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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몸·마음. 불자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불자들의 건강을 크게 신경 쓰셨습니다. 마음 수행과 몸의 건강을 함께 챙겨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부처님처럼 자기를 바로 보고 건강을 살피며 살면 몸도 튼튼해지고 마음도 단단해집니다. 불자가 건강하게 사는 법, 불교에서는 어떤 방법을 전하고 있을까요? 우리 불자들은 건강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하면 될까요? 부처님 가르침을 바탕으로 건강법을 행하는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건강 비법, 건강한 불자가 되는 법을 소개합니다. 01 경전에 나타난 부처님의 건강법 / 이미령 |
부처님은 하루에 한 번 식사하셨다. 한 끼를 식사하시면서도 너무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게 음식을 드셨다. 스승은 금식도 과식도 모두 경계했다. 제자들에게도 공양 받은 음식이 너무 많을 때는 남겨도 상관없다고 가르치셨다. 다만 남긴 음식은 모두 버려야 했다. 다음날까지 남겨두어서는 안 됐다. 음식을 저장했다가 다음날 또 먹게 되면 음식을 한꺼번에 많이 받아 두고두고 먹으려는 습성이 생기고, 자연스레 음식물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부처님은 과식은 피곤함, 졸음, 괴로움, 게으름, 일찍 늙음(早老)을 만들고 또한 탐, 진, 치와 혼침昏沈, 수면睡眠을 일으킨다고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이 몸을 존속시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불편함을 끝내기 위해서, 성스러운 삶에 보탬이 되기 위하여, 신체를 보전하기 위한 약으로 삼아 한 끼 공양을 취하셨다. 공양을 마친 부처님은 나무 그늘에 앉아 소화를 시키며 고요히 선정에 드셨다.
| 그 스승과 그 제자
경허 스님의 수제자 혜월 스님(1861-1937)은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청규를 철저히 지켰다. 혜월 스님에 관해 ‘개간開墾하는 데 으뜸’이라는 말이 퍼질 정도로, 스님은 틈만 나면 괭이를 들고 논밭을 일구었다. 그러나 고된 울력을 하면서도 먹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 보리밥에 된장, 간장, 시래깃국이 고작이었다. 혜월 스님은 평생토록 그 정도면 만족했다. 그러면서도 공양 때면 음식을 몇 숟가락 덜어두었다가, 공양이 끝나면 산으로 올라가 산짐승과 나누었다.
경허 스님에게 인가받은 한암 스님(1876-1951)은 그 생활 일체가 참 검박했다. 공양은 적게, 아침에는 죽, 낮에는 밥, 두 때만 드셨다. 공양을 드리면 드린 대로 드시고 차다, 덥다, 질다, 되다, 짜다, 싱겁다는 말이 없었다. 한암 스님은 조석 예불과 대중 울력(작업)에 빠짐이 없었다. 그 당시의 울력이란 채소 가꾸기, 감자 심고 거두기, 밤 손질, 채소 다듬기 등이었다. 한암 스님은 특히 콩나물 다듬을 때는 꼭 나와서 대가리 하나 버리지 않고 모두 가려냈다.
그 옛날 오대산 한암 스님의 회상에서는 겨울 내내 김치 하나로 공양을 해야 했다. 그때도 대중이 김치를 많이 먹으면 헤퍼진다고 소금에다 절이다시피 한 김치를 담갔는데, 늦은 밤 한암 스님은 대중들 모르게 김칫독으로 가 짜게 담은 김치에다 소금 한 바가지씩을 더 갖다 부었다. 김치 맛이 짜다 못해 아주 쓰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김치 한 쪽이면 밥은 세 숟가락을 먹어야 할 정도였는데, 그때 한암 스님 회상에서 정진하던 혜암 스님(1920-2001)은 그것도 고맙게 생각하고 불평불만 없이 드셨다. 혜암 스님은 하루 한 끼만 먹고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며 용맹정진 했다.
