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사경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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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사경했을까
  • 박상국
  • 승인 2017.11.28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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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이제 사경 수행을 시작합니다

이제 사경 수행을 시작합니다

한국불교의 수행에서 사경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참선이나 위빠사나 등이 수행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듯합니다. 예부터 사경은 불자들의 신심과 원력과 공덕을 위한 가장 보편적인 수행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찰에서는 사경 수행을 잘 접하지 못하거나, 형식적인 의례 행위로 간단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사경이 어떤 의미를 주고, 사경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경 수행의 효과 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반갑게도 몇몇 사찰과 단체에서 사경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사경 수행이 어떤 전통으로 오늘까지 이어져왔고, 지금 한국불교계에서 어떻게 이어오고 있고, 불자들이 사경 수행을 일상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살펴봅니다. 

01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사경했을까  박상국
02    한국전통사경연구원 김경호 원장  김성동
03    대만의 대부분의 사찰이 사경당을 갖춘 이유  리뤼차
04    지금, 여기 사경 수행자들이 모였다  김우진

 

한국문화유산연구원 원장
박상국
 

내 지금 미래세가 다하도록 일념으로 서원誓願하노니, / 필사한 이 경전經典 파손되지 말기를 / 설사 삼재三災로 대천세계大千世界가 부서진다 하더라도 / 이 사경寫經은 허공처럼 파괴되지 말지어다. 만약 중생衆生들이 이 경經에 의지하여 / 부처님 뵈옵고 법문法門 들으며 사리舍利를 받들고 /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하여 용맹정진하고 / 보현보살普賢菩薩의 행원行願을 닦으면 곧 성불成佛하리라.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을 사성寫成할 때 황룡사의 연기 법사가 쓴 발원문이다. 당시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간절한 염원으로 불교경전을 필사하였던 것이다. 사경寫經이란 경전을 베껴 쓰는 행위와 베껴 쓴 결과물을 말한다. 불교는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실천 수행하는 종교이다. 불교경전은 부처님 말씀이고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 가운데 법보法寶로서 신앙 예배의 대상이 된다. 

|    신앙의식으로 행해진 사경

『법화경』 「법사품」에 “약왕이여 어디서든 이 경을 설하거나 읽거나 외거나 쓰거나 이 경전이 있는 곳에는 마땅히 칠보로 탑을 쌓되 지극히 높고 넓고 장엄하게 꾸밀 것이요, 다시 사리舍利를 봉안하지 마라. 왜냐하면 이 가운데에는 이미 여래의 전신이 있는 연고이니라.”라고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사경한 경전을 부처님 전신사리와 동일하게 설說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경전은 부처님과 동격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전을 부처님 사리와 같이 생각하여 불상이나 탑에 봉안했다. 불교경전은 법신사리法身舍利인 것이다. 

