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역자 | 원철 | 정가 | 15,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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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 2017-07-10 | 분야 | 문학에세이 |
책정보 |
판형_141*270mm|두께_1.6cm|272쪽|4도|ISBN_978-89-7479-349-4 (03810) |
절판되어 헌책방에서 구해 읽어야 했던
원철 스님의 첫 산문집
출간 10년 만에 새얼굴로 다시 만나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의 원철 스님. 산중의 스님을 문장가로 세상에 ‘노출’시킨 책은 10년 전 펴낸 첫 책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이다. 학승으로서 한문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하며, 수년 간 틈틈이 쓴 글을 한 데 묶은 이 책은 출간 당시 큰 사랑을 받았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체, 종교적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불교적 가치를 자연스러운 일상의 지혜로 풀어낸 점, 무엇보다 법정 스님 이후 불교와 우리 사회를 잇는 또 한 명의 ‘스님 작가 탄생’이란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 뒤 스님의 첫 책은 이런저런 이유로 절판이 되고 얼마 후 완전히 품절되었다. 그동안 스님은 여러 권의 책을 펴냈으며, 세상을 향한 스님의 메시지 역시 변함없이 간결하고 분명했다. 한편 글쟁이로서 명성이 높아지면서 스님의 첫 책을 찾는 이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헌책방에서 어렵게 구해 읽어야 하는 ‘고서 아닌 고서’ 대접을 받았고 마침내 재출간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오래 묵을수록 좋은 것은 ‘읽을 만한 작가의 글’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글은 세월이 흘러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가 바로 그런 책이다. 구성과 소제목을 정리하고 이우일 작가의 그림으로 새롭게 단장한 이번 책에서도 스님의 글은 여전히 우리를 솔깃하게 한다.
1986년 해인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은해사 실상사 법주사 동국대 등에서 대승경전과 선어록을 연구하며 번역과 강의를 통해 한문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해왔다. 〈월간 해인〉 편집장을 맡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일간지와 여러 종교매체에 전문성과 대중성을 갖춘 글을 쓰며 세상과 소통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요 저서로 《선림승보전》 등의 번역서와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 《스스로를 달빛 삼다》 등 몇 권의 산문집을 출간했다.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해인사승가대학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연구실장으로 있다.
여는 글 리뉴얼, 낯설지 않은 새로움
1 인생, 꿈인 줄 알면서도 몸부림쳐 보는 것
밥뜸이 잘 들기를 기다리는 마음 | 방외지사의 멋 | 짚신스님 | 소크라테스의 아내 | 봄과 겨울, 열매와 씨앗 | 눈 내리는 아침 차 끓이는 소리 | 혜월 선사의 셈법 | 부처님은 왜 죽은 아이를 살리지 않았을까 | 인생, 꿈인 줄 알면서 몸부림쳐보는 것 | 우리는 정말 ‘함께’ 잘 살고 있는가 | 단옷날 부채 단상 | 비우고 비우니 꽃이 피다 | 기억과 기록 | 도시 유목민 | 자동차 안에서 미륵을 만나니 | 사람을 아끼고 가꾸고 키우는 일 |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 구법여행과 관광 유람
2 잘못 놓인 그릇엔 물이 고이지 않는다
앞만 보는 담판한 |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 허리 층의 고뇌 | 행자에게 | 삼보일배 | 새벽형 인간 | 광고지 한 장 받아주는 일 | 그릇에 따라 고이는 비의 양이 다르니 | 머묾과 떠남 | 출가인가 가출인가 | 등불을 들고 종로 거리를 차지하다 | 바람이 흔들리는가 깃발이 흔들리는가 | 가야 할 길만 가라 | 삼 때문에 금을 포기하는 어리석음 | 새해 수첩 | 세상과 청산은 어느 것이 옳은가 | 내면의 뜰
3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을 전하다
스님의 여름휴가 | 마애불의 천 년 침묵 | 삼천배와 백팔배 | 파스칼의 갈대 화왕산의 억새 | 문지방 법문 |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다 | 바늘 한 개 용납하지 않겠다 | 남에서 구름이 일어나니 북에서 비가 내리네 | 성철 스님의 가르침 | 몽중 가피 | 해인사 극락전에 앉아 | 바르게 듣고 바르게 보는 법 | 꽃도 너를 사랑하느냐 | 호떡과 호빵 사이에서 | 대나무를 쳐서 크게 깨닫다
4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
얼굴 가난만큼 서러운 게 없다 | 새벽 서울거리를 걷다 | 강남 귤 강북 탱자 | 열반송 | 나무, 뒷사람에게 모범을 보이다 | 고샅길에서 마주친 능소화 | 생일,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날 | 한 그릇의 밥 | 위기가 닥치면 경전을 외워라 | 나의 혀는 절대 타지 않으리 | 부처님이 남긴 이십 년의 그늘 | 두 줄기 눈물 | 길은 없다, 절박하고 간절하게 | 죽은 사람의 뼈를 표지판으로 삼다 | 다비장의 불길 | 언제나 흐르는 강물처럼
