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도 윤회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융통성 있게 해석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예를 들어 업에 따라 지옥, 아귀, 수라, 축생, 인간, 천상계에 나고 죽는다는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한 생에서도 지옥같이, 아귀같이, 수라같이, 축생같이, 인간답게 또는 천상의 신들처럼 사는 데 따라 이런 육도의 삶을 산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 좀 더 세련된 사고思考를 하는 이들은 순간순간 끊임없이 생멸하는 우리의 무상無常한 삶에서 실은 한 생에서도 아니 하루에도 수만 번 나고 죽는 윤회를 거듭한다고 보기도 한다. 옛 선사禪師들이 무릎을 탁 칠 이야기다.
미국 학생들은 윤회에 대한 유연한 해석에 대체로 시큰둥하다. 세련되지만 복잡한 해석은 단순 솔직한 사고방식을 선호하는 그들에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생에 걸쳐 이루어진다는 윤회를 현대인들이 믿기 어려워하니까 내놓는 구차한 변명이 아니냐는 미심쩍은 표정들을 짓는다. 그래서 학생들은 윤회와 관련되지만 좀 다른 질문으로 내게 또 도전한다.
“깨달아 열반에 들어 해탈하지 못하면 생사生死를 반복할 겁니다. 시간은 미래로 무한히(infinitely) 뻗어 있으니까 영원히 나고 죽겠지요. 그렇다면 윤회는 과거 언제 무엇에 의해 시작되었습니까? 기독교의 신과 같은 창조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불교에서 이 우주와 윤회의 시작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내 미국 학생들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확신하는 터라 내가 이 질문에 답변 못하리라고 확신하며 득의양양해 하곤 한다. 지금껏 들은 이야기가 하나님 이야기밖에 없다 보니 그렇다. 그러면 나도 함께 웃어주며 기독교 창조론에 가벼운 견제구를 던져 준다.
서양인의 상식으로는 모든 것에는 출발점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 성경은 태초에–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쯤에–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도 모든 것의 원인과 또 그 원인의 원인을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끝내는 그 스스로는 아무것에 의해서도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모든 운동과 변화의 시원始原이 되는 부동의 원동자(不動의 原動者, the Unmoved Mover)가 있다고 주장한다. 서양인들은 우주를 창조한 신이나 우주의 시작점을 말하지 않고 우주가 미래뿐 아니라 과거로도 무시(無始, from the beginningless time) 이래로 영원히 존재해 왔다고 보는 불교의 우주관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서양인 자신들의 세계관을 철저히 비판해 보지 않아서 다른 세계관의 가능성을 못 보기 때문에 그렇다.
서양인들처럼 신이 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런 신은 누가 창조했느냐는 질문이 논리적으로 요구된다. 다른 어떤 누구 또는 무엇이 신을 창조했을 리는 없다. 만약 신만 못한 것이 무한히 위대한 신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신성모독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1)신은 스스로를 창조했거나, 아니면 (2)신은 영원한 과거로부터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러나 (1)은 불가능하고 (2)는 불교적 우주관과 별 차이가 없다. 그 이유는 살펴보자.
(1)신이 과거 어느 시점에 스스로를 창조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신은 이 자기창조(self-creation)의 시점에 존재했거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a)신이 이미 존재했다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 창조될 수는 없기 때문에, 신은 스스로를 창조할 수 없다. (b)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무 것도 무無로부터 나올 수는 없기 때문에 (Nothing can come out of nothing), 신은 스스로를 창조할 수 없다. (a)와 (b) 이외의 다른 가능성은 없다.
