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마음의 고향은 어디일까? 우리들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 제각기 있겠지만, 경주는 태생의 고장을 넘어 공통적으로 마음의 고향, 문화의 뿌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고대문화나 문화의 정체성에 관심을 갖는 이라면 신라문화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경주를 찾아가기 마련이다. 경주 또한 남산을 제외하고는 경주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경주 남산은 신라 천년고도 경주의 남쪽에 우뚝 솟아 있다. 높이 468m의 금오산과 494m인 고위산을 합쳐 남산이라 부르는데, 이 두 산의 여러 산줄기가 이어지는 곳에는 40여 계곡이 있다. 기암괴석의 바위산과 소나무 숲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남산에는 신라의 여러 왕릉도 있지만, 수많은 사지寺地와 불상과 탑들이 있어 과거 천년 신라 불교문화의 보고로서 불국토佛國土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남산은 수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하는 야외박물관으로 많은 순례자들이 찾고 있다. 신라인들은 산악을 신성시하면서 불교 이상세계인 불국토에 대한 염원을 남산의 바위에 재현해 놓았다. 남산의 바위 중 탑곡마애조상군에서 바로 그러한 역사적·신앙적 공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 마애조상군에 새겨진 다양한 도상 이미지들은 하나의 교리체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불교미술의 세계를 보여 준다. 남산을 비롯한 신라의 마애불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마애불 중에 이곳 마애조상군처럼 단일한 암벽이나 바위에 많은 불상이 군집되어 있는 예는 드물다. 그런 면에서 이곳 마애불에는 불교의 세계관과 많은 역사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경주남산탑곡마애조상군은 남산의 불곡과 미륵곡 사이 탑곡의 옥룡암 위쪽 부처바위(佛巖)에 새겨진 마애조각을 일컫는다. 높이 약 10m, 둘레 약 30m의 바위 사면四面에 빼곡하게 불교의 도상들을 새긴, 즉 부처의 세계인 법계法界를 표현하고 있는 사방불이다. 거대한 바위에 34가지의 다양한 도상이 새겨진 마애조상군은 오늘날의 불교학, 역사학 그리고 불교미술사의 지식으로도 명쾌하게 해석되어지지 않는다. 조형성이 뛰어난 불상조각은 아니지만 바위 전면에 이렇게 다양한 도상을 가진 경우는 국내에서 유일하다. 거대한 바위에 여백도 남기지 않은 밀집된 구성은 기존의 불화나 마애불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모습으로 신비롭기만 하다. 마치 불경의 변상도變相圖같기도 한 여러 도상들은 하나의 불타의 세계를 표현한 불화이기도 하고 또 다르게는 특별한 이야기가 깃든 삽화처럼 보인다.
이곳 마애조상군이 조각된 바위의 각 방위면은 부정형不定形이지만 대체적으로 사방불四方佛이라는 형식을 띄면서 자유롭게 표현되어 있어, 각 면의 인물상을 중심으로 한 도상의 배치와 주제는 매우 다양하다. 사방불은 동·서·남·북뿐만 아니라 모든 공간에 부처가 존재한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이는 대승불교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초기 대승경전에서는 사방四方보다 팔방八方, 나아가 여기에 상·하를 더해 시방十方에 있는 부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사방불의 명시는 경전마다 차이가 있지만 동방의 아촉阿閦여래, 서방의 무량수無量壽여래, 남방의 보상寶相여래, 북방의 미묘성微妙聲여래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경전에 상응하여 조각되어 있는 사례가 극히 드물며, 사방불 중 동방에는 중국과 달리 약사불이 조성된 경우가 많다.
둘레가 30m가 넘는 장대한 큰 바위에 새겨진 마애조상군에는 하나의 단일한 주제로 묶지 않으면서도 부처, 보살, 승려, 신장, 비천, 가릉빈가, 탑, 나무 그리고 사자 등 다양한 종류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각 면에 여래상이 있고 여기에 보살이나 승려, 비천, 탑 등이 존재하는 하나의 장면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북면에는 1여래, 2비천에 쌍탑과 보개寶蓋 그리고 쌍사자가 있는데 마치 하나의 가람 전경 같다. 동면에는 1여래에 1보살, 3승려 그리고 7비천이 있다. 아마도 여래의 설법 광경을 표현한 장면화같이 보인다. 그 사이에 3개의 또 다른 조각이 있는데 나무와 좌선하는 승려, 예경하는 승려, 옆에 발우를 두고 좌정한 승려가 있다. 남면에는 1여래 2보살의 삼존상, 2승려 2나무가 있고 상체만 보이는 승려와 또 다른 작은 바위에는 나무 앞에 좌정한 승려상이 있다. 이 면에는 목조건물의 흔적과 3층 석탑과 석조여래입상丸彫이 있고 남향의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좁은 서면에는 1여래, 2비천, 1수목이 있는데 나무아래에 선정에 든 부처의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거대한 자연석 바위표면에 다양한 조각이 새겨진 모습으로 각 면에 4개의 주요 불화와 삽화 같은 또 다른 작은 장면화가 있는 것이다.
