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통계청조사에 의하면 종교를 가지고 있는 젊은 층(20-29세) 38.7% 중에 14.4%가 불교인이라 한다. 젊은 층의 불교 신도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불교가 알기 어려운, 알송달송한 이야기로만 비춰지고 있는 듯 싶다. 또한 관심있게 보지 않는 일부에는 기복신앙의 성격만이 알려져 있음도 사실이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어느 책방 한귀퉁이에서 선뜻, 그리고 쉽게 읽어볼만한 불교에 관한 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부처님을 다룬 글은 더욱이나 그렇다. 부처님의 행적만 좇아다닐 뿐 그 모습 하나 하나, 부처님이 인간이었음에 보았을 아픔이라든가 슬픔 등 부처님을 올바로 알리는 글은 쉽게 만날 수 없었던 게 아닌가.
최근 그 아쉬움과 허전함을 오래오래 달래줄 이야기를 들었다. 너무도 친근하고 따뜻한 부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그리고 기쁨으로 그 이야기꾼을 만날 수 있었다.
한껏 그 빛살이 따사로운 봄날 아침, 새 단장을 한 불교텔레비젼 방송국 건물 한켠에서 만난 『차크라바르틴』(제1회 상상문학상 수상작)의 작가 성낙주 씨(41세, 서울창동중학교 교사)가 바로 그이다.
아침 일찍부터 불교TV의 방송이 있었다고, 라디오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TV는 번쩍이는 그 빛 때문에 영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이 소설로 학생들에게 스타(?)가 되었다며 허허롭게 웃음을 내비친다.
그 웃음, 한바탕 큰비가 쏟아진 후, 다음날의 눈부신 빌찻ㄹ 아래 선다면 그럴까. 그 웃음은 일면 너무 훤히 드러나버린 지난 15년이란 세월이 쑥스러워서일까 싶다. 세간의 관심과 시선에 물끄러미 어머니의 몸 뒤로 작은 몸을 숨기는 아이처럼 그는 얼굴 가득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지금의 우리는 서구 문화, 서양의 그것들에 우리 문화, 우리 정신, 우리 영혼을 빼앗기다시피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 우리 것, 우리의 근원을 한번 밝혀보고 싶었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그리고 그 속에 전교조 해직이라는 5년 여의 긴 시간 동안 원고지 3천4백 매, 두 권 분량의 이 소설에 매달려 쓰게 된 동기에 대해 그는 예의 웃음을 떨치고 무언가를 그리듯 그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차크라바르틴』은 불교하는 종교가 막 태동하는 고대인도의 시간적, 공간적 지점으로 올라가 그 본질을 탐색하고 있는 소설이다.
부처님이 다르마로써 모든 중새의 가슴을 보듬어 줄 진리계의 왕이라면, '차크라바르틴'은 전륜성와(轉輪聖王), 현세를 평정하고 낙원으로 바꿀 세속의 제왕을 뜻한다. 중생들이 기다려온, 그들을 그 낙원으로 이끌어갈, 그들의 꿈과 희망을 간직한 인물이다. 두 존재는 천축의 모든 중생들이 오래전부터 소망해온, 작가의 말대로 '그들의 고통과 신음으로 빚어낸 꿈이며 희망'인 셈이다.
그는 이야기 속에서 말한다.
'그들 가슴마다에 그러한 가공의 존재가 빛나고 있다는 사실은 현실로서의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곤고한지, 그 노동과 학대가 얼마나 자심한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했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작가는 석가족 출신의 고타마 싯다르타 사문과 석가족을 멸망시키고 천축을 통일하여 '차크라바르틴'이 되고자 하는 코살라국의 청년왕 비유리를 보여준다. 그 당시 대중들은 당시 그 두사람을 따른다. 그들이 기다려온, 그들 자신을 억압과 속박으로부터 각기 정신적, 육체적 구원으로 이끌어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야기 속에는 부처님의 형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불상을 만든 동료 푸루사처럼 부처님의 말씀, '옴(唵)'의 소리를 담아낼 종(鐘)을 주조해내고자 하는 대장장이 춘다와 춘다의 아들 나무크시아가 등장한다.