사경은 부처님 말씀을 한 자 한 자 옮겨 쓰는 행위이기 때문에 필사자는 부처님 경전을 제작하는 사람이며, 사경은 법신사리를 제작하는 행위다. 때문에 사경을 할 때에는 불상이나 탑의 조성 못지않은 지극한 종교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는 “법화경의 설법을 듣고 스스로 쓰거나 다른 사람을 시켜 쓰게 하면, 그 얻는 공덕은 부처님의 지혜로 헤아릴지라도 그 끝을 알 수가 없느니라.”고 하였다. 사경은 자신의 눈으로 경전을 보고 손으로 한 자 한 자 베껴 쓰는 작업인데, 경전을 읽는다든지 독경하는 것과는 다른 종교체험을 얻게 된다. 먼저 경전을 통해 부처님의 언어를 직접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되고 이어서 부처님과 일체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 사경은 수행의 일부분으로 정진하는 자세가 요구되는 일이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경전이 수입되었고 경전의 수입과 더불어 사경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당시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필사의 방법에 의해 유통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경의 역사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동안 사경은 인쇄술 발달 이전에는 경전의 유포를 위한 수단으로써, 이후에는 공덕 차원으로 이해했었는데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은 그동안 단절되어 몰랐던 사경 제작 의식을 알려 주고 있다. 이를 통해 사경이 그냥 단순하게 경전을 베끼는 작업이 아니라, 장엄하고 정성을 다한 신앙의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사경은 종이제작에서부터 경문經文을 필사하는 사람, 경심經心을 만드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등이 참여해 철저한 분업의 신앙의식으로 행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    삼국과 통일신라시대 사경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이 사신과 순도順道를 보내며 불상과 경전을 전했다는 기록을 초전初傳으로 공인하고 있다. 이때 순도가 어떤 경전을 얼마나 가져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뒤 374년에는 아도阿道가 왔으며 375년에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세웠다. 이렇게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경전의 보급을 위해서 경전의 필사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20년 후인 고구려 광개토왕 2년(392)에 평양에 9개의 사찰을 건립했다는 기록(『삼국사기』 권제 18 廣開土王 二年 秋八月 百濟侵南邊 命將拒之 創九寺於平壤)을 보면, 불교가 수입되면서부터 사경이 상당히 성행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따라서 불교경전의 필사가 빈번하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에서 삼국시대에는 불교경전의 유통을 위한 사경이 성행하였을 것이나, 역사적으로 수많은 내우외환으로 인해 이 시대의 확실한 사경이 한 점도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는 황룡사 구층탑 건립, 불국사 창건 등 불국토 건설이라는 국가적인 목표 달성을 위한 불사가 매우 성행했다. 『금광명경』, 『인왕호국반야경』 등 호국불교 진호국가 사상이 지배했던 시기이다. 통일신라가 망한 것이 과도한 불사 때문이라는 고려초 최승노의 상소가 있을 정도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는 한국사에서 불교 교학의 황금시대로, 당나라 불교에 비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였고, 일본 나라(奈良) 불교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 시대의 사경으로 통일신라 경덕왕 14년(755)에 연기 법사가 백지에 먹으로 쓴 『대방광불화엄경』 있는데, 이는 현존 세계 최고의 신역 『화엄경』이다. 이 『화엄경』은 자주색의 종이에 금니로 묘사한 변상도 2장이 함께 전해지고 있는데, 현재 국보 19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호암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사경의 제 10권과 제 50권 말미에는 각각 542자字와 529자로 된 발문이 있는데, 화엄사 창건자인 황룡사의 연기 법사가 아버지와 일체중생의 성불을 발원하여 754년에서 755년에 걸쳐 약 6개월 보름 동안 쓴 것을 알려주고, 사경 제작에 따른 의식절차와 제작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이 발문에 따르면 사경 제작에 필요한 종이를 제작하기 위해 닥나무 뿌리에 향수를 뿌리는 등 닥나무를 정성껏 키우며, 다 자란 닥나무 껍질을 벗겨 삶아서 사경할 종이를 만든다. 종이에 사경할 사람들인 지작백사紙作伯士, 경사필사經寫筆師, 불보살상필사佛菩薩像筆師, 주사인走使人 등은 모두 보살계를 받게 한다. 이 사람들이 만약 대소변을 보거나, 누워 자거나, 식사를 하거나 한 경우에는 향수로 목욕을 하게 한 후에 사경하는 곳에 들어가게 한다. 경을 쓸 때에는 청정하고 깨끗한 정의淨衣, 곤褌, 수의水衣, 비의臂衣, 관冠, 천관天冠 등으로 장엄한 자가 청의동자靑衣童子의 안내를 받아 이동하면, 네 명의 기악인이 일제히 기악을 한다. 기악인 각각의 사람들은 향수를 뿌리고, 꽃을 받들어 뿌리고, 향로를 받들어 인도하고, 범패를 부르며 사경할 이들을 인도한다. 경사필사들이 각각 향과 꽃을 받들고, 염불하면서 사경하는 곳에 이르면, 삼보에 귀의하고 세 번의 큰절을 하고 불보살에게 『화엄경』 등을 공양한 후에 자리에 올라 경을 필사한다. 필사를 마치면 경심經心을 만들고, 불보살상을 그리고 장엄하는데 이때는 청의동자와 기악인들은 빠지며, 마지막으로  경심 안에 사리를 1과를 넣는다.  

이어서 발원문이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이 사경을 발원한 연기 법사의 간절한 염원이 드러나 있다. 그는 이 발원문의 전반부에서는 이 사경이 영원토록 파손되지 말 것을 기원하고, 후반부에서는 중생이 이 경에 의지하여 열심히 정진하면 성불에 이를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경에 참여한 필사자, 경심장, 불ㆍ보살을 그린 화사, 경의 제목을 쓴 경제필사 등 사경에 관계한 19명에 대한 거주지, 인명, 관명 등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신라 사회의 신분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리고 권수에 자색의 종이에 금니를 사용하여 표지화를 그리고 그 이면에 경변상도를 역시 금니로 묘사하였다. 권축에 1과의 사리를 넣었고 권축의 양쪽에는 수정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이 사경은 돈황사경본보다 칙천무후자則天武后字의 사용 비율이 높아 한역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칙천무후자 연구의 보고寶庫이며, 현존 세계 최고의 『화엄경』 필사본이다. 또 지금까지 나온 어떤 종이보다도 뛰어난 종이라는 전문가의 평가가 있을 만큼, 이 사경은 통일신라시대 사경의 수준을 알 수 있는 매우 품격 높은 사경이다. 

