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과라고 하면
사람들은 내게 꼭 물어온다
“스님이 꿈이에요?”
물리과라고 물리학자가 되나?
수학과라고 수학자가 되나?
국문과라고 소설가가 되나?
나도 내가 뭐가 될지 몰라
그냥 목탁 소리가 맑고 풍경 소리가 밝아서
그냥 향냄새가 은은하고 염불 소리가 아득해서
그냥 부처님 품 안이 따스해서
그냥 좋아서 왔어
| 내 안에 한 마리 나비가 태동하고 있었음을
나는 청년 불자다.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수행을 하고 스님을 만난다. 하지만 나는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는 스스로 불자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라 초중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고자 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열아홉 살까지만 해도 불교가 내 삶에 끼친 영향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어릴 적에 가족 여행할 때면 부모님이 꼭 산사에 나와 누나를 데려가서 대웅전에 들어가 향냄새를 맡으며 삼배를 했던 은은한 기억이 있고, 서울 근교 도심사찰을 다니다가 어린이 여름캠프에서 물놀이를 하고 연비를 했던 아득한 기억만이 있었다.
그러다가 입시를 한번 실패하고 재수를 할 때였다. 뜻밖에도 명상에 관심이 생겼다. 윤리와 사상 과목에서 짧게 배웠던 불교철학도 흥미로웠다. 대학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왠진 몰라도 불교가 나와 잘 맞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4년 전에 불교대학에 입학했다.
불교학과 신입생으로 대학에 들어갔지만, 사실 절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고 아는 스님도 없었으며 사찰을 오랫동안 가보지도 않았었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통해 불교를 조금 알 수는 있었지만 그 가르침이 내 삶 속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1학기가 훌쩍 가버리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불교학과 선배가 소개해준 청년출가학교에 가게 되었다. 해남 미황사에서 8박 9일 동안 행자 생활을 했다.
생활 중에는 차수를 해서 걷고 도량을 안행하고 항상 묵언했다. 점심에는 발우공양을 했고 공양 때마다 공양게송을 읊었다. 아침마다 예불과 33배를 하고 참선을 했으며 낮과 밤에는 초청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스님들을 만나 차담도 하고 대화도 나누고 상담도 받는 기회가 있었다. 소임을 맡고 도량청소를 하는 것도 빠지지 않았다. 달마산을 걷기도 했고 팽목항에 가서 추모의 시간도 가졌다.
나는 몰랐다. 그 아흐레의 만남 속에서 내 안에 한 마리 나비가 태동하고 있었음을. 더구나 그 나비의 날갯짓이 나의 삶에 얼마나 큰 태풍을 몰고 올 것을 까마득히 몰랐다.
|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은 나의 몫
차수叉手, 안행雁行, 묵언黙言 등을 하면서 나는 경솔한 행동과 허망한 말을 절제하고 매순간 내 마음을 돌봤다. 예불을 드릴 때는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고요하게 절을 했다. 부처님께 정성들여서 삼배를 올리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고 나를 가장 낮은 땅까지 낮추니 욕심이 비워져서 하심이 일기도 했다.
내게 식사시간은 그저 음식을 배 속에 넣는 시간이었다. 발우공양을 하면서 공양게송을 읊으며 밥을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게가 있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모든 것과 내가 연결돼 있다는 연기緣起의 이치를 일깨우는 뜻깊은 수행이었으며 모든 생명을 위해 베풀겠다는 굳건한 서원誓願이었다.
미황사에서 마련한 인문학 강의는 내게 비판적 사유의 물꼬를 열어 주었으며 스님들의 법문은 달마산에서 내려오는 바람결처럼 내 마음을 맑고 순수하게 만들어 주었다.
어느 날은 새벽에 미황사 자하루에 앉아 참선을 하는데, 하늘은 동이 터와 서서히 밝아지고 달마산 중턱에 걸친 안개가 유유히 지나가고 약수터에는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만 아득히 들려왔다. 깨달음은 찰나에 눈 앞에 펼쳐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찾아왔다.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흐르고 변하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봤다. 세상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오만가지의 번뇌도 일어나고 이내 곧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수행하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몸으로 깨달았다.
스님들이 존경스러웠다. 스님들과 가까이 생활하고 대화를 하면서 나는 비로소 부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산다는 것은 괴로움과 얽매임, 그리고 게으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구하는 것이었다. 또한 연기를 깨닫고 고통받는 다른 중생들을 건지기 위해 한없이 낮은 곳으로 가서 자비를 베푸는 삶이었다.
잠에서 일어나자마자 미래를 걱정하고 자잘한 것을 신경 쓰고 비교하여 욕심내고 조그만 것에도 성내는, 번뇌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눈은 떠 있어도 실상은 헛된 꿈을 꾸며 잠자고 있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진정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구하고 싶었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찾고 싶었고 어떤 길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나와 너, 너와 우리 모두가 같이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었다.
스님과 둘이서 차담을 하며 상담을 하는 시간이 왔을 때, 나는 스님께 조심스럽게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속세에서도 양심을 지키며 살고 싶고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고 살고 싶다고 말을 할 때, 입술은 떨리고 눈에는 뜨거운 것이 흐르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따뜻하고 맑은 눈빛으로 떨고 있는 나를 감싸주셨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날, 나는 선허禪虛라는 법명을 받았고 불자가 되었다. 불교학과에 다니고 있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이미 부처님은 길을 보여주셨다.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 세상에 잘 쓰이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시간이 지나 불교학과 2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입대해 불교 군종병으로 군복무도 마쳤다. 휴학을 하면서 불교와의 인연이 더 깊어졌다.
청년 불자가 되어 그동안 한 불사가 꽤 있다. 여러 사찰에서 어린이 캠프를 했다. 단기출가프로그램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소년원에 가서 여름수련회에 자원봉사 했다. 군법당에서 온갖 소임을 맡아 일을 했다. 군법당 종각불사를 바로 옆에서 도왔다. 부처님오신날을 두 번 진행했다. 명상축제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이외에도 스님을 도와 일했던 불사가 여럿 있다.
하지만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이 시점에서 나는 스스로 자문한다. 부처님의 가피 아래에서 지금껏 잘 살아왔지만 부처님 말씀대로 잘 살아왔는가. 게으르지 않았는가. 죽비 같은 한마디로 내 마음을 때려 친다.
불사보다 수행이 더 중요하다. 아무리 불사를 많이 한다고 해도 정작 내 마음을 잘 돌보지 못한다면 헛수고이다. 아무런 성과를 안 내더라도 스스로 머무는 곳에서 묵묵히 수행하면서 지혜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삶이며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다.
나는 의사가 되고 싶다. 사람의 몸을 살리는 직업만이 의사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살리고 생명도 살리는 의사가 되고 싶다. 의사가 되기 위해 무섭게 공부하는 의대생들처럼 나 또한 치열하게 공부하고 수행해서 훌륭한 의사가 되고 싶다.
중생들의 괴로움을 진단해서 그에 맞는 적절한 처방전을 내려주신 부처님처럼 그 언젠가 나도 이 세상에 잘 쓰이는 사람이 되길 서원한다.
윤형수
선허禪虛. 금강대학교 응용불교학전공 2학년. 2014년 청년출가학교 인연으로 황광우 작가와 재마 스님의 제자가 됐다. 불교를 삶에서 적용하는 것에 대해 공부하고 있으며 고전 책을 읽어서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고 있다. 특히 불교와 교육,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Imee Ooi의 만트라 노래를 좋아하고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무늬를 좋아한다. 대학에서 수행모임을 만들어 감사일기와 책 수행을 대학생 도반들과 같이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