"…지금 당장 그들이 절박하게 원하는 건 평화와 평등, 천축 통일과 사성 타파일 뿐이라구. 그런 것만이 이 시대의 진정한 다르마라구!"라고 말하는 나무크시아는 비유리를 도와 천척을 통일하고자 한다.
크게 고타마 싯타르타 사문과 비유리, 춘다와 나무크시아가 갈등, 대립하면서 전개되는 이야기 곳곳에는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인물들, 춘다를 돕는 사촌들, 나무크시아를 사랑하는 야수미라는 여인, 나무크시아의 친구로서 그 또한 진리를 찾고자 고행의 길로 떠나는 나가사 등 부처님 시대 당시에 존재했었을 사람들을 생생하게 묘사해 내고 있다. 그리고 코살라국 군대가 카필라성을 침범해 살육하는 장면에서는 우리의 최근 현대사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부처님과 차크라바르틴을 통해 추구되는 진지하고 이상적인 주제와 아울러 '라후의 달'등 고대 인도 설화까지 맛볼 수 있는 독특한 작품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처님을 너무나 친근하게 인간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부처님을 형상화해내는 부분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특히 비유리에 의해 석가족이 멸망하고 그 동족을 돌아보는 부처님을 묘사하는 부분 말입니다. 그 부분 때문에 그 많은 세월이 흘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백 권을 참조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그 부분에 대한 글들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대들이여. 나는 붓다가 아니니라. 나는 세존도 아니고, 구루도 아니고, 정각을 이루지도 못했느니라. 나는 단지 죽어간 그대들의 어버이고, 형제이며, 그대들의 남편이요, 자식, 혹은 그대들의 부숴진 집, 그대들의 잃어버린 암소니라. 오늘 내가 여기에 온 것은 그러므로 그대들을 위로하기 위함도 아니요, 목숨 잃은 이들을 애도하기 위함도 아니니라. 나는 단지 그대들과 손을 맞잡고 함께 울기 위해서 왔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분노하기 위해서 온 것이니라, 그런 연후에 그대들과 더불어 무너져버린 성벽을 새로 쌓고, 메꿔진 샘을 새로 파고, 짓밟힌 논밭을 새로 갈기 위해서 왔느니라. 필요하다면 나는 기꺼이 그대들의 손발이 될 것이요, 쟁기도 되고, 사다리도 되고, 또 수레도 될 것이며, 그대들의 암소가 되어 젖도 낼 것이니라."
그가 그토록 오랜 동안 기다려온, 그려온 부처님인 것이다. 그리고 응모마감을 위해 빠져버린 900매 내외에는 부처님의 중생에 대한 사랑이, 그 삶이 더 많이 녹아 있다고 아쉬움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는 『차크라바르틴』이 그냥 부처님이 세계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고, 나무크시아와 야수미 그리고 수쟈타의 애틋한 사랑도 있다고 전해준다.
"…경전만 가지고 자족되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 삶과 연관되는 가르침을 소프트웨어적인 이런 소설이라든가, 음악, 미술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해 내 불교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자신이 부처님을, 우리 문화를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듯이 그리고 심사위원들이 다음과 같이 상상문학상 수상작 선정이유를 밝히고 있듯이 『차크라바르틴』을 통해, 아프올 쏟아 놓을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문화의 근원을, 불교의 참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그의 작업이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이제 문화의 보편성은 서구의 관점이 아니라 동아시아 사회가 공유했던 빛나는 문명의 고나점에서 재인식되어야 한다. 새로운 문학은 우리 고유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자존과 긍정 속에서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사유하고 표현해야 한다.
-「 상상문학상」선정이유서
「차크라바르틴」으로 마음 따뜻한 부처님을 만난 그는 이제 걸직한 이야기꾸닝 되어줄 것이다. 어렵고 크게만 느껴지는 불교, 부처님의 그 세계를 우리의 마음에 마음껏 그려 줄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은 책방 한 귀퉁이 어디서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야기하면서 눈물 흘리고 웃고 떠들고 감동스런 낯빛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날들이 어서 오기를 기다려 본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은영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