추천의 글
원택 스님(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 이선민(〈조선일보〉 선임기자) | 김선우(시인) | 조현(〈한겨레신문〉 기자)
후기를 대신하여
절판되어 헌책방에서 구해 읽어야 했던
원철 스님의 첫 산문집
출간 10년 만에 새얼굴로 다시 만나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의 원철 스님. 산중의 스님을 문장가로 세상에 ‘노출’시킨 책은 10년 전 펴낸 첫 책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이다. 학승으로서 한문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하며, 수년 간 틈틈이 쓴 글을 한 데 묶은 이 책은 출간 당시 큰 사랑을 받았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체, 종교적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불교적 가치를 자연스러운 일상의 지혜로 풀어낸 점, 무엇보다 법정 스님 이후 불교와 우리 사회를 잇는 또 한 명의 ‘스님 작가 탄생’이란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 뒤 스님의 첫 책은 이런저런 이유로 절판이 되고 얼마 후 완전히 품절되었다. 그동안 스님은 여러 권의 책을 펴냈으며, 세상을 향한 스님의 메시지 역시 변함없이 간결하고 분명했다. 한편 글쟁이로서 명성이 높아지면서 스님의 첫 책을 찾는 이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헌책방에서 어렵게 구해 읽어야 하는 ‘고서 아닌 고서’ 대접을 받았고 마침내 재출간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오래 묵을수록 좋은 것은 ‘읽을 만한 작가의 글’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글은 세월이 흘러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가 바로 그런 책이다. 구성과 소제목을 정리하고 이우일 작가의 그림으로 새롭게 단장한 이번 책에서도 스님의 글은 여전히 우리를 솔깃하게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마른 뼈다귀를 씹는 심정으로 쓴 글
수행자에게 삶은 구도의 대상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누구보다 고심하는 것이 수행자의 의무이다. 원철 스님의 글은 치열한 자기 성찰에서 길어 올린 글이다. 후기에서 스님은 “마른 뼈다귀를 씹는 마음으로, 마른 수건을 짜듯 한줄 두줄 써내려갔다”고 밝히고 있다. 수행자가 삶이란 날로 비우고 버리는 것이지만, 글쓰기는 날로 더하고 쌓아가는 것, 이러한 극과 극의 ‘비우기와 더하기’ 사이에서 스님은 타협하고 갈등하며 꼭 담을 것만 글로 옮겼다. 아름다움, 비움, 지혜, 마음, 수행, 땀, 부富, 무소유……에 대한 이야기들. 절제된 표현, 적절한 인용, 촌철살인 문장 등 담백한 문장 속에 녹아 있는 삶의 화두는 ‘지금의 나는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도록 한다.
중도의 지혜가 풀어내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화두
경제적으로 풍족해진 만큼 우리 사회의 행복 지수는 높아졌을까. 우리나라가 전 세계 자살 순위 4위라는 수치는 절망적이다. 이런 통계 앞에서 우리는 묻는다. 삶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삶에서 추구하는 것, 얻고자 하는 것, 꿈꾸는 것들은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 믿음은 옳은가. 이런 의심에 대해 이 책은 답한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믿음을 의심해보라는 것. 어쩌면 극단의 사고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극단의 사고란 ‘절대적으로 믿는’ 것이다. 의심 없는 믿음이다. 의심은 곧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 곧 중도中道이다. 중도는 이쪽과 저쪽의 가운데가 아니다. ‘가운데도 줏대가 있어야 한다’는 스님의 말처럼 내가 가진 수많은 생각들을 의심하고 점검하며 나아가려는 자세가 바로 중도이다. 가령 휴가는 반드시 산이나 바다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집에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불행해지고 만다. 산이건 바다이건 방구석에서건 언제 어디에서나 마음을 쉴 수 있다면 그것은 중도적 지혜를 발휘하는 셈이 된다. 또 생일을 축하받아야 할 날이라고 생각하면 혼자 지내는 나는 가여운 존재가 되어버린다. 본문 중에 생일에 대한 이런 글이 있다. “태어남이 제대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선 태어났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그 이후 삶의 궤적을 얼마나 더 의미 있게 만들어 가느냐에 달려 있다.” 생일을 앞으로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갈 다짐을 세우는 날이라고 기억한다면, 누군가의 축하 인사 정도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이 책에는 이러한 중도의 지혜가 그득하다. 고정된 것을 의심하고 변화하려는 것이야말로 삶을 잘 살아가는 비결이다.
