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불(成佛)은 행불(行佛)]-성불은 어떻게 오는가?
흔히 우리는 성불은 '깨달아' 이룬다고 합니다. 견성성불이라, '견성'하여 '성불'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성불은 부처님 행을 함(行佛)으로써 오게 된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성불은 어떤 특별한 비법, 특별한수련에 의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행'을 '일상생활'에서 '직접 행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깨쳐야 하는가? 그것은 깨쳐야만 모든 경계에서 진정한 해탈행이 나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법이 모두 공하며 세상에 집착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리고 공함도 그냥 공한 것이 아니라 없는 줄 아는 그 곳에 실지로는 모든 것이 있다는 것! 온 우주가 텅 빈 것 같지만 사실은 마음(佛性)으로 가득 찬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라는 것은 확철하게 알아야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중생에 대한 진정한 자비심이 생기며 진실로 온전한 부처의 삶을 살 수 있기에 우리는 맹세코 깨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행이 꼭 완전히 깨쳐야만 할 수 있는가? 저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깨닫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비록 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부처님 행'은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도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세상 대부분의 일이 지식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일단 행으로 하기가 쉽지 않습니까?). 그것은 부처님이 이미 깨치셔서 깨친 자의 행이 어떤 것이다, 라고 이미 밝혀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성내지 않는 것'이 바로 부처님 행입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비록 누가 봐도 당연히 성을 낼 자리에서 성을 안 내는 것이 바로 부처님 행인 것입니다.
탐욕도 마찬 가지입니다. 누가 봐도 당연히 탐할 자리인데도 그 마음 한번 내지 않는 것이 바로 부처님 행인 것입니다.
우리가 백 가지 만 가지 일에서 성을 내지 않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일체의 본성이 공(空)함을 투철하게깨닫지 못한 범부로서는 그야말로 백 번을 죽었다 살아나도 이루기 어려운 까마득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중에 단 한 번을 참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비록 깨닫지 못해 백 번 중에 구십아홉 번은 실패하더라도 지금 이 자리, 지금 이 순간 단 한 번 참는 것은 마음만 굳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머지 구십 아홉 번은 예전처럼 화내며 그렇게 산다 하더라도 이번 한 번만은 참아 보자, 하는 그런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깨닫지 못한 주제에 이러다가 나중에 비록 예전보다 더한 화를 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 지금의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나는, 이 순간만은 화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탐심도 마찬 가지입니다. 비록 나중에 어떠한 큰 욕심을 낼지 모르나, 지금 이 순간만은 참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불(行佛)'이요 '부처님 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면 어느새 그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됩니다. 그러다 보면 구십 아홉 번을 화내던 사람이 나도 모르게 구십 아홉 번을 화를 안 내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성불은 먼 하늘 별빛도 아니오 까마득히 먼 미래의 일도 아닙니다. 어쩌면 성불은 이렇게 쉬이 오고 이렇게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부처님 행을 행하다 보면 어느 순간 업장이 툭! 떨어지는 때가 옵니다. 물론 다생의 업장 모두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최근 얼마 동안 이루어진 업장은 내게서 뚝 떨어져 나가는 것이 느껴 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아! 업장이 나갔구나! 녹았구나! 하는 것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인이 스스로 알게 됩니다. 그럴 때면 안심하는 마음보다는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듭니다. 입에서 저절로 아이구, 부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나도모르게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토록 어려움을 참아가며 스승을 찾고 부처님 법을 배우려 하는 것도 결국은 이런 '부처님 행을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제법(諸法)이 공(空)한 것을 그토록 체험하려 하는 이유도 바로 일상생활 모두에서 탐진치 삼독심을 내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그러니 불교가 무엇이냐고 묻는 백낙천의 말에 조과 선사는 칠불통게를 말씀하셨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공부 자리에서 제법의 소식을 훤히 알아도, 일상생활에서 조그만 일에 분노를 버리지 못하고 조그만 이익에 탐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 가족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고 내 이웃 섭수하지 못하고서야 어찌 마음을 밝혔고 공부를 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두가 부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런 이유로 '깨달아 부처 이루는 것'보다는 그저 하루 하루 부처님 행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깨닫고 나서 부처님 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깨닫지 못했더라도 지금부터 부처님이 알려주신 그 부처님 행을 작지만은 조금이라도 실천하며 살아 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내 있는 이 자리 바로 이 시간에 망둥이처럼 날뛰는 내 마음 한 번 쉬어 보고, 나중에야 삼수갑산을 갈지언정 지금 있는 이 곳에서 내 마음 단 한 번이라도 부처님 행으로 갈 때, 성불은 깨달음과 함께 말없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 오고 있을 것입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나무 아미타불
이 종린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