한암 스님의 제자였던 탄허 스님(1913-1983)은 밥보다 공부가 우선이었다. 밥 짓고 일하느라 공부할 수 없는 공양주스님과 부목스님까지 함께 공부하도록 배려했다. 공양주와 부목에게 아침 공양 지을 때, 점심 공양까지 한꺼번에 밥을 짓도록 해 3년간 찬밥으로 점심 공양을 때우면서 제자들을 지도했다.
효봉 스님(1888-1966)은 하루에 한 끼만 드셨다. 점심공양이 끝이었다. 그럼에도 세속에서처럼 많이 먹는 것은 낮밥이라 하고, 수행자들이 뱃속에 점을 찍듯 적게 먹는 것을 점심이라고 하니, 배를 배불리 채워서는 점심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또한 공양물의 귀함과 규칙적인 시간을 엄중히 여기며, 시자 법정 스님(1932-2010)에게 혼을 냈다.
| 시주물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이제 막 출가한 법정 스님과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서 머무를 적, 찬거리를 구하러 마을에 내려간 법정 스님이 늦게 돌아와 공양 지을 시간을 놓치자, 효봉 스님은 법정 스님에게 “공양을 짓지 말라, 오늘은 단식이다.”라며 이렇게 전했다. “오늘은 굶을 것인즉 그리 알아라! 수행자가 시간관념이 그렇게 없어서야 되겠느냐?” 또 하루는 법정 스님이 설거지를 하다 흘린 밥알과 시래기 줄기를 효봉 스님이 젓가락으로 건져 빈 그릇에 담았다. 효봉 스님은 “시주한 것을 함부로 버리면 삼세제불이 합장하고 서서 벌선다고 했으니, 오늘은 내가 먼저 벌서겠다.”며 법정 스님 앞에서 밥알과 시래기 줄기를 우물물에 한 번 헹구어 삼켜버렸다.
법정 스님은 그 가르침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공양을 간소하게 해 아침에는 누룽지나 떡국, 점심은 밥, 저녁에는 국수를 주로 드셨다. 훗날 법정 스님의 제자들에게도 “반찬 많이 하지 마라. 정신만 혼란해진다.”고 했다. 법정 스님의 책 『오두막 편지』 뒤 표지에는 스님의 생각이 고스란하다. “입안에는 말이 적고, 마음에 일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적은 것이 있으면 성자도 될 수 있다.”
“시주물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던 경봉 스님(1892-1982)은 배춧잎 한 장도 아껴 썼다. 구두쇠로 널리 알려진 스님은 공양간에 두고 써야 할 고춧가루, 깨소금, 참기름까지 당신의 방 벽장에 넣어놓고 필요할 때만 잠시 꺼내주면서 일일이 관리했다. 스님은 양념통을 내어주면서 “적게 써라.”, “조금만 넣어라.”, “한 방울만 쳐라.”를 노래 부르듯 하셨다. 시주물로 들어온 것이니 쌀 한 톨, 고춧가루 하나, 배춧잎 한 장도 무서워할 줄 알아야 참된 수행자라는 게 스님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경봉 스님은 제대로 된 수행자에게는 모두 내어주었다.
묘엄 스님(1931-2011)이 경봉 스님을 뵈러 극락암에 찾아왔다. 극락암 대밭 앞에는 절에서 가꾸는 고수 밭이 있었는데, 묘엄 스님이 경봉 스님께 고수 몇 뿌리를 얻어 심고 싶으니 몇 뿌리만 캐가게 해 달라 요청했다. 경봉 스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하지만 묘엄 스님이 거듭 간청하자, 자신이 보는 앞에서 고수를 뽑아보라고 시켰다.
묘엄 스님은 합장배례하며 감사를 표하고 공양간에서 식칼을 가지고 나오더니 그 칼로 고수를 캐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 쪽을 쪼개어 끝을 뾰족하게 깎았다. 그 대꼬챙이로 고수 밭을 콕 찔러 뿌리를 하나씩 솎아내곤, 고수를 뽑은 자리를 발로 꼭꼭 밟아주었다. 경봉 스님은 빙긋이 웃으시더니 한 말씀 하셨다. “니 참말로 잘한다. 그렇게 얌전하게 제대로 캐갈라면 한소쿠리라도 캐가거라.”
