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을 읽다보면 “부처님은 까닭 없이 말씀하는 분이 아니시다”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또한 부처님을 칭하는 호칭 중에 ‘홀로 지내기를 좋아하시는 분’ ‘조용한 곳을 좋아하시는 분’ ‘항상 고요히 선정에 잠기는 분’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처님은 그리 말씀을 즐겨하신 분은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또한 경전을 읽다보면 부처님께서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거나 확답을 회피하신 경우도 종종 나온다. 상대를 굴복시키지 않으면 그가 사방팔방 돌아다니면서 “그 사람 별 것 아니더라”고 떠들고 다닐 게 뻔한데, 부처님은 공공연히 “나는 이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런 걸 보면 부처님은 논쟁의 승패에 도통 관심이 없으셨다는 걸 알 수 있다.
왜 그러셨을까? 『숫타니파타 -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 대한 경(Attadandasutta)』에서 말씀하셨다.
논쟁하는 자들을 보라.
저들은 몽둥이를 들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내가 얼마나 그것을 혐오하여 그것에서 떠났는가에 대해 말하리라.
메말라가는 작은 웅덩이에서 파닥거리는 물고기처럼 떨고 있는 자들
서로 반목하고 있는 자들을 보고 나는 두려움이 일어났다.
…
세상 사람들은 갖가지 학문을 배운다.
하지만 그 학문으로 인해 갖가지 속박의 굴레에 빠져서는 안 된다.
모든 욕망을 잘 살펴 자기 자신의 평안을 배워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 똑똑한 사람은 많고, 똑똑한 사람들은 말을 잘한다.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말은 단어도 고급스럽고 문맥도 짜임새가 있다. 게다가 창과 방패를 다루는 솜씨까지 빼어나 그들의 말에서 빈틈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반드시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 ‘말’이 타인을 미소 짓게 하는 꽃처럼 향기롭다면야 누가 탓하랴? 그런 말이라면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허나 과연 그런가? 쉼 없이 쏟아낸 말들이 ‘나의 영토’를 지키고, 또 확장하기 위한 몸부림은 아닌가? 앞뒤 따져 오밀조밀 엮어낸 문장이 ‘타인의 영토’를 파괴하기 위한 목적은 아닌가?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돌아볼 일이다.
게다가 똑똑함을 자부하는 사람들조차도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는 건 흔한 일이다. 자기 발을 자기가 걸고넘어진다면 우스꽝스러운 노릇 아닌가? 허나 불순한 의도에 사로잡히면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오로지 무언가를 위해 달려들 뿐이다. 그래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쉼 없이 떠벌리기 바쁘다. 중생이 대부분 그렇고, 나름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더 심하다.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 존자도 그런 헛똑똑이였다. 부처님께서 구치라 존자를 교화한 이야기는 『잡아함 제969경』, 『별역잡아함경 제203경』, 『대지도론』 등에 소개되어 있다.
구치라 존자는 본래 바라문으로, 사리불舍利弗의 외삼촌이다. 사리불이 태어나기 전, 명석함을 자랑하던 그가 사리불을 잉태한 누이 사리舍利와의 토론에서 패배하는 사건이 있었다. 구치라는 이상하게 여겼다. 누이가 평소 그렇게 변론에 뛰어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구치라는 생각했다.
“이건 누이의 힘이 아니다. 분명 누이가 잉태한 아이가 엄마의 입을 통해서 하는 말이다. 태어나기도 전에 이 정도인데 태어나면 어떻게 감당하랴.”
최고의 사상가가 목표인 구치라는 이에 대비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리고 열여덟 종류의 경전을 완전히 터득한 최고의 사상가가 되기 전에는 손톱을 깎지 않겠노라 맹세하였다. 긴 세월만큼 그의 손톱이 자랐고, 사람들은 그런 그를 장조長爪 범지라 부르게 되었다. 수많은 경전을 터득한 구치라는 힘센 코끼리처럼 빼어난 언변으로 여러 논사들을 무참히 굴복시키면서 여러 지방을 떠돌았다. 이제 세상에 남은 그의 마지막 상대는 오직 한 명, 누이의 태 속에 있던 아이뿐이었다. 고향인 마가다국 왕사성의 나라那羅 마을로 돌아온 구치라가 사람들에게 물었다.