삶은 어디에 누적되는가
틈틈이 갈고 닦은 마음이 얼굴에 담긴다
중도의 삶은 머물지 않고 새로워지는 데 있다. 인생의 의미 또한 어제보다 나은 삶을 사는 데 있다. 날마다 좋아지는 삶은 자기반성과 성찰로 이뤄진다. 스님은 “자기반성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인 동시에 수행의 한 방편이다. 세 치 혀의 화려한 수식어로 남이야 수백 명도 속일 수 있지만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는 없다. 반성적 사고가 계속되면 이기심이 지혜로 바뀌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스님은 날마다 참회문을 읽고 새벽에 일어나 백팔배를 한다. 욕심을 차단하기 위해 다락방을 막아버리기도(물건을 쌓아두게 되므로) 한다. 이러한 반성적 습관은 곧 삶의 업그레이드로 이어진다.
성찰의 시간은 어디에 누적되는가.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라는 말이 있다. 살아온 세월이 얼굴에 담긴다. ‘면상面相’보다는 ‘심상心相’이다.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이들의 얼굴은 누구나 한눈에 알아보는 법이다. 인생을 살면서 변해가는 얼굴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순간순간 인생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마음의 뜰을 비우고 가꾸고 길들이면,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에 아름다운 얼굴 하나 떠오른다. 결국 수행과 삶은 같은 말이 아닌가.
지나온 삶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하겠는가
“하루하루 아름다워지는 당신이 얼굴 부자!”
● 아침마다 맑은 물로 세수하며 마음을 들여다보라
● 방 한 칸 정도는 완전히 비워 텅 빈 충만의 여유를 가진다
● 생일은 태어남의 의미보다 다시 태어나는 날로 삼는다
● 사람에게는 물이지만 물고기에게는 공기다. 상대적으로 보라
● 습관을 업그레이드하라.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 때로는 용감하게 대열을 이탈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보라
● 자존심, 기득권, 명예를 과감히 버려야 할 때가 있다
● 사람을 아끼고 가꾸고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
● 무소유의 끝은 버리는 데 있지 않고 베푸는 데 있다
● 아무리 불이라고 외쳐도 종이를 태울 수 없다. 제대로 실천하라
위로
맛있는 밥은 ‘잘살이’다. 하지만 그 밥맛의 완성을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의 여유는 ‘참살이’다.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 당장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길 바라는 인스턴트 시대에, 이 식당은 기다려야 함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수행 현장이다. 그 이후 마지막 뜸 들이는 과정의 시간까지도 덤으로 고명처럼 얹어준다. 기다림 후에 나온 따뜻한 밥 한 그릇을 통하여 ‘잘살이’에서 ‘참살이’로 나아가는 전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비한다면, 수업료 몇 천 원과 인내의 시간 몇 십 분은 결코 비싸거나 긴 것이 아니다. (24쪽)
번뇌란 근본적으로 뜨겁다. 출세나 명예 그리고 부를 향해 치달리는 세간에서는 늘 마음이 들끓기 마련이다. 그 뜨거운 번뇌를 한 잔의 뜨거운 차로 잠시 식힐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차를 제대로 마시고자 하는 이는 좋은 물과 차를 얻는 데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그것도 또 하나의 번뇌이긴 하지만, 이를테면 번뇌로 번뇌를 제거한다고나 할까. 덧붙여 차의 나뭇가지가 가늘고 작다고 할지라도 열매가 맺힌다는 의미인 ‘명가유실리茗柯有實理’는 설사 외형이 허술할지라도 그 내면은 충실해야만 하는 이즈음 세태에 가장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명언으로 제격이다. (38쪽)
종교는 중생의 잘못된 욕망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 기여해서는 안 된다. 중생에게 욕망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게 함으로써 그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 중생의 욕
망에 영합하여 종교까지 물질적 이익의 충족을 위한 도구가 되게 한다면, 이는 스스로 종교의 고유 영역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빚게 된다.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아들을 살려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를 깊이 헤아려야 한다. 현상계의 실상을 제대로 보게 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바른 안목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44쪽)