      
|    고려시대 사경 

고려시대는 불교국가로서 신라의 사경과 인쇄술의 전통을 이어 받아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을 판각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금속활자를 발명하였던 시기였다. 고려시대의 사경은 백지에 먹으로 쓴 사경보다 금과 은을 사용한 금자경과 은자경이 성행하였다. 금과 은의 사용은 막대한 경제력과 신앙심이 전제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임금과 귀족들이 그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고려 중·후기에 들어오면서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경원은 물론이고 금자원, 은자원이 함께 설치되었고, 금·은으로 대장경도 여러 차례 사성하였다. 『고려사』 권1 고려세계高麗世系에 “작제건이 바위 가에 조그마한 길이 있는 것을 보고… (중략) 그 가운데 금자로 사경寫經하는 곳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먹이 아직 마르지 않았고 사방을 돌아보니 사람은 없었다. 작제건이 그 자리에 앉아서 붓을 들고 사경을 시작하는데 홀연히 한 여자가 와서 앞에 섰다.”라고 되어 있다. 작제건은 태조의 조부이다. 고려시대는 조부의 사경 설화를 고려사 첫머리에 내세울 정도로 불교국가였다. 현존하고 있는 고려사경 중에 가장 오래된 금자대장경은 고려 목종 9년(1006) 감지금니 『대보적경(大寶積經)』 권32가 전래되고 있다. 이 사경은 감지에 보상당초문의 표지와 권수의 보살입상은 은니로 묘사하였고 경전 본문은 금니로 되어 있다. 

명종 5년(1175)에는 민간에 만연되고 있는 사치 풍조를 금하면서 금은은 불상과 경전에만 사용하게 했던 점으로 보아 불상과 사경을 위한 용도에는 제한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충열왕은 즉위하면서 은자대장경을 사성하였고 그 뒤에 또 금자대장경을 사성하였다. 충렬왕 원년(1275)에 감지에 은으로 쓴 『불공견색신변진언경』권13, 4년(1276)에 감지에 은으로 쓴 『문수사리문보리경』,  6년(1280)에 감지에 은으로 쓴 『보살선계경』(보물 740호), 10년(1284)에 감지에 은으로 쓴 『현식론』 등이 전해지고 있다. 금자대장경으로는 1284년에 사성한 감지금니 『불설잡장경』과 1285년에 쓴 『묘법성념처경』이 전해지고 있다. 충렬왕의 맏아들인 충선왕은 왕자 시절에 이미 삼대장소三大藏所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있어 충렬왕 때는 사경원, 금자원, 은자원 등 세 곳에 사경승들이 상주하면서 사경을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충선왕은 금은대장경을 2부 사성하고 먹으로 대장경 50부를 사성하였다. (『익재난고』 권9) 이때의 금자대장경으로 1319년에 사성한 『섭대승론석론』 권3과 『불설불명경』 권10이 남아 있다.

언제부터 사경원이 생기고 금자원과 은자원이 생겼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11세기에는 사경원이 생겼고, 그 후에 금·은자 대장경 사성을 위해 금·은자원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고려의 뛰어난 사경기술은 원나라까지 알려져 원나라에서 사경승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기도 했다. 고려시대는 국왕들의 사경에 대한 유별난 신앙으로 한동안 임금이 보위에 오르면 경쟁하듯이 금·은자 대장경을 제작하였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고려 사경을 통하여, 그 당시 찬란했던 사경문화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조선시대의 사경

조선 초기의 사경은 고려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져왔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배불 정책을 세웠으나 불교에 대한 개인의 신앙은 어쩔 수 없었던 듯 건국 경축 사업으로 대장경을 찍어내고 금과 은으로 사경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조선 초기부터 금과 은의 사용 금지와 대신들의 끊임없는 배불 상소 등으로 조선 왕실에서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경마저도 쉽지 않았다. 전문 사경승들도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고, 중후기에 오면서 고려시대에 비해서 자연히 그 양이나 질에 있어서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경전판각을 위한 사경불사와 수행을 위한 사경은 지방 사찰을 중심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경으로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사경의 양도 얼마 되지 않는다. 이 시기의 사경으로는, 1415년 유근柳謹의 부인 이 씨가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발원하여 백지에 묵서한 『묘법연화경』(보물 278호), 효령대군의 시주로 1441~1486에 백지에 먹으로 쓴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과 『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보물1247호), 상원사 문수동자상에서 나온 『백지묵서제진언白紙墨書諸眞言』(보물 793호), 1622년 인목대비에 의해 필사된 『금광명최승왕경』등이 전래되고 있다.

경전을 필사하는 행위는 엄격한 신앙의식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물인 사경은 적극적인 자기 수행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사경 공덕은 내놓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사경하는 사람에게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다. 자신이 사경하는 것뿐 아니라 남을 시켜 사경하게 하는 일도 공덕을 쌓는 일이다. 사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새기고 익혀 실천하는 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으며 부처님 말씀을 한 자 한 자 정성껏 베끼는 순간은 진실된 자기 삶의 시간이 된다. 그러므로 전통 사경은 진실한 삶을 영위하신 선조들이 부처님 말씀을 자신의 가슴에 새기며 써내려간 종교적인 수행의 과정과 문화 예술의 높은 경지를 후손들에게 보여주는 가장 값진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박상국
문화재청 관리국 국립문화재 연구소 예능민속실장과 동산분과 문화재 위원을 거쳐 지금은 한국문화유산연구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사경』, 『전국 사찰 소장 목판질』, 『동산 문화재 지정 보고서』등의 책을 냈으며, 해외전적 문화재와 일본에 있는 고려대장경을 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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