그러므로 신의 자기창조는 불가능하다 (자기창조의 역설, the paradox of self-creation)이다. (2)신이 무한한 과거로부터–무시無始 이래로–언제나 존재해 왔다고 해 보자. 이 가능성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신 대신 이 우주가 무시無始로부터 존재해 왔다고 보는 불교의 우주관도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어서 기독교적 우주관과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1)과 (2)의 논의로부터 우리는 우주의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를 상정하는 불교의 우주관이 기독교의 창조론과 그 형이상학적 위상이 동등하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신이 무한한 과거로부터 언제나 존재했다는 주장이 수용될 수 있다면 신 대신 이 우주가 언제나 존재해 왔고 따라서 생사生死의 과정이 과거로 무한히 소급된다는 불교의 주장을 못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그래서 무한한 과거로부터 존재해 온 우주에서 조건이 모이고 흩어지는 생사 윤회의 과정이 무시無始 이래로 영원히 진행되어 왔다는 불교의 견해가 무한한 과거로부터 존재해 온 신에 의해 약 6,000년 전 쯤에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의 창조론과 동등한 수준의 설득력을 지녔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까지 말하면 합리적인 미국 학생들은 거의 모두 내 논점을 수긍한다. 내가 자기들의 기독교적 우주관을 공격하지 않고 불교의 우주관과 동등한 수준의 견해라고 살짝 올려 주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런데, 내 미국 학생들에게는 미안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우주에 어떤 시작점이나 출발점 또는 기반이 있어야 존재하는 것들이 움직이고 유지된다는 서양적 상식은 좀 너무 오래된 조야粗野한 생각이다. 시간이 과거로 무한히 소급된다면 현재가 어떻게 지탱되느냐는 질문도 가끔 받는데, 이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우주선이 지구에서 출발할 때는 마치 땅(출발점 또는 기반)을 향해 로켓을 분사해서 그 반동을 이용해 중력권을 탈출하는 것 같지만, 땅이 없는 우주 공간에서도 로켓을 뒤로 분사하면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앞으로 나아간다. 받쳐주는 기반 없이도 문제없다. 과거 서양인들은 지구가 어디엔가 고정되어 있어야 세계가 유지될 거라고 믿었지만, 허공 가운데 붕 떠 맹렬한 속도로 돌고 있는 지구 위에서 우리는 잘 살고 있다. 우리 몸도 이 살과 뼈를 붙잡고 있는 어떤 무엇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수없이 많은 소립자들이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며 서로의 인력에 의해 수십 년 동안 한 몸뚱이 잘 유지한다.
좀 촌스러운 서구적 상식에는 어긋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실은 연기와 공–관계와 변화–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불교적 상식과는 참 잘 맞아 떨어진다. 석가모니 부처께서 우리 존재를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몸과 네 가지 심리상태가 모여 있는 덩어리로 분석하셨는데, 이렇게 다섯 가지 다른 것들이 서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생멸을 거듭하며 수십 년 동안 모여 있는 상태가 우리의 삶이다. 그리고 또 이런 삶은 그런대로 충분히 살만하다. 영혼이나 아뜨만(참나) 같은 것이 있어야 우리의 제대로 된 삶이 가능하다는 서구적 (또는 비불교적) 관점은 나로서는 솔직히 좀 세련미가 없어 보인다. 불교의 이름 아래 잘못 가르쳐지고 있는 한국의 참나주의도 마찬가지로 지적知的으로 하나도 재미없다.
기독교적 우주관의 우월성을 증명하지 못해 좀 분한 내 미국학생들은 그래도 질 수는 없다고 또다시 질문한다.
“무시無始 이래 진행되어 온 윤회에 시작점이 없을 논리적 가능성은 이해됩니다. 그리고 깨닫지 못하면 앞으로도 윤회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깨달아 열반에 들어 해탈한다면 그는 어떻게 됩니까?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어디로 갑니까? 해탈한 자는 과연 존재합니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윤회의 끝은 무엇이고 어디입니까?
2,500여 년 전에 석가모니께 여쭤졌던 질문이 오늘날도 학생들에 의해 다시금 물어진다. 경전에 서술된 석가모니의 답변(response)에 대해 여러 해석이 가능하고 아직도 새로운 해설서가 계속 출판되고 있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방식의 해석을 선호한다.
석가모니는 열반에 들어 윤회로부터 벗어난 아라한이 존재하는 장소에 대한 질문에 대해 그 질문 자체가 지혜롭지 않다는 식으로 답변한다. 타오르던 불꽃이 꺼졌다면 그것은 동으로도, 서나 남 또는 북으로도 가지 않고 그렇다고 위 또는 아래로도 가지 않는다. 번뇌의 불길이 이제 꺼져 없어졌는데 그 불이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은 물어질 필요가 없는, 지혜롭지 못한 질문이다. 한편 석가모니는 깨달아 무루열반無漏涅槃에 든 아라한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한 물음도 모두 그런 물음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방식으로 대답한다. 무아無我의 진리를 터득해 열반에 든 아라한은 처음부터 자성自性을 가지고 실재實在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공空해서 실재實在한 적이 없다. 그런데 존재한 적도 없는 아라한이 열반에 든 다음 존재하느냐 않느냐를 묻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것은 마치 실재實在한 적이 없는 유니콘unicorn이 열반에 든 이후에도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질문이다. 지혜롭다면 물어서는 안 될 질문이다.
석가모니는 위에서 문제를 해결하려하기보다는 그 문제 자체를 해체함으로써 처음부터 문제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지혜로운 답변방식을 택했다. 서양철학에서는 20세기에 들어와 세기의 천재라던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에 의해 이런 문제 해체 방식이 시도되었다. 그도 훌륭했지만 부처님보다 25세기 정도 늦었다. 이토록 지혜로운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신 불자들은 복도 많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 교수와 함께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을 집필중이고, 불교의 연기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