| 배부름을 구하지 말고 적당히 먹어야 한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성불을 이루겠다며 강진 병영에서 금강산 마하연선원까지 3개월 동안 걸어서 갈 정도로 치열한 정진을 했던 금오 스님(1896~1968)이 1960년대 초 금산사 조실을 할 때는, 모든 대중은 대방에 발우를 펴고 오관게를 외우며 기도를 올린 뒤에야 공양할 수 있었다. 아침 공양은 반드시 죽을 먹어야 했다. 점심과 저녁에는 밥을 먹을 수 있었지만 일미칠두一米七斗라 하여 쌀 세 홉 이상을 먹지 못하게 했다. 식량을 담당하는 미감스님이 밥을 할 때마다 인원수를 세어 인원수에 꼭 맞게 쌀을 내었고, 갑자기 손님이라도 찾아오면 대중들의 공양에서 조금씩 덜어 손님을 대접했다. 스님은 만행정진을 하다 가사 장삼을 던져버리고 깡통을 차고 거지가 되기도 했다. 거지가 되는 것도 절차가 있어 당시 전주의 거지대장에게 세 가지 항목을 이행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첫째, 밥은 식은 밥이든 쉰밥이든, 먹다 남은 밥이든, 누룽밥이든 가리지 않고 먹는다. 둘째, 옷은 닳아지고 찢어져서 속살이 삐져나와도 가리지 않고 입는다. 셋째, 잠은 논둑이든 밭둑이든 다리 밑이든 가리지 않고 잔다.”
94세 고령의 나이에도 백두산 천지를 올랐던 석주 스님(1909-2004)에게 건강 비결을 여쭈면 늘 식탐을 경계하는 것이라 말했다. 스님은 규칙적으로 소식小食했다. 아침엔 죽을 들고 점심 저녁에는 밥을 드셨다. 한 끼 식사도 밥 네댓 숟가락 정도, 반찬은 두서너 가지가 전부였다. 공양 시간은 한 시간 정도로 소식이지만 천천히 오래 드셨다.
“수행자가 식탐을 벗지 못하면 그만큼 수행이 곤궁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 특히 육식에 대한 스님의 의지는 단호했다. 오신채는 물론 라면도 스프에 고기가 들어갔다 하여 먹지 않았다. “고기를 먹는 것은 자비의 종자를 끊는 일이야. 어쩔 수 없이 약으로 먹는 것이야 말릴 수 없지만, 역시 수행자로서 취할 바는 못돼.” 그리고 물 한 잔을 마실 때에도 컵을 앞에 두고 물에 살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위해 축원한 다음 그 물을 마셨다.
서슬 퍼렇게 수행정진하며 한국 불교에 깊은 가르침을 주었던 성철 스님(1912-1993)의 밥상은 간단했다. 스님은 81세의 세수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소식小食했다. 12시 전에는 죽식을 했고, 다음 끼니는 자연식을 즐겼다. 식사는 무염식이었다. 소금이나 조미료, 고춧가루 등의 양념을 넣어 만든 음식은 일체 들지 않았다. 익혀 먹는 화식火食보다는 생식生食을 주로 했다. 제철에 맞게 충분히 익은 것을 뿌리, 줄기, 잎과 열매 등 가능한 원형 그대로 손상 없이 먹었다. 양념이 과하게 쓰인 음식을 보면 깜짝 놀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고. 곰 새끼들아. 그것 먹어 좋을 것 하나 없다.”
성철 스님은 밥에 관해 굉장히 엄격했다. “많이 먹지 마라. 중이 밥을 많이 먹으면 도둑놈이다.” 어느 날은 성철 스님이 장군죽비를 손에 들고 선방에 들어섰다. 그러곤 꾸벅, 졸고 있는 스님들의 등줄기를 사정없이 후리치며 “졸지 말고 밥값 내놔라! 이놈아!” 하고 일갈했다.
