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지 않을 권리]
지금 프랑스에서는 '선천적 장애인은 태어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라는 프랑스 최고법원의 판결이 새삼 윤리 논쟁을 촉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최고 법원은 '다운증후군'을 갖고 태어 난 남자 아이에 대해, 그의 엄마가 자신의 아기가 그런 선천적 장애를 가진 줄 알았다면 자신은 낙태했을 것이라며 제기한 손해 배상 소송에서 '태어나지 않을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장애인 단체들은 '국가가 장애인으로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게 낫다' 는 판결을 내렸다며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장애자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야 할 존재인가?
불교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태어 나면서, 또는 살면서 신체적 장애를 가지게 되는 것은 대개 두 가지 원인에 의해서라고 합니다. 첫 째는 자신의 업에 의해서입니다. 그런 장애를 입을 업을 과거에 지었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온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에 의하면 장애는 비록 금생에 불편하고 힘든 것이지만 과거 업의 소멸을 가져 오기 위한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으므로 긍정적으로 받아 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에서의 인과응보란 피할 수 없는 것이라, 낙태 등의 방법에 의해 금생에 그 고통을 겪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겪어야 할 피할 수 없는 일이니 그렇다면 차라리 순리대로 금생에 그대로 받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는 자신과 이웃의 성장을 위해 오는 장애입니다. 이는 겉보기에는 나를 괴롭히고 이웃을 괴롭히려 오는 것 같으나, 사실은 그런 장애를 통해 스스로의 영적 세계가 성장하고 또 이웃들의 영적 세계는 물론 자신과 비슷한 장애를 앓는 분들에게 희망을 주게 되는 경우입니다. 헬렌 켈러 여사나 호킹 박사, 그리고 오체불만족의 오토다케 같은 분들이 이런 부류에 속합니다. 이 분들은 말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도 모두 희망을 창조한 분들입니다. 이 분들이 자신의 성장은 물론, 그런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창조하셨기에 다른 분들이 이 분들의 삶에서 희망을 보고 꿋꿋이 살아 가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장애 때문에 태어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백보를 양보해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이유가 진정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보면, 사실은 '태어나지 않을 권리'가 아니라 '태어나지 않게 할 권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식의 권리' 가 아니라 '부모의 권리'를 자식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프랑스 장애인 협회의 분노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종린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