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에 헐떡이고 있는 자가 물을 구하는 것처럼, 저는 당신(=석가모니)의 말씀을 원하고 있습니다. 부디 말씀의 비를 내려 주십시오.” (『숫따니빠따』 353송 후반부)
“난다Nanda여, 성자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의 견해 때문도 아니고, 그의 학식 때문도 아니며, 그가 알고 있는 것 때문도 아니다. 번뇌의 마군을 떠나 고뇌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이 가는 사람들을 나는 성자라고 부른다.” (『숫따니빠따』 1078송)
| 번뇌를 떠난 사람에게는 최고라고 고집할 만한 것이 없다
지난 호에 이어 불교의 특색에 대해 몇 가지 더 언급하고자 한다. 최초기 경전으로 알려진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들은 여기(=자신의 종교ㆍ견해)에만 청정이 있다고 하고, 다른 가르침에는 청정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의거하고 있는 바만 선善이라고 하면서 서로 다른 각자의 진리에 제각기 사로잡혀 있다.(824송)
그들 논쟁을 좋아하는 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들어가 서로 적대하며 상대를 별것 아닌 어리석은 자라고 폄하한다. 그들이 논쟁하는 데 믿고 의지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스승을 비롯한 타인[과 그들의 가르침]이다. 그러면서 자신이야말로 진리의 달인이라고 하며 칭송 받기를 원한다.(825송)
2,500여 년 전 석가모니 당시도 지금처럼 자신의 종교나 견해만 옳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했던 모양이다. 사람의 품성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자신이 신봉하는 가르침과 스승, 혹은 이에 영향 받은 자신의 견해만이 진실이고 선이라고 확신하며 상대의 그것은 부정하고 폄하한다. 이를 두고 경전은 “서로 다른 각자의 진리에 제각기 사로잡혀 있다”고 진단한다.
사람들은 각자의 진리에 갇혀 서로 논쟁하며 다툰다. 이 다툼에서 승리하는 것이야말로 진리를 위해 본인이 해야 할 바를 다하는 것이라 믿고, 마침내 승리하여 칭송 받기를 원한다.
석가모니는 이를 어떻게 보았을까? 『숫따니빠따』에 담긴 그의 지혜를 밝혀 본다.
난다Nanda여, 성자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의 견해 때문도 아니고, 그의 학식 때문도 아니며, 그가 알고 있는 것 때문도 아니다. 번뇌의 마군을 떠나 고뇌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이 가는 사람들을 나는 성자라고 부른다.(1078송)
석가모니는 견해와 학식과 아는 바가 출중하다고 해서 성자라 하지 않는다. 번뇌를 여의어 고뇌 없고 바라는 것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성자라고 한다. 번뇌를 떠난 사람은 상대보다 내가 ‘뛰어나다’든가 ‘못하다’든가, ‘같다’라는 자의식이 없다. 다툼과 논쟁은 이 자의식에서 비롯된다.(842송) 그러므로 번뇌를 떠난 사람은 다투거나 논쟁하지 않는다.
또한 다툼과 논쟁 뒤에 따르는 폐단, 다시 말해 패자는 비탄과 원한에 빠지고 승자는 교만과 이로 인한 파멸로 떨어지기 때문에 다투거나 논쟁해서는 안 된다. 석가모니는 다툼과 논쟁에 의해서 사람이 청정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한다.(826~830송)
갖가지 주의ㆍ주장들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집착하고 만다. 일단 집착되면 그 결점들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단지 진실을 진실 그대로 성찰하는 석가모니는 말한다. “‘나는 이것을 설한다’는 집착이 나에게는 없다(837송).” 어떠한 주의ㆍ주장에도 얽매이지 않아 눈앞의 진실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를 비롯한 “번뇌를 떠난 사람들에게는 최고라고 고집할 만한 것이 없다(833송).”
이상을 통해 불교는 자의식에 빠지지 않고, 주의ㆍ주장에 사로잡히지 않아 타인과 다투지 않는 것을 지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체의 번뇌를 떠나 고뇌 없고 원하고 바라는 것 없는 성자는 그렇게 산다. 원효 대사(617~686)가 부처(佛)의 특성을 ‘무쟁無諍’, 즉 ‘다툼이 없음’으로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 당나라 때의 임제(臨濟義玄, ?~867 일설 866) 선사는 속박 없는 대자유의 경지, 즉 해탈에 이르려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선승)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逢佛殺佛, 逢祖殺祖)”고 사자후했다. 여기서 ‘죽인다’는 것은 액면 그대로 살인한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이미지나 관념을 초월한다는 의미다. 결국 임제 선사의 말은 부처나 조사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표현한 것이다.
