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현대의 불교 철인들 |
이번 호 특집은 근・현대 세계불교 역사 속에서 붓다를 따르는 수많은 수행자들 중 세상을 바꾸는 데 사상적으로 기여하거나, 혹은 직접 뛰어들었던 인물을 집중 조명해 봅니다. 각 인물이 겪고 만들어갔던 역사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 구조로 풀어 가면 ‘세상을 바꾼’ 사건들이 입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대’에 초점을 둔 것은 우리 시대와 함께 살면서 인물을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어 정보의 양이 풍부하고 대중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불교 철인’은 불교가 지향한 가치와 철학을 중심에 두고 현실을 변화시킨 불교인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를 겹쳐서 세상을 바꾼 현대의 불교 철인을 찾아봅니다. 01 서구에 선불교를 전달하다 스즈키 다이세츠(1870-1966) / 원영상 |
그는 내딛는 걸음마다 평화를 전한다. 살아 있는 부처(生佛)라고 불리는, 평화를 노래하는 스님 틱낫한(Thích Nhất Hạnh, 釋一行, 1926-). 그는 베트남 출신의 승려이자 시인이고 평화 운동가이다. 또한 세계적인 영적 스승이면서 수행공동체인 플럼 빌리지plum village를 가꿨으며 베트남 난민 공동체의 지도자이기도 하다. 틱낫한. 그는 베트남 전쟁을 겪는 동안 참여불교(engaged Buddhism) 운동을 주창해 불교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했고, 40여 년간의 망명생활을 거치면서도 세상으로 나아가 민중의 고통을 덜어 주는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철저한 중재자로서의 종교의 역할과 참여불교, 그리고 수행지도로 평화를 이야기한다.
| 모든 불교는 삶에 참여한다
1955년부터 1975년까지 일어난 베트남 전쟁 속에서 비구・비구니와 재가불자들은 정부의 불교탄압에 비폭력 저항을 하고 직접 전선에 뛰어들며 사람들을 구했다. 불교인들은 구호, 치유, 재건까지 사회에 필요한 부분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불교의 실천적 사회운동, 참여불교(engaged Buddhism)의 한 모습이다.그곳은 전쟁터였다. 포화에 휩싸인 마을에서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두 줄로 서서 고개를 푹 숙이며 떨고 있었다. 황색 가사를 입은 비구・비구니 스님들이 불교기를 높이 들었다. 가사를 수한 스님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을 이끌고 전장에서 벗어났다. 교전 중인 어느 쪽도 불교인의 대열에는 사격하지 않았다.
참여불교는 1960년대 틱낫한 스님이 처음 사용한 용어로, 그는 1963년 『참여불교』라는 책도 출간하였다. 당시 젊은 스님들은 전쟁으로 인한 참혹한 고통을 목격했고 불교가 우리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틱낫한 스님은 “불교는 모두 세상의 모든 것에 관련되어 있다.(All Buddhism is engaged)”고 말하며 불교교리에 입각해서 사회적 행동을 하자는 사회 참여불교운동을 주창했다.
불교의 사회적 실천을 이야기한 틱낫한 스님. 그는 1926년 중부 베트남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열여섯에 뚜히에우Tu Hieu 사원에서 사미가 되었다. 일 년 후 그는 바오꾸옥Bao Quoc 강원에 들어가 1949년 구족계를 받았다. 강원 시절 그는 당시 관례화된 강원의 교과목을 뛰어 넘어 “철학과 문학, 외국어를 강조하는” 커리큘럼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불교가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다른 몇몇 학생들과 함께 강원을 떠나 사이공 변두리의 작은 절에서 서양철학과 과학을 공부했다. 1961년 서른다섯의 그는 펠로우십 장학금을 받고 미국의 프린스톤 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했고, 두 해가 지나 컬럼비아 대학에서 현대불교에 대한 강의를 했다. 1963년 쿠데타로 디엠 정권이 무너지자, 스님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베트남학과를 맡아달라는 학장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해 12월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베트남으로 돌아온 스님은 사회봉사청년학교를 설립(1965)해 농촌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힘썼다. 본격적으로 사회문제에 개입했다. 또 자신이 과거에 주장했던 폭넓은 교과과정을 구체화시킨 불교대학, 반한Van Hanh 대학교를 설립해 현대화된 승가 교육을 시도했다. 이듬해 1966년, 그는 사회의 문제를 불교의 입장에서 풀어내기 위해 참여불교라는 표현을 명시적으로 내걸면서 접현종(接現宗, Order of Inter-being)이라는 종파를 창종했다. 이런 다소 급진적인 개혁은 베트남 원로스님들에게 적지 않은 질타의 대상이었지만, 그의 사회개발 사업은 큰 성과를 일궈 사이공 지식인들의 찬탄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였다.
