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의 삶에서 서원(誓願)의 삶으로...]
화엄경에는 이 장엄한 세계가 모두 보현보살의 원력에서 나왔다고 설해질 정도로 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또한 보살은 서원으로 깨달음에 이른다고 말할 정도로 깨치는 데도 원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어려서 처음에는 욕심의 삶을 삽니다. 나만 알고 나만 중요한 줄로만 알아 무엇이든 내 입에 집어 넣고 무엇이든 나에게 가져오고 내 뜻대로 안되면 울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나 자아가 점점 발달하면서부터는 나만 아니라 남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청소년기에 이르면 조금씩 남을 배려하고 남의 입장에 서는 삶을 배우며, 마침내 성인에 이르면 남을 위해 사는 삶이 무엇인가도 조금은 알게 됩니다. 남을 위해 사는 삶---이것이 일반 용어로 말하는 서원의 삶이 될 것입니다.
욕심의 삶은 너무 고달픕니다. 처음에는 잘되는 것 같고 처음에는 즐겁기 그지없으나, 욕심의 삶은 날이 가면 갈수록 힘들어 지고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서원의 삶은 처음에는 비록 힘들고 미약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밝아지고 기쁨이 충만해 옵니다. 서원의 힘은 비록 보잘 것 없어 보이나 알고 보면 욕심을 훨씬 능가합니다.
모든 보살이 중생을 버리지 않고 생사의 바다에 뛰어 듦도, 그리고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어 일체 중생을 구제함도 모두 '서원의 힘'입니다. 고해에 허덕이는 저 숱한 어린 중생들의 모습에 자비심을 일으키고 보리심을 일으키어, 내 반드시 무상대도를 이루어 기어코 저 중생을 구제하리라! 라고 하는 서원을 일으키기에 일체 중생은 마침내 성불하는 것입니다. 정진도 인욕도 깨달음도 모두 '서원의 힘'입니다. 원력이 있는 분은 포기하지도, 좌절하지도, 지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생무변서원도'이며 '법문무량서원학'입니다.
원이 없이는 제 아무리 뛰어난 선근이라 하더라도 깨달음을 이룰 수 없으며, 원이 없이는 비록 수기를 받은 분이라 할지라도 성불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설사 어느 한 경지는 이를 수 있을지 모르나 일체 중생이 성불하는 원만한 깨달음은 끝끝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욕심만 가지고는 깨달음도 중생 구제도 모두 아침의 이슬이요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것입니다.
불자님들! 이제는 욕심의 삶을 떠나, 서원의 삶을 살 때가 되었습니다. 저 역시 지나간 삶을 되돌아 볼 때,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학교를 가고 공부를 하고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어 자식을 기르는 지금의 그 모든 것이, '나' 라는 욕심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삶이었음을 부끄럽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수없이 들었지만 저는 그토록 어리석었던 것입니다. 비록 아직도 욕심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헛된 명예와 안락을 쫓아 꿈처럼 안개 속을 헤메고 있긴 하지만, 이제는 서러운 욕심의 삶을 떠나 부처님의 밝은 삶으로 가고 싶은 생각, 간절합니다.
성철 스님은 '나는 잊고 오로지 남을 위해 사는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까지야 살기는 힘들겠지만(저 개인적으로는 남만을 위해 사는 삶 역시 건강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불자라면은, 나와 남, 우리 모두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은 욕심의 삶에서 서원의 삶으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온 중생이 번성하고 일체가 성불하며 행복해 지는 서원의 삶! 불자님들이시여, 다함께 그런 삶으로 우리 나아 가시지 않으시렵니까...
나무아미타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이 종린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