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민
어릴 적 중식당에 갈 때면 식전에 따뜻한 차 한 잔이 먼저 나왔는데 꽤 향기가 좋았던 기억이 있다. 어른들은 그 차를 재스민차라고 불렀다. 나중에 그 차향이 기억나 재스민차를 구해서 보니 차통에는 말리화茉莉華 차라고 적혀 있었다. 말리화는 茉莉華라고 적거나 末利花라고 적기도 한다. 본래 이 단어는 중국 고유의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산스크리트어 말리카Mallikā에서 유래한 말이다. 말리카는 곧 재스민을 뜻한다.
그렇지만, 고대 인도에서도 재스민을 뜻하는 단어는 한둘이 아니었다. 별칭까지 포함하면 정말 수십여 가지나 되기 때문에 정확한 단어의 대상을 파악하기에 여간 골치 아픈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관습적으로 재스민이라고 부르는 식물 혹은 꽃은 수십여 가지나 된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장식적인 용도로 인도에서 많이 사용하는 재스민의 이름은 두세 가지 정도로 보인다.
그중에서 말리카(Mallikā, Jasminum sambac)나 말라티(Mālatī, Jasminum grandiflorum)는 재스민을 칭하는 가장 흔한 고대 이름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이 이름보다 재스민을 뜻했던 더 일반적인 이름이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수마나Sumanā이다. 한역 경전 속에서 말리화 등은 거의 이름이 없지만 수마나(蘇摩那, 修摩那, 須曼那, 須摩那 등)은 초기 경전부터 대승경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수마나는 대부분 말라티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말리카를 부르는 이름이었을 수도 있다.
말라카는 인도의 모든 종교인들에게 매우 친숙하며 일상적인 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꽃을 떠나서는 이들의 종교생활을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신상에 공양하거나 불상에 기도할 때도 이 꽃을 올린다. 결혼식에는 이 꽃을 엮어 만든 말리카 화환을 서로의 목에 걸어준다. 잔치에 가기위해 여인들은 몸단장을 할 것이고, 코코넛 오일을 바른 머리를 땋아 쪽머리를 할 것이다. 그다음 마지막 장식으로 말리카 화환을 쪽머리 위에 감아올린다. 만일 누군가 그 머리의 뒤쪽에 서 있다면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흰 꽃장식과 달콤한 재스민의 향기로 마음이 설렐 것이다. 사원 앞 아침 시장에는 전날 밤에 한 땀 한 땀 실에 꿰인 말리카 꽃바구니를 들고 나온 상인들로 북적이게 마련이다. 관광지나 사원 근처라면 여인들이 주저앉아 이 말리카를 실로 엮는 모습을 반드시 볼 수 있으리라. 힌두교인이건 불교도이건 사원이나 절에 갈 때 이 꽃다발을 들고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말리카는 꽃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사람 이름에 붙이기도 한다. 이 이름을 갖는 사람들은 그 꽃과 같이 향기로운 인품을 보이거나 직접적으로 그 꽃과 연관되었던 인물이었음을 우리는 경전 속에서 만나게 된다.
아마도 불교인들은 누구보다도 여인의 이름 말리카Mallikā가 훨씬 익숙할 것이다. 왕비 말리카를 대부분은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경 속에서 이 여인은 코살라국의 왕 프라세나짓prasenajit, 즉 파사익波斯匿 왕의 부인으로 등장한다. 파사익 왕은 잘 알려지다시피 부처님과 동년배로서 하루에도 몇 번씩 부처님을 찾아가 조언을 구할 정도로 매우 가까이 지냈던 왕이었으며, 죽을 때까지 부처님과 친분을 유지하던 왕이었다. 말리카는 이 파사익 왕의 본처에 해당하는데, 본래 이 여인은 귀족의 여인이거나 막대한 부호의 딸도 아니었다. 말리카는 그녀의 이름이 말해주듯이, 말리화를 키워 꽃다발을 만들어 파는 가난한 화원花園의 딸이었다. 필시 그 화원에는 말리카 꽃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의 이름 말리카는 나중에 붙여진 이름인데, 말리카는 굳이 풀자면, ‘재스민 여인’ 정도가 될 것이다. 신분이 낮고 가난한 여인이 어떻게 파세나디의 왕비가 된 것일까.
