으로 좁게 해석하지 말자. 출가자가 생각하는 조각상에 가깝다면 재가자는 살아있는 연꽃이라 하겠다. 생업은 고통이 넘쳐나서 그만큼 치유·행복의 기회가 많다. 성공에 겸손하고 실패해도 용기를 잃지 않는 평상심이 곧 도이다.
출가자가 재가자의 수행을 자극하고 이끌려면? 수불 스님과 천목 거사의 예처럼 고통으로 인연 맺으면 된다. 출가자는 안목이 열려있어 하화중생하고 재가자는 고통 속에 상구보리 해야 한다. 유마의 생업·수행 불이는 재가자·출가자의 만남에 대한 가르침이다. 장소를 옮겨가며 대중이 모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출가자·재가자는 매 순간 생업·수행을 따로 또 함께해야 한다.
| 재가자가 깨어나고 깨달아서 불교계와 세상을 바꾸어야
요즘 불교계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 근본이 흔들리고 지말枝末에서 삼독의 아수라가 벌어진다. 작은 사건들이 연속되면 큰 사고로 이어진다. 재가자와 출가자는 법륜의 두 바퀴이다. 각자 바로 서고 상호 의지해야 수레가 제대로 굴러간다. 재가자는 생업·수행 불이와 재보시를 실천해야겠다. 출가자는 수행에 전념하는 법보시의 발원지여야 한다.
재가자는 출가자 외호에 소극적이면서 수행과 재보시에 방일하다. 출가자 겉모습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 책임을 다하는지 자성해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화합을 최우선해서 불교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언행으로 분노를 표출하거나 세속법에 호소해서는 곤란하다. 승가를 받드는 것은 부처님 씨앗에 대한 신심에서이다. 출가자의 청빈 생활과 근본을 꿰뚫는 선기禪機는 소중한 전통이자 자산이다.
거사 운동으로 사회를 변혁하자. 유마의 방은 재가자 결사의 상징 공간이다. 방장은 시장통에서 대안大安의 표주박을 두들기는 거사들의 리더이다. 신도회 사무실, 사찰 유휴공간, 기업가 접견실 등을 운동 거점으로 삼아야겠다. 청년 일자리 창출, 노인 운력 조직화, 자영업자 판로확대 등이 시급하면서 손쉬운 사업들이다. 소득과 보람이 생겨나니 생업이고 수행이다. 거사 운동이 활발해야 출가자가 자극받아 불교가 다시 융성해진다.
출가자는 『유마경』에서처럼 재가자에게 배워야 한다. 세속 고통이 있어 출가자가 깨달음을 구하려고 발심한다. 수행은 고통 치유의 해법을 찾는 과정. 현장에서 효험이 검증되고 성공사례가 나와야 올바른 해법이다. 법문은 현장감 있는 스토리텔링이어야 청중을 만족시킨다. 앞선 경영기법을 도입해 승가 조직의 투명성·효율성을 높이는 것도 요구된다. 출가자와 재가자, 교단·사찰과 기업은 서로 배우며 공진화共進化하는 도반이다.
지난 수백 년 기업이 세상 변화를 이끌어왔다.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기업가의 정신을 자극하고서이다. 성경을 재해석해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 기업가는 깨어났지만 깨닫지 못해서 물질·돈으로 치달았다. 기독교는 기업을 발전시킨 공功으로 교세가 커지면서 공空과 멀어졌다. 불교는 공功이 적어 위축되면서 공空에 갇혀버렸다. 깨달음의 불교가 깨어있지 못하니 뭔가 앞뒤가 안 맞다. 공功은 비우기 어렵고, 공空을 작동시키기는 오히려 쉽다. 불교는 스스로 깨어나 세상과 더불어 깨달음을 실천해야 한다. 『유마경』을 소의경전 삼아 거사불교 운동을 시작하면 된다.
이언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경영학 박사를 받았다. 삼성경제연구소 전무와 부산발전연구원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바른경영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대학 때부터 불교를 공부하였으며, 불교와 경영을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불교와 경영의 접목을 모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