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현대의 불교 철인들 |
이번 호 특집은 근・현대 세계불교 역사 속에서 붓다를 따르는 수많은 수행자들 중 세상을 바꾸는 데 사상적으로 기여하거나, 혹은 직접 뛰어들었던 인물을 집중 조명해 봅니다. 각 인물이 겪고 만들어갔던 역사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 구조로 풀어 가면 ‘세상을 바꾼’ 사건들이 입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대’에 초점을 둔 것은 우리 시대와 함께 살면서 인물을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어 정보의 양이 풍부하고 대중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불교 철인’은 불교가 지향한 가치와 철학을 중심에 두고 현실을 변화시킨 불교인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를 겹쳐서 세상을 바꾼 현대의 불교 철인을 찾아봅니다. 01 서구에 선불교를 전달하다 스즈키 다이세츠(1870-1966) / 원영상 |
|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달라이 라마
새벽 3시.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1934-)는 잠에서 깨어 일어나 가장 먼저 세수와 양치를 한다. 곧바로 법당에서 오체투지五體投地와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새벽에 흰색 내의를 입은 채 숨이 찰 정도로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그의 모습은 조용한 출가수행자의 이미지를 단숨에 바꾸어낸다. 아침의 시간은 대부분 기도와 명상으로 보낸다. 이 시간에 그는 내면의 힘을 이끌어내고 생각을 정리하며,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깊이 생각한다. 그의 식단은 조촐하다. 아주 적은 양으로 만족한다. 압축한 차 덩어리에서 깎아낸 부스러기로 만든 티베트식 홍차를 곁들인 참파면 훌륭한 식사가 된다. 참파는 그냥 먹거나 액체와 혼합해서 먹는, 보릿가루로 만든 티베트인의 주식이다. 이렇게 식사는 매끼가 늘 가볍다. 그의 일상은 불교수행자인 수도승의 하루이다.
그러나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이 망명지이고, 50여 년간 6대주의 62개가 넘는 나라를 방문했으며, 세계 주요 나라의 대통령, 수상, 수많은 종교지도자와 저명한 과학자들을 만나고 교류하였고, 노벨평화상과 수많은 비폭력, 환경, 인권 등의 상을 수상했으며, 110권이 넘는 저작물이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는 인물이기에 그의 존재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세계에 이처럼 불교지도자로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출가수행자가 있을까. 이 수많은 이력은 중앙아시아 지역 작은 나라인 티베트의 불교지도자가 어떻게 세계의 종교지도자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는지 압축해 보여준다.
새벽 3시.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1934-)는 잠에서 깨어 일어나 가장 먼저 세수와 양치를 한다. 곧바로 법당에서 오체투지五體投地와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새벽에 흰색 내의를 입은 채 숨이 찰 정도로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그의 모습은 조용한 출가수행자의 이미지를 단숨에 바꾸어낸다. 아침의 시간은 대부분 기도와 명상으로 보낸다. 이 시간에 그는 내면의 힘을 이끌어내고 생각을 정리하며,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깊이 생각한다. 그의 식단은 조촐하다. 아주 적은 양으로 만족한다. 압축한 차 덩어리에서 깎아낸 부스러기로 만든 티베트식 홍차를 곁들인 참파면 훌륭한 식사가 된다. 참파는 그냥 먹거나 액체와 혼합해서 먹는, 보릿가루로 만든 티베트인의 주식이다. 이렇게 식사는 매끼가 늘 가볍다. 그의 일상은 불교수행자인 수도승의 하루이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톈진 갸쵸Tenzin Gyatso. 그는 1935년 7월 6일 티베트 북동부의 암도Amdo의 아주 작은 마을인 탁체르Taktser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2세 때 제13대 달라이 라마 툽텐 갸초Thubtem Gyatso의 환생으로 밝혀진 그는 6세 때부터 불교철학, 논리학, 의학, 티베트 예술과 문화, 시, 음악, 연극, 언어 등의 교육을 받는다. 이후 24세에 티베트 최고의 학승의 자리에 오른다. ‘달라이 라마’는 1391년부터 티베트 불교 겔룩파에 속하는 존재로 이어져 환생하는 라마(스승, 대사)를 말하며, 현재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바로 톈진 갸쵸다. 이 ‘달라이 라마’라는 활불活佛 제도는 티베트만의 전통이다. 물론 이 제도는 티베트 불교 초기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며, 약 17세기 제5대 달라이 라마 ‘롭상 갸초’에 의해 확립된다.