언젠가 파사익 왕은 아세 왕과의 전투에 패한 직후에 말리카가 있었던 화원을 지나칠 때가 있었다. 말리카의 목소리를 듣고 화원에 들어선 파사익 왕에게 말리카는 마실 물을 권하고 오랜 전쟁으로 지친 왕의 발을 씻겨주었다. 말리카의 마음씨에 감탄한 파사익 왕은 그 날로 그녀의 집에 마차와 보석을 보내 그녀를 왕비로 삼는다. 이 우연한 말리카의 인생역전을 부처님은 예견하고 있었는데, 바로 당일 말리카는 부처님을 마주치면서 공양을 올렸던 일이 있었다. 일찍 불교에 귀의한 말리카는 파사익 왕의 일생동안 그의 곁을 지키며 파사익 왕이 부처님에게 항상 자문을 구하도록 조언했던 왕비였다.
재스민 꽃을 떠올릴 때 우리는 말리카 외에 수마나sumana라고 불렸던 두 인물을 더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말한 바처럼, 수마나 역시 재스민 꽃을 뜻하는 이름이다. 부처님의 제자였던 아니룻다(阿那律)는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났는데, 당연히 자신의 제자를 미리 찾아낼 수 있는 혜안도 가지고 있었다. 부처님 당시 베나레스의 엄청난 부호는 자신의 후손을 이을 자식이 없어 걱정하고 있던 차에 아내가 임신을 하자 그녀를 위해 큰 저택을 지어준다. 아니룻다는 미리 그 장자가 불교에 귀의할 사람임을 간파하고 그를 찾아간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자신이 그 아이를 제자로 삼을 수 있도록 부탁한다. 아홉 달 뒤에 이 아이가 태어나는데 아이의 온몸에서 재스민 꽃향기가 진동했으므로 그 이름을 수마나라고 지었다. 아니룻다의 제자였던 수마나는 뛰어난 명상과 수행의 진보를 보이며, 후에 벽지불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또 다른 수마나 역시 그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재스민의 꽃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왕비 말리카의 경우와 같이, 수마나는 화원에서 꽃을 따다 파는 꽃장수였다. 그는 운 좋게도 빔비사라 왕에게 아침마다 일정한 양의 재스민 꽃을 바치고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 꽃장수는 길에서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처음 보는 인물의 온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는데 그 풍채에 감복되어 왕에게 전달할 꽃을 그만 부처님에게 바치게 된다. 그리고 그를 향해 던져진 꽃은 신비롭게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꽃은 허공에 멈춘 채로 부처님의 전신을 감싸며 그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다녔다. 수마나의 부인은 그가 왕에게 배달할 꽃을 전달하지 못한 죄로 죽음에 처할 것에 두려워했으나, 오히려 빔비사라 왕은 그 꽃장수에게 큰 재물을 선사한다.
재스민과 같이 향기로운 덕의 인품을 보인 이들은 모두 말리카, 혹은 수마나의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 셈이다.
몽구스
옛날 인도에서 몽구스는 대표적인 애완동물 가운데 하나였다. 인도에서 개는 불결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가까이 키우지 않았다. 최근에는 비교적 집안에서 키우는 경우가 상당히 늘었지만, 여전히 개는 대부분의 인도사람들에게 사랑을 독차지할 만한 동물이 아니다. 골목에서 음식물을 뒤지고 어슬렁거리는 원숭이나 멧돼지 등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동물인 셈이다. 집안에 들어오는 해로운 동물들을 쫓아주거나 이들을 잡아먹는 동물이 더 유익했기 때문에 몽구스를 가까이하는 것이 당연했다. 몽구스는 뱀과 쥐 혹은 전갈 등의 천적이었기 때문에 고대 인도인에게 훨씬 유용했다. 특히 집 안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는 코브라나, 곡식을 훔치거나 재물에 피해를 입히는 쥐를 쫓아줄 몽구스는 꽤 환영받는 동물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몽구스는, 마치 돼지처럼, 코브라의 독에 덜 민감했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코브라를 죽이거나 잡아먹을 수 있었다.
