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하는 일에는 까닭이 없다. 마음은 늘 저절로 그러해서 그러한 것이니 우여곡절을 따질 것이 못 된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도 마음은 그저 홀연忽然히 일어나는 것이라고 짧게 적어놓았다. 이 말귀를 처음 봤을 때가 내 나이 25살 되던 해 겨울이었다. ‘홀연’이라는 말귀가 갑자기 너무 낯설고 어려웠다. 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을 때 창밖으로 뜯어낸 솜뭉치 같은 눈송이가 뭉실뭉실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일러 무명이라 하느니[名爲無明]”라는 구절에 이르러서 나는 너무 힘들어 더 읽어 내려가지 못했다. 마음이 가엾고, 사람이 가엾고, 사는 게 가여워 가슴이 먹먹해지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책상에 엎드려 달콤한 낮잠을 자다가 깬 듯싶은데 헉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사이에 그때까지 산 세월만큼 또 살아버렸지만, 여태 내 안에는 그날처럼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다. 일장춘몽一場春夢, 생사가 한 자락 봄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 소리는 얼마나 잔혹한가. 그래서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 죽어야 한다는 것인가. 깨어나야 한다는 것인가 깨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살아있지 않은 것들을 상대로 이 말을 했을 리는 없다. 그것들은 듣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듣는 것들은 멀쩡히 살아있는 것들일 텐데, 이미 삶의 등짝에 죽을힘을 다해 매달려 있는 그들에게 그 짓이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리는 너무 기막히다.
그래 꿈이라 치자. 꿈이라면 뭔 꿈일까. 꿈도 여러 가지다. 예전부터 꿈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고 했다. 정몽正夢은 글자 그대로 정상적인 꿈이다. 성장기의 아이들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꿨다고 하면, 어른들은 크느라고 그런다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데 그런 꿈이 정몽이다. 태몽胎夢도 정몽에 속한다. 가위눌리거나 자다가 경기한다고 말하는 꿈은 악몽噩夢이라고 한다. 여기서 악은 선악善惡이라고 할 때의 그 악이 아니라 무서울 악噩자를 쓴다. 악몽噩夢은 악몽惡夢과 우리말로 같은 소리가 나서 비슷해 보이지만 좀 다르다. 악몽噩夢은 놀람을 강조한 데 비해서 악몽惡夢은 나쁘거나 싫다는 느낌을 강조한 것이다.
생각이 너무 사무쳐서 꿈에서까지 나타난 것은 사몽思夢이라고 한다. 그리움이 사무칠 수도 있고 원망이 쌓일 수도 있고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할 수도 있다. 어쨌든 생각이 너무 고여 잠결로 넘쳐 들어가 꿈이 되면 사몽이라고 한다. 잠잘 때만 꿈을 꾸는 게 아니다. 오몽寤夢은 깨어 있으면서 꾸는 꿈이다. 깜빡 졸다가 꿈꾸는 것이나 멍하니 딴 생각하는 것 따위다. 신나는 꿈은 희몽喜夢이라고 하고, 깨고 나서도 몸이 으스스 떨리는 무서운 꿈은 구몽懼夢이라고 그런다. 구몽은 무서움이라는 점에서 악몽과 비슷해 보이지만, 꿈꾸면서 놀라는 게 악몽이고 마음속의 두려움이 꿈에 나타나는 것은 구몽이다.
한 생각 홀연히 일어나는 것이 마음이고, 마음이 저절로 그려내는 세상이 꿈이라면,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한 편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된다. 악몽은 나쁘고 희몽이라고 좋을 것도 없다. 여섯 가지 꿈은 꿈이라서 끝내 모두 가엾다. 계속 꾸고 있을 수도 없고 자리를 털고 후딱 일어나버릴 수도 없는 얼떨떨하고 막연함이 꿈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똑같이 느끼는 심정이라면, 그렇다면 결국 삶이 한 자락 꿈이라고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게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달콤한 인생>은 한국판 누아르 액션을 표방한 영화다. 불교와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도 선禪의 분위기를 잘 담아내고 있다. 뻔히 불교를 소재로 하면서도 불교를 담아내는 데 실패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불교와 별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불교 색채가 짙게 배어 있는 영화도 있다. 불교를 담아내려고 하면 할수록 정작 그 본령과는 멀어지는 아이러니를 번번이 반복하고 마는 것은 묘한 일이다. 의욕 과잉 정도로 추정할 수밖에 어떻게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올바른 수행의 길은 공들이고 공들이기보다는 덜어내고 또 덜어내는 것이라는 게 선禪의 통찰이다.