다락방이 있었는지 계단과 천장을 봉한 흔적이 있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철저하게 무소유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다락이라는 빈 공간이 있으면 뭔가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별 필요 없는 허드레 것이라도 쌓아두기 마련이다. 미리 그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락방을 없애버린 것 같다. 조금 손을 보면 다시 다락방을 살릴 수도 있었지만, 나 역시 그 스님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스승인 셈이다. (55쪽)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줄어드는 것’이라고도 했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하며 비분강개하다가도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타협하는 자비심 아닌 자비심이 많아졌다. 이제 건망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래, 잊어버릴 나이도 됐지. 그 많은 시시콜콜한 것을 모두 기억하려면 얼마나 머릿속이 복잡하겠어? 그래! 텅 비워라. 그게 지혜롭게 사는 길이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모든 것에 조금은 담담해졌다. (58쪽)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와 미래는 생각 속에만 있는 것이지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 현재라는 이름의 찰나 찰나의 시간 연결 속에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될 때 저절로 과거와 미래는 빛난다. 그 사람의 과거를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의 현재를 보면 된다. 그 사람의 미래를 알고 싶어도 그 사람의 현재를 보면 된다. 과거의 결과가 현재이며 현재의 결과가 미래이기 때문이다. (72쪽)
납월 삼십일을 한 인간의 삶의 연장선 속에서 적용할 때 그건 임종의 날을 뜻한다. 즉 목숨이 다하는 그날을 말한다. ‘납월 삼십일 염라대왕을 맞이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선사들은 후학들에게 서릿발같이 묻곤 했다. 그것은 죽음 앞에서 그동안 닦아온 수행의 살림살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준열한 꾸중이었다. 납월 삼십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중생적 삶의 끝이 라는 의미가 더해진다. 끝은 끝인데 생물적 삶의 끝이 아니라 중생사고衆生思考라는 정신적 틀이 깨지는 날이다. 즉 생사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깨침의 날이라는 의미로까지 확대된다. (130쪽)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사는 공간의 구역이 분할되면서 용도가 고정되기 시작했다. 침실에서는 잠만 잔다. 거긴 늘 이불이 펴져 있다. 주방은 밥만 먹는다. 거기에는 항상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다. 거실엔 큰 소파와 대형 텔레비전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물론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서 일어난 일이다. 그러다 보니 한 사람이 차지하는 평균면적이 날로 늘어난다. 그것도 대부분 공간을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 차지한다. 그 때문에 집을 짓고 또 지어도 계속 모자란다고 아우성이다. (135쪽)
보자기는 접어두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자기를 위한 공간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기 모양이 없기 때문에 어떤 모양이라도 다 만들 수 있다. 양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두루 통한다. 그래서 보자기는 그 자체가 ‘공空’인 까닭에 천변만화千變萬化가 가능한 것이다. 긍정적 보자기 사고마저 날로 가방 사고로 고착되어가는 세태 속에서 등장한 ‘보자기 가방(크로스백팩)’은 또 다른 종합적인 지혜를 보여준다. (137쪽)
몸은 도심 속에 있으면서 마음으로 산을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어느 곳이든 휴가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운 거사처럼 서라벌 도시가 싫어 산으로 갈 것도 없고, 그 스님처럼 몰려오는 사람들의 북새통이 싫어 산을 내려올 일도 없을 것 같다. 결국 어디에 있든지 언제나 모든 곳을 휴가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자세와 삶의 철학이 사실은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이번 휴가에는 모든 사람이 마음속에 바위를 안고 가지 말고, 어느 곳이든 휴가지로 만들 수있는 태도로 다녀왔으면 한다. (144쪽)
열반은 시대에 따라서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미로 재해석되어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한결같이 전제되고 있는 것은 ‘최고, 최후의 완성’이라는 의미다. 삶과 죽음에서도 자유롭고 마음과 몸에서도 자유로우며, 그렇기 때문에 생사에 집착하지 않고 정신과 물질에 걸리지 않는 대자유의 상태가 바로 열반인 것이다.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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