베트남 불자들은 이러한 참여불교의 정신에 동조하며 정부의 불교탄압과 베트남 전쟁에 대해 비폭력으로 저항했다. 그들은 틱낫한 스님의 시를 이용해 “형제를 쏘지 마라.”고 설득하는 반전의 노래를 만들어 불렀고 이 노래는 남베트남의 전역에서 폭넓게 불려졌다. 개인과 크고 작은 규모의 단체들은 단식으로 항거했다. 탱크가 오는 길에는 집안의 불단佛壇을 내어놓았고 어떤 이들은 삭발해 승려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관리들에게 불교의 가치를 상기시켰다. 마을 사람들은 탈영병과 징병 거부자들을 보호하고 도왔다. 그 중 가장 강력한 비폭력 항의는 승려와 재가불자가 자신의 의지로 직접 택한 소신공양燒身供養이었다. 틱낫한 스님은 이들의 비폭력 투쟁을 보며 “행동하는 자비”라고 정의했다.
이 무렵 베트남 불교계는 4일간의 불교회의를 개최하여 베트남의 상좌부불교와 대승불교를 통합해 ‘베트남통일불교회’를 탄생시켰다(1964). ‘베트남통일불교회’의 지도적 활동가 틱땀짜우Thich Tam Chau는 개회사에서 “불교인은 동시에 한 나라의 국민이기 때문”에 “불교인들이 사회 활동이나 문화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며 불교의 사회참여를 선언하였다.
| 우리는 상호 연관된 존재(Interbeing)
베트남은 여전히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틱낫한 스님은 이념의 갈등으로 비롯한 베트남 전쟁의 종전終戰을 설득하기로 결심하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1966년 6월 1일, 워싱턴 D.C.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전쟁 중인 조국이 겪고 있는 고통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미국 정부에게 베트남 전쟁의 종전을 위해 바라는 다섯 가지 평화안을 제시했다. 그는 미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반전평화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 평화안으로 남과 북베트남 정부는 모두 그를 반역자라 낙인찍었다. 그가 평화운동을 펼친 가장 큰 목적은 힘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주자는 데 있었기에, 대치하고 있는 양쪽의 어느 쪽 이념에도 편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불교의 가르침을 적용해 대승적 차원에서의 불이不二를 이야기했고, 중도中道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길 바랐다. 모든 존재가 상호 연관된 존재(inter-being) 임을 자각할 때,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평화를 이끌어내는 데 있어 어느 한 편의 이념을 따르는 것은 답이 될 수 없었다. 남・북 베트남 정부는 그에게 입국금지조치를 내렸다. 불교 지도층들도 그가 베트남으로 돌아오게 되면 분명히 투옥되거나 암살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피신해 있기를 부탁했다.