| 티베트의 비폭력 독립운동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훗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의 영적 지도자로 성장한 배경은 그의 조국 티베트에서 일어난 독립운동과 비폭력 저항 때문이다. 1945년 티베트는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티베트 정부를 중국의 일부로 편입시키면서 갈등이 생겼다. 중국은 1950년 5월 티베트 점령을 공식 선언하면서 무력으로 티베트의 주요 도시인 창두(昌都)를 점령하였다. 폭력 상황을 멈추기 위해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화평해방’을 받아들여 1951년 5월 티베트 협정에 조인한 뒤, 1954년 티베트 지방정부 주석, 전국 인민대표대회 티베트 대표, 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 등을 역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1959년 3월에 티베트에서 반反중국 반란이 일어나자 중국은 총 12만여 명에 달하는 티베트인들을 학살하고, 6,000여 개의 불교사원을 파괴하였다. 결국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국제적 지원과 티베트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인도의 네루 대통령의 협조로 지금의 인도 동북부의 히말라야 산맥 기슭인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운다. 이때가 1959년 3월 31일이다. 달라이 라마는 이곳에서 티베트 문화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주력하였고, 특히 비폭력 노선을 견지하면서 지속적으로 티베트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1959년, 1961년, 1965년 유엔 총회에서 중국 정부를 상대로 티베트의 인권과 자치권을 존중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하였고, 티베트의 무장 게릴라 조직인 캄바의 대對 중국 무력투쟁 노선을 반대해 이를 해산하는 등 세계평화를 위한 비폭력주의를 지켜나갔다.
| 노벨평화상으로 세계 종교지도자로
달라이 라마의 이러한 노력에 세계인권단체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달라이 라마의 독립운동과 비폭력 저항이 서방세계에 알려지면서 마침내 1989년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그는 1989년 12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행한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6백만 명의 티베트 국민들, 즉 고통을 겪어왔고 계속 고통을 겪고 있는 국내의 용감한 국민을 대신하여 이 상을 받습니다. 티베트인들은 티베트 국가와 문화의 정체성을 파괴하려는 전략과 전술에 맞서고 있습니다. 이 상은 진리와 용기, 결단력이 우리의 무기이며 티베트는 해방될 것이라는 우리의 신념을 재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또 수상 연설에서 종교지도자로서 티베트를 넘어 모든 인간의 고통과 행복을 이야기한다.
“불교 승려로서 나는 모든 인간과 고통받는 모든 유정물에까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고통이 무지에서 기인한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인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형제와 자매라는 생각에서 얻어집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지구에 대한 공통의 책임감을 키워야 합니다.”
이 연설은 그가 세계 종교지도자로서 비폭력, 세계평화, 인간, 지구 등 모든 이들이 공유해야 할 미래의 중요한 가치를 전 세계 사람들을 향해 던진 것이다.
그의 티베트 비폭력 독립운동은 인도 다람살라에서 망명자의 삶을 살기 시작한 이후 해외에서 본격화한다. 1967년 처음 해외 방문을 일본과 태국으로 간 이후 1973년 첫 번째 서방 방문에서는 무려 75일 동안 12개의 유럽 국가를 순방한다. 또한 1979년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한다. 그의 해외 방문은 티베트의 비폭력 독립운동을 해외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이후 달라이 라마의 활동은 티베트의 비폭력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종교를 뛰어넘는 자애, 보편적 책임과 자비심 등으로 활동 영역이 전 세계로 확장된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을 소박한 불교 승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진짜 나라고 생각합니다. 임시 통치자로서 달라이 라마는 인간이 만든 제도입니다.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를 받아들이는 한, 그들은 나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승려라는 존재는 내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것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내면 깊숙히 들어가면, 나는 항상 스스로 승려이며 심지어 꿈속에서 승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나는 스스로를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나는 대체로 시간의 80%를 종교적인 활동에 사용하고 20%를 티베트에 관한 활동에 사용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적 또는 종교적인 생활은 내가 알고 있고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이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싶습니다.”
