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의 끝이 노랗다. 벼 끝도, 감 끝도 노랗고, 대추 끝은 붉다. 밤은 익어 벌어지고, 은행잎은 가에만 둥글게 물들었다. 저것이 감인지, 밤인지, 대추인지, 그것은 봐야 안다. 눈길이 맨 먼저 닿는 곳은 끝이다. 가운데가 아닌 가장자리가 사물의 윤곽을 잡아준다. 제주도가 풍덩 빠져버릴 만한 거대한 호수 한가운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바다인지, 호수인지, 강인지 알 수 없다. 가를 봐야 안다. 사물의 테두리, 끝부분, 가장자리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바닷가를 봐야 바다를 알고, 호숫가를 봐야 호수를 알고, 강가를 봐야 강을 안다. 눈길이 사물의 가에 닿아야 안다. 가 닿음, 농부철학자 윤구병 선생은, ‘깨달음’의 어원을 ‘가닿음’으로 설명한다. 우리의 눈길이 잔의 끝에 가 닿을 때, 아 저것이 잔이구나 하고 깨닫는다. 깨달음은 대오견성도 깨달음이지만, 저것이 산봉우리이고, 무지개고, 이 사람이 나를 낳아준 어머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도 깨달음이다. 위봉사 가는 길에 아름다운 터널을 이룬 벚나무 고목의 잎이 지고, 들의 끝이 노랗게 변하는 것에 눈길이 가 닿아,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고 나는 깨달았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다. 가운데도 없고, 가생이도 없으니, 가 닿을 데가 없다. 그런 것은 위봉사 스님한테 물어봐야 한다.
추줄산崷崒山 위봉사威鳳寺, 한자가 어렵다. 추줄은 높고 험하다는 뜻이고, 위봉은 봉황이 절터를 에워싸고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서쪽으로 너른 김제의 들을 지나, 이제 땅이 융기하여 노령지맥을 이루고, 북으로 백두대간에 가 닿는 장대한 산맥의 초입에 위봉사는 부처님 손바닥마냥 옴막하게 들어앉아 있다. 백제 무왕 5년(604) 서암 대사가 개창하여, 고려의 나옹, 조선의 석잠 대사가 중건 중수하고, 구한말에 31본산의 하나로 대가람을 이루었으나, 역시 한국전쟁의 난리를 피하지 못하고 절은 쇠락했다. 그 폐사 직전의 천년가람을 다시 일으킨 사람들이 현재의 주지 법중 스님을 비롯한 비구니스님 여섯이다.
1988년 당시 전라도에는 비구니 선원이 없었다. 그래서 전문 선원을 세우기로 발원하고, 고찰의 터, 물은 풍부하되 계곡이 없어 관광지가 아닌 곳, 바람이 잦아드는 땅을 찾다가 인연 따라 이곳 완주 위봉사로 들어온 것이라고 입승스님(立繩, 승은 노끈이다. 줄을 바르게 긋는 데 쓰는 먹줄, 즉 척도다. 선원의 기강을 맡은 소임이다. 스님은 법명을 알려주지 않았다.)이 말했다.
“여기, 풀이 사람 키를 넘는 폐허였지요. 한 3년을 땅에 붙어살았어요. 정진하고 공양하는 시간에만 여섯이 모이고, 뿔뿔이 흩어져 일만 했어요. 하루를 살더라도 평생 살 것처럼, 평생 살더라도 내일 떠날 것처럼, 그런 생각으로 살았지요. 일은 우리가 하고 뒤는 부처님이 봐주시는 거요. 뜻을 세워 일이 앞서니 돈은 뒤따라 오더라고요. 벌써 30년이 흘렀네요.”
그해 겨울 안거를 시작으로 여름 겨울 안거, 봄 가을 산철결제를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지금은 안거마다 비구니스님 20여 명이 방부를 들이는 짱짱한 선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비스듬히 가을빛이 드는 창밖은 정갈했다. 전쟁 통에도 살아남은 조선의 팔작지붕 보광명전(보물608호)이 고아한 멋을 풍기고, 비뚤비뚤한 5층 석탑, 품이 넓은 소나무 한 그루, 관음전, 나한전, 극락전, 위봉선원 같은 당우들, 옛것과 새것들이 오래전부터 함께 있었던 것처럼 잘 어울려 있다. 입승스님은 작고 단단하고, 맑고, 풀 먹인 삼베처럼 까슬까슬하고, 평생을 선방에서 보낸 선승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비구니스님 발원 중에 내생에는 비구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있지요? 불교에서 남녀는 어떻게 다른 건가요?”
“같다고 할 수도 없고 다르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 발원이 우열의 문제라기보다는 빈부와 귀천, 강약처럼 조건이 다른 거지요. 비구니가 산속에 살면 불편과 제약이 많이 따르잖아요? 용맹정진하여 한 세상 깨쳐 보려면, 체력도 좋고, 근기도 강해야 하는데, 암만해도 비구 몸이 낫다 그런 뜻이지요. 본질적으로는 다르다고 할 수 없어요. 관세음보살을 보세요. 머리가 길고, 백의를 걸치고, 자비로운 어머니상에, 그런데 수염을 기르고, 양성성을 동시에 갖고 있잖아요? 진리에 다가서는 데 남녀가 따로 있을 수 없지요.”