베트남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전 세계를 향해 평화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운동은 1967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추천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전쟁의 현장에서 탈출한 수천 명에 달하는 베트남 난민을 구하기 위해 기금 20만 달러를 모금했고 800여 명의 보트피플을 구조했다. 그는 조국을 그리워하다 1973년 결국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제는 세계 곳곳에서 불교의 가치로 사회적 행동을 이끌어 가는 참여불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1956년 수백만의 인도 ‘불가촉천민’들의 집단적 불교개종을 이룬 인도의 인권 지도자이자 정치가인 암베드까르B.R. Ambedkar 박사의 활동, 스리랑카에서 8천 여 개의 마을과 30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한 사르보다야 슈라마다나운동(Sarvodaya Shramadana, 자원 봉사를 통한 모든 이들의 각성운동), 아시아 여성 불자들이 여성의 구족계를 부활시키려 한 운동 등이 불교의 사회참여로서 일어났다. 태국의 인권 운동가인 술락 시바락사Ajarn Sulak Sivaraksa 박사는 1989년 ‘국제참여불교네트워크(International Network of Engaged Buddhists, INEB)를 설립해 세계의 불자들과 함께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참여불교네트워크는 아시아, 유럽, 북미 및 호주 전역의 25개국 이상에서 59단체와 개인 회원들이 함께하고 있다.
| 함께 수행하는 공동체, 플럼 빌리지
틱낫한 스님은 망명 이후 파리 근교의 마구간이 딸린 조그만 농가를 사고 그곳을 가꾸어 은수처隱修處로 삼았다. 그 공간에서 틱낫한 스님은 함께 평화운동을 이끌던 동료들과 함께 모여 채소를 가꾸고 명상수련을 하며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다스렸다. 1975년, 그들은 ‘고구마들(Les Patates Douces)’이라 이름 짓고 수행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고구마들’은 치유를 위한 공간이 되었다. 스님은 그것을 “영적 고향”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함께 모여 노래하고, 집 주위 언덕을 따라 걷기 명상을 하며 내면의 치유와 회복의 시간을 보냈다.
작은 안식처인 ‘고구마들’을 찾는 사람이 늘어 그들을 모두 수용하기 좁은 장소가 되자, 그는 다른 장소를 모색했다. 베트남과 기후가 비슷한 프랑스 남부 지방 보르도에 자리를 잡았다. 1982년, 그는 그곳에 1,250그루의 자두나무를 심으며 ‘플럼 빌리지Plum Village’라는 이름의 새로운 수행공동체를 만들었다. 1990년에는 미국 버몬트 주州에 승원僧院 ‘단풍림’과 수행원 ‘그린 마운틴’을 설립해 명상 공동체 활동을 펼쳤다.
틱낫한 스님은 이제 수행공동체 플럼 빌리지에서 평화를 찾는 법으로써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지금 이 순간을 살피는 수행법을 제시한다. 그는 불교의 삼학 수행을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라는 개념으로 집약해 다양한 수행 과정과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훈련시킨다. 그는 세계인들에게 자신의 평화를 찾지 않고서는 누구도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다며 자신의 평화를 발견하라고 전한다.
플럼 빌리지가 설립된 지 35년, 이제는 미국 등 세계 8곳에서 대학 캠퍼스 규모의 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플럼 빌리지에서 1,000명 이상이 출가를 했고, 명상 참가자만 해도 매년 8,000여 명에 이른다. 92세 성자의 가르침은 그가 집필한 80여 권의 저서에서도 만날 수 있다.
참고한 자료
1.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틱낫한 지음, 류시화 옮김, 김영사, 2002
2. 『토머스 머튼과 틱낫한』, 로버트 H. 킹 지음, 이현주 옮김, 두레, 2007
3. 『틱낫한의 상생』,틱낫한 지음, 진우기 옮김, 미토스, 2004
4. 『평화와 행복을 위한 불교지성들의 위대한 도전』,크리스토퍼 퀸, 샐리 킹 편저, 박경준 옮김,도서출판 초록마을, 2003
5. 「틱낫한의 평화사상」, 이거룡, 한국불교학 제60집, 2011
6. 「왜 틱낫한인가」, 진현종, 불교평론 제40호, 2009
7. 참여불교네트워크 http://inebnetwork.org/
8. 플럼 빌리지 https://plumvillag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