고대 인도인들에게 몽구스가 얼마나 친밀했던 동물인가는 인도우화집 『팡차탄트라Pañcatantra』에 등장하는 몽구스 일화를 보면 더 분명해진다. 이야기에 따르면, 데바샤르마의 부인은 젖먹이 사내아이와 몽구스를 함께 키우고 있었다. 부인은 자신의 아이와 똑같이 몽구스에게도 자신의 젖을 짜 먹였으며 목욕도 시켜주었다. 그러나 몽구스가 아이를 해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떨쳐버리지 못했다. 어느 날 물을 길어 가는 동안 부인은 남편에게 아이와 몽구스 둘을 잘 지켜보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남편은 배가 고파지자 먹을 것을 얻기 위해 탁발을 하러 나갔고 집은 비어있게 되었다. 빈집에 정적이 흐르는 동안 검은 뱀이 잠든 아이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몽구스는 자신이 동생과 같은 아이를 지키기 위해 힘껏 뱀과 싸웠고, 마침내 뱀을 조각조각 물어뜯어 죽여버렸다. 그리고 몽구스는 아이를 지켰던 자신이 자랑스러워 얼른 부인을 찾아가 자신이 한 일을 알리고 싶었다. 몽구스는 입가에 피와 살점을 묻힌 채로 우물가의 부인을 찾아 뛰어갔다. 그러나 부인은 몽구스의 입에 묻은 피를 보고 자신의 아이를 드디어 몽구스가 해쳤다는 생각에 물단지를 몽구스에 던져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부인과 남편은 아이와 그 옆에 죽어있는 뱀을 보고서야 비로소 몽구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페르시아와 유럽으로 건너가 몽구스가 여러 동물로 바뀌면서 변형되어 갔다.
몽구스와 뱀의 천적 관계는 고대 불교인들에게도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타카에는 이들의 적대적 관계가 적지 않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전적인 인도인의 동물 몽구스가 불교 속으로 들어온 것은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다소 잔인하게 생각되겠지만, 고대 인도인들은 돈주머니를 만들 때 몽구스의 가죽을 통째로 이용했는데, 몽구스의 형체가 가늘고 잘록했기 때문에 깊은 주머니를 만들기에 적당했던 것이다. 따라서 몽구스의 모습은 재물과 보화를 간직하는 주머니를 뜻하게 되었다.
초기 재물의 신이었던 인도의 신 쿠베라Kubera가 몽구스로 만든 돈주머니를 들고 있는 이유는 여기서 비롯된다. 쿠베라가 풍만하고 불룩한 배를 내민 채 손에 가죽으로 된 보석주머니를 들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보석주머니는 잘록하고 긴 모습을 하는데, 이 주머니를 대신해 때로는 몽구스를 손에 움켜쥐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쿠베라의 형상은 불교의 천신인 비사문천(다문천왕)으로 이어지며 다시 몽고와 티베트의 불교 신 잠발라Jambhala로 이어진다. 이들의 손에는 돈이나 보석을 토해 내는 몽구스가 들려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자에 따라서는 이 몽구스가 비사문천과 함께 등장하는 이유가 티베트 불교의 영향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몽구스의 생태를 고려해보아도 거의 근거가 없으며, 오히려 인도의 영향임을 더 분명히 말해줄 뿐이다. 몽구스와 비사문천이 결합되는 맥락은 인도적인 토양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심재관
동국대학교에서 고대 인도의 의례와 신화에 대한 연구로 석·박사를 마쳤으며,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인도의 뿌라나 문헌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필사본과 금석문 연구를 포함해 인도 건축과 미술에도 관심을 확장하고 있으며, 2006년부터 오스트리아, 파키스탄의 대학과 국제 필사본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인도 뿌네의 반다르카 동양학연구소 회원이기도 하다. 저서 및 역서로는 『탈식민시대 우리의 불교학』, 『세계의 창조 신화』, 『세계의 영웅 신화』, 『힌두 사원』, 『인도 사본학 개론』 등이 있다. 금강대학교 HK 연구교수, 상지대학교 연구교수로 재직했으며, 동국대학교와 상지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