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불교평론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210
1. 우리 시대 불교의 자화상
현대사회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시선은 대체로 밖으로 향해 있다. 밖에 나가면 휘황한 불빛을 자랑하는 광고판들이 우선 시선을 끌고, 집에 들어오면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아니면 스마트폰의 액정화면이 시선을 잡는다. 그렇게 외부를 향하는 시선은 어느 순간부터 혼자만의 고유한 시간과 고적함을 침식하기 시작했고, 우리 한국인들은 어디서든 무언가를 꺼내 들여다보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표정을 지닌 전형적인 현대인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아마도 별생각 없이 주어진 일상에 충실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런 모습을 하게 되었다는 답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주어진 일상에 충실하는 것이 생존을 유지해가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일 뿐만 아니라 실존적 상황에 대한 일정한 성실(誠實)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 일상을 지배하는 또 다른 어떤 맥락일 가능성이 높다. 그 맥락은 모든 것의 상품화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적 일상 속에 숨겨진 탐욕의 제도화와 끝없는 확장 분위기로 구체화해 볼 수 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자에게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이론적으로는 그 맥락에 충실하거나 과감하게 벗어나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자본주의적 일상에서 온전히 벗어나는 일은 거의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적극적으로 충성하거나 소극적으로 따라가는 선택지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나마 적극적으로 충성하고자 해도 그 충성의 대상이 분명치 않아 많은 어려움을 감수해야만 한다. 충성의 대상은 결국 돈이 되겠지만, 그 돈 자체도 실체가 분명치 않을 뿐만 아니라 충성의 방법도 확실치 않아 혼란에 빠지곤 한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일상에 쳇바퀴처럼 매달려 살아가고 있다. 운이 좋아서 돈을 좀 모았다고 해도 그것이 가져다주는 허망함에 몸서리를 치기도 하고, 운이 좋지 않아 돈에 쪼들릴 때는 ‘죽고 싶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며 놀라기도 한다. 그런 고비를 건너다가 아주 가끔씩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같은 회의적인 질문과 만나기도 하지만 그때뿐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상의 굴레로 빠져 들어간다.
그런데 세상은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를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 전 지구적 차원으로 확산되어 있는 생태위기나 국지적으로 끊이지 않고 있는 전쟁이 곧바로 우리의 생존 문제와 직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억지로 깨닫게 하는 사건들이 이어진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위기에도 적응이 되어 무감각해지면서도 막연한 불안감을 온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한다. 특히 아직까지 북한과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는 그들이 인공위성이라고 강조하면서 쏘아 올리는 것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원자력 발전 기술을 수출한다고 자랑하던 대통령을 보고 우쭐한 마음을 갖는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이웃 나라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밥상에서 접하면서 이런 일상이나마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하는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문제라고,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잘 다스리는 연습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그렇게 말하는 스님이나 불교 지도자들이 꽤 있고 그 말의 배후에 숨어 있는 불교철학적 전제들이 지닐 수 있는 함의에 충분히 유의해야 하겠지만 어쩐지 허망한 대안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문제에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서 목소리를 높이는 스님들에 대해서도 온전히 동의해주기가 쉽지 않다. 무언가 불교적인 대안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과연 그런 노력을 통해서 무엇이 얼마나 바뀔 수 있을까 하는 실천론적 회의에서 비롯된 생각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톨릭 같은 실천적인 종교에 비해 불교의 사회참여가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고, 이런 비판은 최소한 현상적으로는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불교는 그 두 지점 사이의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다. 마음공부에 충실하지도 못하고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지도 못하면서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 오늘 우리 불교의 자화상이다.
2. 돈, 섹스, 전쟁 문제에 어떤 해답을 줄 수 있을까
평균적인 한국인이 지금 이 순간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일까? 대학을 졸업하고 그런대로 괜찮은 직장과 배우자를 잡는 데 성공한 어떤 사람을 떠올려보자. 자녀가 두 명쯤 있고 배우자도 직장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집에는 이미 성능 좋은 자동차가 있을 것이고 아이들을 위한 사교육비 지출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만약 전세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그는 집주인이 갑자기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할까 봐 불안해하면서 저축과 재테크에 많은 관심이 있을 가능성도 높다.
이 사람에게는 돈이 가장 큰 관심사일 것이다. 돈을 모을 수 있다면 적절한 범위 안에서 세금을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에 대해서도 도덕적인 기준을 들이대지 않을 것이고, 필요하다면 위장전입을 해서라도 아이를 이른바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직장생활을 하며 많은 술자리와 성적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자리를 가질 가능성이 있고, 대학까지 나온 최소한의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 때문에 국가와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도 일정한 관심이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어보고자 하는 데이비드 로이의 흥미로운 저서 《돈과 섹스, 전쟁 그리고 까르마》(허우성 옮김, 불광출판사, 2012)는 비록 그 대상이 주로 미국인이기는 하지만, 그 스스로 일본에서 오랫동안 대학교수를 지낸 때문인지 우리 동아시아인들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이 문제에 관심을 둬 온 역자의 매끄럽고 정확한 번역이 더해져 읽는 재미까지 보장해준다. 저자는 제목에서부터 돈과 섹스, 전쟁을 부각시키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제도에 더 이상 정의(正義)와 지속가능성이 살아 있다고 믿지 않게 된 우리’의 자화상을 다음과 같은 말로 우리 앞에 들이밀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붓다의 세계와 아주 다르다. 그가 만일 오늘을 살았다면 무엇을 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다. 경제적·군사적·생태적 위기의 지구화는 불교가 강조한 ‘상호의존성’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새로운 유형의 보살(bodhisattva)을 요청하고 있는데, 우리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이 위기들에] 대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사(everything)가 공하다면(empty) 급할 것이 뭔가? 세상을 진정으로 돕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깨달음에 먼저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27쪽)
이 인용문에서 우리가 주목해보아야 할 점은 불교에서 사회적 차원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일이 혹시 붓다의 본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는 한국불교계의 일반적인 풍토이다. 이른바 ‘깨달음 지상주의’라고 비판받는 한국불교계의 분위기는 불교에 과연 제대로 된 사회철학이나 사회윤리가 있는지 하는 의문을 던지게 하는 요인으로까지 작동해왔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이승만, 박정희 독재 정권기를 거치면서 사회정의 문제에 비교적 무관심했던 불교계에 대한 비판이 심화되면서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쉽지 않은 깨달음이라는 목표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로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우려에 대해서 저자는 “우리가 방석 위에서 성취할 수도 있는 개인적인 깨달음(personal awakening)은 사회적 깨달음(social awake-ning)과 널리 퍼져 있는 고통의 제도화된 원인들에 대한 사회적 대응으로 보완되기 전에는 불완전한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라는 적극적인 대응 자세를 취하고 있다(28쪽). 사회윤리가 윤리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개인적 차원의 도덕성을 넘어서는 역할 도덕성과 제도적 차원의 도덕성을 요구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저자는 전형적인 불교 사회윤리학자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불교 사회윤리에 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우리 불교학계와 윤리학계 모두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한다.
