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가 이웃에 살아 우리와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어떨까? 요새 쓰는 말로, 우리가 고민하는 이슈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토론할 수 있다면, 철학 하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책에 한 가지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면, 그건 바로 불의를 저지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의로부터 고통받는 편이 더 낫다는 사실을 일부 독자들에게 확신시키는 효과였으면 하는 것이 저자인 나의 바람이다.” - 「들어가는 글」 가운데
선택의 순간순간,
우리는 철학자가 된다
우리는 ‘점심엔 무얼 먹을까?’ 같은 평범한 일상의 문제에서도 고심하곤 한다. 다양한 선택지를 두루 비교하며 무엇이 ‘나’에게 더 이익인지를 따져 보는 건 기본이고, 가끔은 무엇이 더 ‘옳은지’를 두고 고심도 한다. 밥 한 공기를 줄줄이 따라 나오는 다양한 생각거리들, 예를 들면 육식이냐 채식이냐, 로컬 푸드냐 아니냐, 많이 먹을 것이냐 적게 먹을 것이냐 등을 붙잡고 있노라면 밥 생각이 달아날 정도이다.
인생에는 밥만큼, 혹은 밥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대학에서 무엇을 공부할 것이며, 무슨 직업을 선택하고, 누구에게 투표를 할지 등등, 이 모든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려 들면, 생각할 시간만 해도 부족하다. 그렇다고, 인생을 만들어 갈 중요한 결정들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러니 인간은 강요됐든 아니든 “타고난 철학자”일 수밖에.
소크라테스가 이웃에 산다면
‘너 자신을 알라’, ‘악법도 법이다’라는 발언으로 유명한 철학자가 있다. 2500년 전에 살다 간 소크라테스이다. 2014년을 사는 현대인에게 고조할아버지 정도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소크라테스. 그는 교과서에나 등장하며, 공부거리나 늘려 주는 박제된 철학자일 뿐일까?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문화, 역사, 예술, 종교에 관해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우리에게 그의 말들이 현실감 있게 다가올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이웃에 살아 우리와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어떨까? 요새 쓰는 말로, 우리가 고민하는 이슈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토론할 수 있다면, 철학 하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플라톤 대화편은 우리 삶과 어떻게 만나는가
『이럴 때 소크라테스라면』의 저자 아비에저 터커는, 플라톤 대화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다섯 작품 크리톤 메논 에우티프론 변론 파이돈이 우리 시대와 호흡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이 책에서 선보였다.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소크라테스와 상대방이 나누는 대화를 단편 소설 형식으로 써내려간 이 책에서, 저자는 플라톤 대화편의 내용 전개를 고집스럽게 따라가며 플라톤 철학의 맥락을 놓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악법도 법이라 말하며 독배를 마시는 장면을, 법치의 상대적 이점을 거론하며 징병 영장에 응하는 청년의 모습으로 그려내거나, 아테네 법정에서의 변론 장면을, 세속적 성공을 위한 교육을 하라는 학교 당국의 요구에 맞서 철학자로서의 양심을 지키며 기꺼이 파면당하는 교육자의 모습으로 재현하거나, 소크라테스의 죽음 장면을, 소신을 위해 안락사를 기쁜 마음으로 선택하는 철학자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등 현대의 딜레마 상황을 글감으로 삼음으로써, 오늘날 우리들이 플라톤의 사상을 우리들 삶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철학 하는 삶의 불편함, 혹은 행복에 대하여
이 책은 플라톤 대화편으로 들어가는 입문서로도 훌륭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철학적 생활 안내서’로도 손색없다.
플라톤이 철학의 중요한 목표로 삼은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으로 사는 기예’로서의 철학이다. 이는 철학이 삶을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데 기여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철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정의나 선함이 무엇인지 볼 수 있고, 그것을 보았을 때 비로소 그런 가치를 따르는 삶, 소신을 밀고 나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이름 아래 수시로 슬픈 혹은 비굴한 타협을 하며 살고 있다. 그러는 사이 스스로 점점 타락하고 있다는 자괴감 속에서 몸부림치든지, 아니면 괴로움을 떨치기 위해 내면의 정의감 자체를 망각하는 삶 쪽으로 가든지 한다.
책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따르는 정의를 논리 정연하게 입증한 후, 거리낌 없이 전쟁터로 향하고 일자리를 거부하고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그는 입술을 꽉 깨물거나 주먹을 불끈 쥐는 대신,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황당함보다는 부러움을 불러일으키는 이 괴짜 철학자의 행동 앞에서, 무엇이 우리에게 가치 있는 삶인지를 곱씹어 본다.
소크라테스가 증명하지 못한 한 가지
“‘이것 보게, 심스.’ 소크라테스는 다소 야단치듯 말하더군요. ‘내가 자네에게 말하지 않았나. 나는 그걸 전혀 증명하지는 못한다고 말이야.’”(380쪽)
안락사를 선택하고 죽음을 맞기 직전의 마지막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죽음 이후 영혼의 삶에 대해 말한다. 신체와 분리된 영혼이 어디로 가서 어떤 경험을 하는지, 어떻게 순수한 관념(idea)들을 만나서 참된 지식을 얻는지, 어떻게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는지 등등에 관한 “신화”를 들려준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납득할 수 없는 두 친구 겸 제자가 거듭 질문을 던지고, 소크라테스는 결국 자신이 제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며, 어쩌면 심지어 추측도 못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신화적인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시종 철저한 논증으로 일관하던 그도, 진리를 확인하고픈 희망과 죽음을 통해 영혼이 순수해질 수 있다는 믿음만은 버리기 싫었는지, 증명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추측도 못 되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철학 하는 삶에는 이성 못지않게 희망, 감정, 의지 역시 중요함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소크라테스가 돌아왔다
소크라테스만큼이나 정의에 목을 매는 저자의(저자에게는 비밀 정보원 노릇을 하면 자리를 보전해 주겠다는 대학 당국의 유혹 대신 해고를 선택한 전력이 있음) 손을 거쳐, 잔소리꾼 소크라테스가 2500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우리 시대에 돌아왔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상대방의 논리적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소크라테스. 그와 상대방이 벌이는 대화를 따라 가다 보면, 수시로 그의 논지에 속수무책으로 말려든다. 하지만 행간을 따라 가는 사이, 자기의 삶을 대하는 그의 진지한 태도와, 논증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그의 생각법이 우리 자신에게 스며든다면, 이만큼 행복한 독서 경험도 드물 것이다.
언론사 서평
[ 문화일보 ] 아비에저 터커의 ‘이럴 때 소크라테스라면’(원더박스) <이럴 때 소크라테스라면> 2014-12-19
[ 경향신문 ] 현대인으로 돌아온 소크라테스 안락사 놓고 왜 토론 즐길까 <이럴 때 소크라테스라면> 2014-12-20
[ 동아일보 ] 신간 단신 <이럴 때 소크라테스라면> 2014-12-20
[ 불교닷컴 ] "인간은 누구나 철학자" <이럴 때 소크라테스라면> 2014-12-29
[ 한겨레신문 ] 소크라테스 철학 연습문제 풀이집 <이럴 때 소크라테스라면> 2015-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