“스님, 30년 선승으로 늘 안거를 하시는데, 금년 하안거와 작년 동안거는 다릅니까?”
“허, 참 고약한 질문이네요. 그것을 죽 떠먹은 자리라고 하지요. 나는 서울을 비행기 타고 못 가봤어요. 걸어서 가고 있는 중이지요. 한 걸음 한 걸음, 이미 난 길 따라서 천천히, 그렇게 타고 났으니 느릿느릿 가는 거요. 화끈하게는 못하지만 끈질기게는 합니다. 큰스님들이 나 같은 사람에게 그래요, 장판 때가 반질반질하다고. 맨날 앉아 있으니 그 자리가 반질반질하지 않겠어요? 죽 떠먹은 자리에 자국이 남나요? 맨날 그 모양이라고 나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믿는 것은 오직 하나, 『초발심자경문』의 한 문장입니다. ‘약능신심불퇴 즉 수불견성성불若能信心不退 則 誰不見性成佛’, 물러서지만 않는다면 어찌 견성성불하지 못하리오.”
“스님, 해마다 두 숟갈씩 떠먹었다 하더라도, 죽을 30년 드셨으면 남은 것도 없겠습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이란 빈 그릇 같은 것이겠네요.”
“허허, 아직 안 가봐서 모른다니까요.”
비구니스님 절이고, 선원이라 더 조심스럽다. 거기서 재워 달라고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우리는 전주 나가서 자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다시 올라왔다. 벌써 예불과 아침 공양이 끝나고 마당을 쓴 비질 자국이 남아 있다. 총무 소임을 맡고 있는 지원 스님이 차와 과일을 내어준다.
“주지스님이 늘 하는 말씀이 그거예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 받은 시주 함부로 쓰면, 그 집 가서 소 노릇 하려고 그러느냐고 하시죠. 그러면서 당신 상좌이거나 아니거나 차별을 두지 않고, 일도 늘 먼저 나섭니다. 우리가 논농사는 안 짓지만 나머지는 다 손수 지어 먹습니다.” 비닐하우스가 여섯 동이나 있다고 해서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냐고 물었더니, “깻잎 생강 무 배추 상추 꽈리고추 아삭이고추 우엉 근대 아욱 토란 감자 오이.” 하고는 끝이 없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혹은 선농일여禪農一如 그런 건가요?” 하고 물었더니, 그냥 웃고 만다.
위봉사 산내암자인 태조암에 들렀다. 이성계가 기도한 곳이라 해서 태조암이다. 숲길을 한참 걸어 암자에 도착했더니, 비구니스님 한 분이 살고 있다. 암자 마당 너머로, 점점 희미해지는 먼 곳까지 산들이 겹겹이 늘어서 있고, 거기에 안개가 흐르는 풍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스님에게 합장하고, 여기 사신지 얼마나 되셨느냐고 물었다.
“10년쯤 됐나, 선방스님들이 포행 나들이를 가끔 오고, 멧돼지도 오고, 노루도 오고.”
“스님, 10년을 이런 곳에서 홀로 살면, 그냥 살기만 해도 깨달음을 얻겠어요. 그러니 스님은 분명히 깨달으셨겠네요?”
“머라카노? 이런 경우를 머라카노? 황당하다카나? 나보고 깨달았다 카믄, 처사는 진즉 깨달았겠네. 저 앞에 나무 봐라, 나무가 얼마나 자랐는지, 작은 것이 큰 것을 알 수 있나? 큰 것이 내려다보고 작은 것을 아는 기지.”
나는 친해 보려고 그랬는데, 죽비로 한 대 맞은 것처럼 말문이 딱 막힌다. 스님이 나를 쳐다보더니 웃으면서 덧붙인다.
“겨울이었을까? 하루는 새벽에 나왔더니, 발아래 저 멀리까지 운해가 가득해. 그 사이로 산봉우리들만 솟아 있는데 꼭 섬처럼 보이는 거라, 진짜 여기가 산인지 바다인지 모르겠더라고. 또 한 번은 장대비가 그친 여름일 거야. 저기 저 멀리 희미하게 산 끝이 보이제? 거기서 암자 뒷산 꼭대기까지 무지개가 쫙 펼쳐져 있는 거라. 그것도 쌍무지개가. 내 평생 살면서 그런 거 처음 봤다.”
나는 무지개는 못 보고, 반원을 그리는 스님 손가락만 봤다. 그 손짓, 그 눈빛, 그 표정, 눈가에서 입으로 번지는 미소,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마루에 앉아 초가을 아침 볕을 쬐고 있는 스님 모습이, 원래 거기 있었던 오래된 나무 한 그루 같다. 그것은 내가 만난 그 어떤 것보다 맑고 향기로운 것이었다.
•지난 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높이를 ‘1.2m’에서
‘18.2m’로 바로잡습니다.
이광이
전남 해남에서 1963년에 태어났다. 조선대, 서강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산과 절이 좋아 늘 돌아다녔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를 더욱 가까이 하게 됐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을 하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