그럼 이제 저자가 돈이나 섹스, 전쟁과 같은 우리 시대의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진단과 대응책을 불교 사회윤리적 관점에서 모색하고 있는지를 볼 차례이다. 먼저 돈에 대해서 저자는 지폐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무(nothing)이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버린 현실을 직시하면서 우리 대부분은 좀 더 넉넉한 돈을 간절히 갖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느끼는 결핍감의 원인이 ‘넉넉하지 않은 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불교적 관점의 분석과 해결책으로는 우리가 느끼는 공허감과 같은 정신적 문제를 외부의 어떤 것과 결부하여 해결하려는 헛된 노력에 대해 성찰하면서 돈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일 뿐’임을 자각하는 일이라고 말한다(55쪽).
그의 분석에는 심정적으로 동의하면서도 해결책에 대해서는 실망을 금하기 어렵다. 사회적 깨달음과 제도화된 고통에 대한 사회적 대응책이 제대로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섹스 문제에 대해서도 비슷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섹스와 낭만적 사랑이라는 환상에 얽매어 있으면서 자신이 느끼는 공허감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메우려고 노력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은 것을 바라는 헛된 추구에 불과함을 깨달으면 된다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뿐이다. 저자는 “(섹스) 문제의 핵심은 자유롭게 깨어서(무주의 깨달음에서) 성적 충동을 바라볼 수 있느냐이다.”라고 말하면서(113쪽), “섹스를 통한 자기만족의 신화가 없다면 우리는 성에 덜 사로잡힐 것이고, 그 결과 기대가 좌절되더라도 고통을 덜 느끼게 된다(122쪽).”라는 밋밋한 결론을 제시하는 데 그침으로써 우리를 실망시킨다.
사회적이고 국가적 차원의 대응책에 더 요구될 것 같은 전쟁 문제에 대해서도 저자는 “전쟁은 우리의 개인적인 결핍을 묶어서 외부의 적에게 투사하는 단순한 방법을 제공한다(207쪽).”는 점에서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중독성까지 지닐 수 있다고 분석하고서는 역시 해결책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그토록 왜소하게 경험하게 하는 습관적인 사유 패턴과 행동 패턴을 원상태로 되돌려 일상에서 영적 차원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206-207쪽).”라는 말로 대신하고 만다. 그러면서 그는 “결국 나는 종교 근본주의자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옳다고 말하는 것이다(207쪽).”라고 말함으로써 그 한계를 시인하는 듯한 결론을 덧붙이고 있다.
붓다의 근본 가르침에 충실해서 제시하고 있는 저자의 날카로운 현상 분석에는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그 해결책에 대해서는 실망감을 금할 수 없는, 이런 불일치의 느낌은 마지막 장 ‘불교 혁명을 위한 노트’를 읽으면서 어쩌면 저자의 의도에 내가 제대로 말려들어 간 것은 아닌가 하는 묘한 느낌으로 바뀐다. 그는 “사회 참여 불교도가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을 궁극적으로는 작은 일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하지만 불교에서 집단의식의 해방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진정한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 밝히는 일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깨어 있는 불교가 특별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230쪽).”라는 말로 책의 마지막 문단을 채우고 있다.
우리 시대에 불교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로이가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문제가 마음속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잘못된 시도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각 개인의 깨달음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기회와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라는 사실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가? 이미 우리 사회구조의 차원에서 공업(共業)으로 굳어진 문제들에 대한 구조적 차원의 인식과 제도적 대안에 대한 적극적 관심은 불교의 몫에서 제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연기성(緣起性)의 기반 위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각 개인의 사회적 고통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 시대와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소해 나가기 위한 출발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우선 그 깨달음의 완전한 수준을 확보하는 일이 지난한 과제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고 동시에 공업(共業)이 지니는 왜곡된 자성(自性)이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니면서 우리 삶을 압박해오고 있는 차원의 문제에 대해 분명히 깨닫고 그 수준에 맞는 제도적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도 절실하다. 로이의 이 책은 그런 점을 모두 고려하는 진정한 불교 사회윤리가 이론적·실천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모색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 ■
박병기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대 윤리교육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 수료. 전주교대 교수 역임. 저서로 《우리 시대의 문화와 사회윤리》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등이 있다. 현재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전문위원,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전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