부처와 조사는 불교에서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이것조차도 초월해야 해탈한다는 것이 불교다. 임제 선사는 그것을 “부처도 조사도 죽인다”고 표현했다. 부처나 조사에 대한 집착마저도 여읜 사람은 모든 번뇌를 떠난 사람이다. 따라서 임제 선사의 말은 앞에서 언급한 『숫따니빠따』의 “번뇌를 떠난 사람들에게는 최고라고 고집할 만한 것이 없다(833송)”와 결국 뜻하는 바가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의 부처와 조사는 그 위상에서 기독교에서의 하나님과 예수와 동등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예수에도 집착하지 말고 초월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의 종교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조차도 집착하지 않으려는 불교, 이런 불교가 다른 종교를 비방하며 다툴 리는 없다. 일례로 임제 선사는 “공자를 만나면 공자를 죽이고, 맹자를 만나면 맹자를 죽여라”는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 불교가 화합과 평화를 가져오는 이유
서로 반목하고 다투는 사람들을 화해시켜 평화롭게 하는 것이 종교가 할 일이 아닌가? 그런데 사이좋게 지내던 사람들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다투고 싸운다면 이 무슨 모순일까.
세계사에서 종교가 전쟁의 원인이 된 대표적인 경우가 11세기에서 13세기까지 약 200년간에 걸쳐 진행된 십자군전쟁이다. 유럽의 기독교 군대가 이슬람교의 지배하에 있던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양 종교 간의 반목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불교는 어떠한 주의ㆍ주장에도 사로잡히지 않아 타인과 다투지 않는다. 또한 불교에는 ‘유일신唯一神의 사도使徒’로서 신의 뜻을 이행해야 한다는 이념 자체가 없다. 신이라는 개념 자체를 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가 중시하는 것은 ‘해는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처럼 누구에게라도, 어떤 종교인에게라도 통하는 영원한 진리, 즉 법法이다.
석가모니는 임종이 다가왔을 때, 후계자를 지목해 줄 것을 기다리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래(=나)의 가르침에는 숨겨 놓은 비밀스러운 진리는 없다. (중략) 여래는 ‘나는 교단을 이끈다’든가, ‘교단이 나에게 의지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략)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등불로 삼고(自燈明),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서(自歸依) 머물러라. 남을 의지처로 삼지 마라. 진리(法)를 등불로 삼고(法燈明) 진리를 의지처로 삼아서(法歸依) 머물러라.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마라.(『대반열반경』)”
석가모니에게는 자신이 교단의 지도자라든가 교단이 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의 제자들이 그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석가모니가 중시한 것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한 진리였다. 이 진리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거나 누군가의 뜻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우주적 이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 진리가 앞으로 설명할 ‘무상無常’이나 ‘연기緣起’, ‘공空’과 같은 것들이다. 이 진리를 깨치는 자는 누구라도 부처가 되어 모든 괴로움이 영원히 소멸된 열반에 이른다.
석가모니는 이 진리를 감추어 두지 않고 누구에게라도 즉시 설한다. 이것을 『대반열반경』 원문은 “여래의 가르침에는 스승의 주먹은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움켜쥔 주먹 속에 뭔가를 감추듯이 여래는 가르침을 숨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원문을 이해하기 쉽도록 위에서는 ‘여래의 가르침에는 숨겨 놓은 비밀스러운 진리는 없다’고 번역했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구원은 신의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그 은총은 신의 뜻을 따라야 가능하다. 반면에 불교는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은 자신이 진리를 스스로 봄으로써 모든 번뇌를 여의어 어떠한 욕망과 어리석음도 없을 때 가능하다. 신을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는 ‘신의 이름’이나 ‘신의 뜻’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되는 행위 자체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행위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 그래서 남이 아니라 자신을 의지처로 삼으라고 하는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배척과 분쟁, 전쟁과 테러를 일으키는 주동자들은 실제로는 그들이 믿는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는 지적이 있다. 자신들의 정치ㆍ경제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그 의도를 교묘하게 감춘 채 종교적으로 이념화된 문제들을 내세워 추종자들을 속이고 선동한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십자군 원정의 배후에는 성직자의 타락, 영주와 하급 기사들의 새로운 영토에 대한 야망, 상인들의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 평민의 전리품에 대한 욕구 등과 같은 세속적인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성지 탈환은 곧 신의 뜻이다’라고 종교적 이념으로 포장되었기 때문에, 추종자들은 숱한 악행을 자행하면서도 자신들의 원정이 신성한 과업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신의 뜻’을 빌린 각자의 욕망이 그런 행위에 숨겨져 있었다는말이다. 불교의 시각에서 보면, 불교에는 우선 그런 사람들에게 빌미를 제공할 신이 없다. 불교가 경계하는 것은 바로 그 욕망이며, 어떤 이념ㆍ주장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히는 어리석음이다. 그러한 욕망과 어리석음을 다 여읜 사람이 모든 번뇌를 떠난 사람이며 부처다. 부처는 이것만이 최고라는 고집 없이 진실을 진실 그대로 보며,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다투지 않는다. 부처가 될 때 일체의 괴로움은 종식을 고한다. 불교는 부처가 설한 가르침인 동시에 부처가 되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불교인은 부처가 되는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불교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불교는 전쟁의 불씨가 된 적이 없다. 혹여 있었다 해도 극소수였거나 소규모였을 것이다. 불교가 각지로 전파될 때 어떤 종교와도 큰 충돌 없이 평화롭게 이루어진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는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불교의 서양 전래’를 꼽았다. 제1ㆍ2차 세계대전이나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 공산주의의 등장과 쇠퇴 등을 지목한 것이 아니었다. 불교가 서구에 전해진 것이 향후 인류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측한 것일까?