각 면의 본존상은 타원형의 얼굴에 둥근 어깨, 무릎 폭이 넓은 안정감 있는 자세로 불신의 볼륨은 절제되면서 윤곽만 따낸 평면 같은 선線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수인은 부처의 존명을 알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한데 가려져 있어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큰 바위의 네 면에 조각된 본존불의 수인은 가사 주름에 가려져 있지만 손의 자세로 보아 선정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법의는 통견이고 대부분 선각으로 주름을 그어 놓았다. 승각기(內衣)는 오른쪽으로 드리워져 있으며, 머리는 맨머리(素髮)이며 미간 사이에는 불상의 상징인 백호白毫가 없으며, 목에는 광대하고 원만한 불신을 나타내는 세 줄의 삼도三道도 없다. 어깨는 약간 좁은 듯하지만 부드러우며 하반신의 표현이 길게 되어 안정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한편, 남면의 독립된 입체의 불상은 바위 면의 부조와 표현형식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넘치는 볼륨감과 세부 처리의 함축적인 표현은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이다.
보살상은 본존상이 정면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정·측면 몸의 자세로 본존을 향해 합장한 채 기울어지는 등 다양하다. 승려상은 나무 아래 수행하는 모습(樹下禪定相), 공양드리는 모습(供養者相), 남면의 상반신 표현 등 본존불과 비슷한 형식을 갖는다. 비천飛天은 모두 허공 중에 천의를 나부끼는 모습으로 합장하고 있는 손, 공양구를 든 손 등 다양하며 얼굴도 정·측면 등 여러 모습이다. 불・보살상에는 광배를 모두 두광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신광은 나타나 있지 않다. 보주형화염문 광배는 서면 본존의 광배이고, 나머지 세 방위의 두광은 중앙에 원圓이 있고 복판의 연화문 그리고 거친 방사선과 원형의 테 등이 표현되어 있다. 천개, 탑, 사자, 수목은 선과 낮은 면 중심으로 회화적으로 보다 자유롭게 표현되어 있다.
이곳 마애조상군은 자유로운 형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인물과 풍경을 통해서 폭넓은 불교의 세계를 표현했다. 새겨진 도상은 만다라曼陀羅적인 회화처럼 표현한 것으로 자연스러운 가운데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한 윤곽선, 타원형의 갸름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자애로운 인상, 본존상들의 삼도三道 없는 목의 표현과 좁고 여성스러운 어깨에 걸친 통견의 법의, 가슴에 비스듬히 흘러내린 승기지, 감추어진 수인 등의 양식적 특징이 있다. 또한 본존과 협시보살의 관계는 지극히 인간적인 대화를 하는 듯한 몸의 자세와 온화한 모습에서 아주 친근한 불상처럼 보인다. 주로 선과 면 위주로 표현하면서 조각보다 회화적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얼굴 상호에는 볼륨의 표현이 시도되었으나 아주 절제된 볼륨으로 만들어져 있다. 불신은 빈약한 볼륨과 평면에 가까운 얇은 곡면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대담하고 단순하고 경직된 선으로 과장되게 표현한 하체와 대좌들도 눈여겨봐야 한다. 제작 시기는 이러한 양식적 특징을 고려 할 때 고신라 말기인 7세기 중엽 경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곳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단순 질박한 가운데 매우 조촐하다. 섬세한 표현과는 거리가 있는 평면적이고 거친 표현이지만 해맑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이는 양감 넘치는 건장한 남성적 표현과는 거리가 먼 부드러운 여성스런 모습으로, 면과 선 중심의 수행자 같은 꾸밈없는 조촐한 표현을 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적 위엄의 권위적인 모습과는 먼 인간미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물론 화강암의 거친 표현 속에서 섬세한 표현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목판에 새겨진 굵은 선화의 판화를 보는 듯하다.
이곳 마애불상군은 조성한 지 천 년 이상이 지나면서 바위 자체의 상도 풍화되어 변화하였고 또한 주변의 환경도 크게 변하였다. 그렇지만 긴 역사에서 많은 변화를 감지하면서 조성 당시의 원래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으면 한다. 제작과정을 유추해 보면, 크고 넓은 바위 면을 한 번에 계획하여 특정 종파의 교리를 살린 도상으로 작업한 것이 아닌, 바위 면의 여분과 조상의 필요에 따라 그때마다 여러 번 나누어 표현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거칠고 균열이 간 바위 면을 그대로 두기보다 틈을 메우고 채색하여 장엄하면서 전각을 짓고 예경, 공양했을 것이다.
조각상들이 새겨진 바위에는 목조건축을 하였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남면 마애불 앞에는 석탑을 1977년에 복원하였고, 남쪽으로 올라가는 동면의 끝머리에 신장상이 있는 것을 보아 아마도 남향의 마애불에 전각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지형의 변화를 유추하면서 가람의 규모 등을 가름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복원된 석탑이나 환조의 입상 불상이 통일신라 후기인 8-9세기의 양식으로 보이는 점에서 큰 바위 면에 새긴 시대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 가람 경영 또한 오랫동안 변화해 왔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 일대에 신라시대의 신인사神印寺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마애조상군을 중심으로 한 가람 경영은 어떻게 이루어졌을지 상상하는 즐거움을 누려봤으면 한다. 아마도 남쪽면의 불상을 주존으로 하여 남향의 중심 전각과 바위 각 면에 조각한 불상이 비바람을 맞지 않도록 전각을 설치하였다면, 큰 바위를 중심으로 특별한 건축물을 조영하여 신앙의 공간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마애불에게 기도나 발원을 하였을까? 마애불 앞에 기도하는 이들이 밝힌 촛불들이 환히 타오른다. 마애불을 밝히고 또 자신의 마음을 밝히면서 온 세계가 밝아온다.
이성도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4회 개인전과 270여 회의 초대, 기획, 단체전에 출품하는 등의 작품 활동을 해왔다. 『한국 마애불의 조형성』 등 다수의 책을 썼고, 현재는 한국교원대학교 미술교육과에서 후학 양성과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