| 불교의 지혜와 자비의 삶이 핵심
그가 티베트의 불교지도자에서 세계의 종교지도자로 변화된 것은 1959년부터 이어온 망명자의 삶과 이를 넘어선 비폭력 저항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불교 승려로서 흔들림 없이 지키고 보여준 지혜와 자비의 삶이 가장 핵심이었을 것이다. 세계의 수많은 정치인과 종교인, 지식인들이 그를 가장 존경하는 세계적인 지도자 50인 중에 1위에 뽑힌 것도 그런 까닭이다.(2016년 「Fortune」)
한국인으로 달라이 라마의 제자가 되어 28년간 다람살라를 떠나지 않았던 청전 스님은 달라이 라마의 인품으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위선이 없습니다. 성직자가 높은 자리, 큰 신전의 주장이 되면 나타날 때 포장을 합니다. 법에 맞지 않습니다. 거만합니다. 달라이 라마는 있는 그대로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지금도 공부하는 스님입니다. 시간 나면 명상하고, 경전을 봅니다. 법문할 때 꼭 경전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부처님의 바른 말씀을 풀어줄 수 있는 스님입니다. 세 번째는 참으로 겸손한 분입니다.”
수많은 해외방문에서 그의 발언은 대부분 종교와 영성, 비폭력, 불교 교리다. 1973년 유럽을 첫 방문했을 때 델리에 있는 BBC 특파원이 “유럽을 방문하는 특별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무슨 의도가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달라이 라마는 “나는 나 자신을 세계시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세계시민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한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세계시민으로 70억 인구 중의 일부라고 했다. 한국인, 티베트인, 불교인, 비불교인은 부차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점에서 동일한 인간이라고 했다. 뛰어난 불교 교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인종, 국가, 종교를 넘은 지혜와 자비를 보여준 그의 행동은 불교인들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향한다.
달라이 라마는 수많은 인터뷰에서 이런 인식을 보여준다. “부처님께서 불교를 말씀하신 것은 부처님 자신의 제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일체중생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물질적인 가치는 내적인 평화를 주지 않습니다. 매우 부유한 사람은 물질적인 것은 풍요롭지만, 사람으로서는 의심, 기대, 두려움 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결과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부정적인 마음, 즉 번뇌를 없앨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 우리 불교도들은 진정한 불교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이 어떤 분이고, 달마가 무엇이고, 승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 21세기에 우리는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불교와 법에 대한 이해를 더욱 발전시켜야 합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톈진 갸쵸. 그는 현재에도 망명인으로 세계 여러 국가와 도시를 방문하면서, 그가 평생을 이어온 자비와 용서, 인내와 만족, 자기 절제와 같은 인간 가치의 증진과 종교 간 이해와 화합의 증진, 그리고 티베트의 명실상부한 자유를 통한 자치 회복을 전하고 있다.
참고한 자료
1. https://www.dalailama.com
2. 『달라이라마 평전』,클로드 B. 르방송 지음, 박옹희 옮김, 바움, 2008
3. 『달라이 라마』, 스트로버 지음, 황정연 옮김,즐거운텍스트, 2006.
4. 달라이라마 방한추진위원회 www.dalailama.or.kr
5. https://ko.wikipedia.org/wiki/달라이 라마
6. 유투브 영상 ‘청전 스님께 달라이라마의 가르침을 듣다’(2015)
7. 유투브 영상 ‘His Holiness the Dalai Lama and Hyon Gak Sunim’(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