| 부처님 은혜로 이 공양을 받습니다
선과 염불을 하나로 회통하는 염불선을 주창하고 무소유와 청빈한 삶을 이어간 청화 스님(1924-2003)은 40여 년 동안 눕지 않고 좌선하고 하루 한 끼, 오후불식하며 토굴에서 수행에 정진했다. 스님은 수행자라면 마땅히 배부름을 구하지 말고 적당히 먹어야 하며, 음식을 적게 먹는 것이 건강유지에도 좋고 배설량이 적어 수행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3개월을 보리 미숫가루만 먹고 정진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둥굴레 가루만 먹고, 어떤 때는 생쌀을 물에 불렸다가 한 숟갈씩 먹었다. 하지만 스님은 이것을 다른 이에게 권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스님은 재가불자들도 적어도 한 달에 여섯 날은 오후불식 하라고 권했다. ‘6재일’이라 해서 한 달 가운데 스스로 정해서 여섯 날은 출가한 셈 치고 생활규범으로 삼으라 했다.
순수불교운동·반야바라밀 불광운동으로 현대인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알리고 일깨우는데 심혈을 기울인 광덕 스님(1927-1999)은 상좌 송암지원 스님에게 공부를 할 때는 반드시 세 끼니를 거르지 말고 먹으라고 했다. “저녁을 먹지 않고 앉아 있으면, 한밤중이 되면 허리가 확 접혀서 기력이 살아나지를 않아. 이 다음에 송암도 공부할 때 반드시 세 끼니를 거르지 말고 먹어야 해. 다만 많이 먹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안 먹는 것이 능사가 아니야.”
또한 광덕 스님은 재가불자들에게 식사 전 간단한 주원呪願을 하고 식사하라고 권했다. “대자대비 부처님/크신 은혜 이 공양/일체 중생 발보리/마하반야바라밀.”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크신 은혜로 이 공양을 받습니다. 바라옵건데 일체 중생이 보리심을 발해 무상도를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원하고 공양을 들라고 권했다.
성성하게 화두참구를 하던 어른스님들도 봄에는 모든 대중이 함께 산에 가서 산나물을 뜯어오고, 모내기할 때는 노스님들까지 논에 나와 못줄을 잡고 못단을 옮겨주었다. 스님들이 하루 종일 산에서 캐온 나물은 잘 말려서 1년 내내 대중이 먹을 수 있는 찬거리와 국거리로 썼다.
한국 현대 불교를 다시 일으킨 봉암사 결사에서는 성철 스님과 도반들이 ‘부처님 뜻대로 살자’며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적고 철두철미하게 지켰다. 공주규약 중 일부다. ‘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공급은 자급자족의 원칙에 따른다. 물 긷고, 나무하고, 밭에 씨 뿌리며, 탁발하는 등 어떠한 어려운 일도 사양하지 않는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림은 열두 시를 지나지 않으며 아침은 죽으로 한다.’
이렇듯 부처님과 어른스님들은 넘치지 않게 소식小食하고, 간소하게 드시며, 시주물 귀한 줄 알고, 물 긷고 밭에 씨 뿌리어 그 공덕을 감사히 하며 몸을 보하는 공양을 먹었다.
•참고자료
원영 스님, 『부처님과 제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불광출판사
원정 스님, 『죽비 한 대』, 맑은 소리
김현준, 『도심 속의 도인 석주큰스님』, 효림
송암지원 스님, 『광덕스님 시봉일기 Ⅰ』, 도피안사
광덕스님전집편찬위원회, 『광덕스님 전집 7』, 불광출판사
정진백, 『성자의 삶』, 사회문화원
정찬주, 『무소유 법정 스님 이야기』, 열림원
윤청광, 『고승열전-효봉큰스님』, 우리출판사
조용명, ‘우리스님 寒巖스님’, 월간 불광, 67호
효림. ‘가야산의 주인 혜암 큰 스님’, 월간 해인, 151호
김현태, ‘14. 도원 스님과 금산사 들깨 토란국’, 법보신문, 2016.08.09.
윤청광, ‘금오, 상’, 법보신문, 2005.11.30.
이상언. ‘법정 스님 열반 1주기 특집 인터뷰 덕조 스님’. 현대불교신문. 2011.02.24.
윤청광, ‘경봉 스님〈중〉중생의 앞일까지 내다본 선지식’, 법보신문, 2005.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