| 천상천하 유아독존 — 불교는 평등의 종교
전기에 따르면, 석가모니는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고는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즉 “하늘 위 하늘 아래, 곧 온 우주에서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고. 상식적으로 볼 때, 아직 눈도 안 뜬 갓 태어난 아기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하나의 계기를 통하여 놀랍도록 변모했을 때 새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룸비니 동산에서의 석가모니의 탄생 이야기는 그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을 것을 예고하는 이야기다. 싯달타 태자로서 태어남을 제1의 탄생,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은 것을 제2의 탄생으로 보았을 때, 제1의 탄생에서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제2의 탄생을 미리 알리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선언에는 석가모니가 죽음도 불사한 수행 끝에 얻은 진리가 담겨 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눈앞에 있는 어떤 것 하나도 자신만의 힘으로 생겨난 것은 없다. 오늘 저녁 밥상에 올라온 김치 한 쪽도 그렇게 만들어지기까지 대지와 햇볕과 비와 공기 등 온 우주가 무수한 세월에 걸쳐 참여해 온 결과물이다. 이처럼 모든 것은 무수한 조건(인연)에 의존해야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가 의미하는 바다.
현재의 내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인연과 연결되어 있기에 그 존재가 가능하다. 내 몸은 부모와 음식과 빛과 공기, 여타 생명들의 은혜가 있었기에 태어날 수 있었고 생존할 수 있었다. 그 고마운 존재들이 없다면 내 몸도 없다. 내 유전자 속에 저장된 정보들은 태곳적부터 존재해 왔던 무수한 존재들이 남긴 것이다. 그 정보들이 내 생각과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 내 유전자에 영향을 미친 그들이 없었다면 내 정신세계도 성립이 불가능하다.
나 하나 태어나고 유지시키기 위해 온 우주가 그만큼 정성을 기울였는데 내가 어떻게 소중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세상에 똑같은 존재는 하나도 없다. 나는 비교할 대상 자체가 없는, 소중하고 고귀하며 유일한 존재다. 내가 이런 존재면 남도 그런 존재다. 우리 각자는 모두 평등하게 유일하며 고귀한 존재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선언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따라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만인이 똑같이 귀하다는 평등사상을 담고 있다. 석가모니만이 우주의 제일인자임을 나타낸 말이 아니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번뇌를 떠난 사람에게는 남보다 뛰어나다는 자의식도, 이것만이 최고라는 집착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석가모니가 자신만이 존귀하다는 말씀을 하겠는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나타나 있는 평등사상은 석가모니의 행적과 가르침의 기조를 이루는 것 중의 하나다. 인도에는 석가모니 시대 훨씬 이전부터 출생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는 ‘카스트 제도’라는 세습적 계급 제도가 있었다. 본인이 태어난 집안이 대대로 속해 있는 신분에 따라 본인의 신분이 평생 결정되며, 그 신분에 따라 결혼과 직업 등을 제약받는 불평등 신분 제도다. 현재도 법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사회 관습적으로는 그 영향이 만만찮게 남아 있다.
카스트 제도의 대표적 네 계급은 브라흐만(성직자)ㆍ끄샤뜨리야(왕족이나 무사)ㆍ바이샤(평민)ㆍ수드라(천민)이며, 이 안에는 다시 수많은 하위 계급이 있다. 최하층 계급으로는 불가촉천민이 있다.
석가모니는 이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여 출생에 의해 사람의 귀천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행하는 행위가 그 사람의 귀천을 좌우한다고 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불교 교단에 출가하는 데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어떠한 계급의 사람이라도 출가할 수 있으며, 계율을 지키고 선善을 행하면 누구나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고 했다. 카스트 제도가 엄격했던 당시로서는 혁명에 가까운 평등사상의 실천이었다.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불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등이 있다.
-무주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