<달콤한 인생>의 마지막 장면에 선문답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꿈이건 슬픈 꿈이건 달콤한 꿈이건 간에 일장춘몽은 어쨌거나 사람을 눈물 나게 한다. 바로 이것이 세상은 끝내 고苦라 꿰뚫어 본 바로 그 지점일 것이다. 이 문답은 꿈의 허망함을 안쓰러워하는 것처럼 읽힌다. 꿈은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이라서, 실제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라서 아픈 것처럼 읽힌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이라고 해도 꿈은 그냥 꿈이라서 가엾다. 꿈꾸기 때문에 가여운 것이다.
『술몽쇄언述夢瑣言』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을 월창 거사月窓 居士라고 하였을 뿐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서自敍에서 저자는 이렇게 적어두었다. “월창 거사는 해동海東 사람이다. 타고난 성품이 어리석고 못나서(素性愚拙) 남과 사귀어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不喜交遊). 고요한 밤이 되면 언제나 창문을 열고 달을 상대하여 유연悠然히 홀로 앉아 있곤 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호號를 월창月窓이라고 하였다.” 저자는 책에 자신의 이름을 남겨놓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창밖에 걸린 달처럼, 한 조각 꿈처럼 그렇게 흔적 없이 살다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책의 끝에 실린 발문跋文에서 겨우 짐작된다. “광서光緖 갑신년 봄에 김군金君 제도濟道가 그의 선고장先考丈 월창 선생의 저서인 『술몽쇄언』을 진귀한 글씨의 활자를 모아 간행하고 나에게 그 유래를 적으라고 청탁하여 왔다. 정의情誼상 감히 사양하지 못한다.”고 적혀 있다. 발문은 유운劉雲이라는 저자의 문하생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는 29세 때에 처음 저자의 문하에 나아가 배우게 되었다고 했다. 김제도는 김대현의 아들이고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도 월창은 김대현의 호라고 소개되어 있다.
김대현(金大鉉, ?~1870)은 조선 고종 때 사람이었다. 열 살 때 이미 시서詩書를 통달할 만큼 총명하고 영특했다고 한다. 유불선儒佛仙 삼교에 두루 해박했는데, 임종 무렵에 다른 저서들은 모두 불태워 버리고 『자학정전字學正典』과 『술몽쇄언』만 남겼다고 한다. 『술몽쇄언』은 “꿈에 대해 적은 자질구레한 말” 정도로 이해된다. 언뜻 제목만 보면 해몽과 관련된 글인가 싶기도 하지만, 사실은 꿈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에 해당하는 책이다. 꿈을 소재로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꿈이 아니라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술몽쇄언』 중에 「매수昧受」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무지몽매해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월창 거사는, 꿈자리가 비워지기(空)를 바란다면 꿈속의 사물을 치워버릴 것이 아니라 마음이 어둡지 않으면 꿈은 저절로 비워질 것이고, 마음이 비워지기를 바란다면 세상일을 멀리할 것이 아니라 마음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저절로 비워질 것이라고 했다. 평생 읽고 쓴 서물書物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창밖에 걸린 달을 쳐다보며 그는 속으로 물었을 것이다. “마음 달이 물밑에서 차오를 때, 나의 주인공은 어디로 가는가.”
박재현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저술로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 깨달음의 신화』, 만해, 그날들』 등이 있고,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부산 동명대학교 불교문화콘텐츠학과에서 겨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