“내 누이가 낳은 아이는 지금 어디 있는가?”
“보름 전에 석씨 종족 출신의 도인道人인 고타마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구치라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모든 논사를 굴복시킨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을 어미의 태 속에서 능가했던 아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제자가 된단 말인가?
구치라는 곧바로 고타마가 머무는 죽림정사로 찾아갔다. 왜냐하면 누이의 아들인 사리불의 스승을 굴복시키면 곧 사리불에게 저절로 승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조카 사리불은 고마타 뒤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구치라는 기가 막혔다. 최고의 성자 붓다라고 소문난 자가 새파랗게 젊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자신의 조카가 부채질이나 하고 있는 것 역시 못마땅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구치라는 한쪽에 앉아 젊은 성자 고타마를 노려보았다. 젊은 성자는 당당히 어깨를 펴고 눈빛을 낮춘 채 도무지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르고, 구치라가 입을 열었다.
“고타마여, 나는 그 어떤 견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당신은 어떤 견해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그 견해는 인정하십니까?”
구치라는 깜짝 놀랐다. ‘어떤 견해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의 견해로 인정한다면, 곧 ‘어떤 견해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 자신의 진술과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놓은 덧에 자신이 빠지고, 무서운 독을 가진 뱀이 제 꼬리를 무는 꼴이 된 것이다. 누구도 그를 이렇게 당황스럽게 한 적은 없었다.
구치라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다. 훌륭한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주인의 뜻을 알아차리는 법이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이 패배를 허락하지 않았다. 구치라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고타마여, 나는 어떤 견해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견해 또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젊은 성자가 말하였다.
“정말로 인정하거나 주장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시다면 뭣 하러 일부러 저를 찾아와 묻지도 않은 말을 저에게 던지셨습니까? 게다가 인정하거나 주장할 것이 아무 것도 없으시다면 무지한 범부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목소리 높여 자랑할 만한 건 아니지요.”
승패는 결정되었다. 화려한 수사로 덮으려 애써보았자 허물만 더할 뿐이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 틈을 헤집고 들어와 상처를 벌리고, 항복할 때까지 쓰라린 고통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자신이 남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젊은 성자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시비를 가리려 들지 않았다. 가볍게 눈을 내려뜨고 조용히 침묵할 뿐이었다. 그는 승부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에 감탄한 구치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젊은 성자의 발아래 정중히 절을 올렸다. 이 대화를 곁에서 들은 사리불은 그 자리에서 아라한이 되었고, 손톱을 길렀던 구치라는 그 후 부처님께 귀의하여 사문이 되었다.
세상에 좋은 말들이 넘친다. 치밀하고, 멋들어진 말들도 넘친다. 그런 말들을 소리 높이 외치면서 “여러분, 이래야 하지 않습니까!” 하고 소리 높이는 연사들도 넘친다. 하지만 그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나름 매우 공평하고, 객관적이고, 정의롭고, 마땅한 말들이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혹 탐욕과 분노의 에너지로 돌아가는 낡은 기계에서 새어나오는 매우 편파적이고, 주관적이고, 이기적이고, 부당한 소음은 아닐까?
똑똑하다면 돌아볼 일이다. 마하구치라처럼.
성재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해군 군종법사를 역임하였으며, 동국대학교 역경원에서 근무하였다. 현재 동국역경위원, 한국불교전서번역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계종 간행 『부처님의 생애』, 『청소년 불교입문』 집필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저서로 『커피와 달마』, 『붓다를 만난 사람들』, 『육바라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