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병의 평화모니] 개똥이 말똥이 말도 귀담아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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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의 평화모니] 개똥이 말똥이 말도 귀담아듣자
  • 윤구병
  • 승인 2016.09.0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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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와 불경언해에서 신미 대사가 어떤 몫을 했는지에 대한 논의가 첫발자국을 떼었다. 바람직한 일이다. 이 말 밥의 첫술을 뜬 이는 박해진 씨로 알려져 있다. 이 분은 열두 해에 걸쳐 신미 스님의 발자취를 뒤쫓았다 한다.

그렇게 해서 그동안 ‘생몰연대미상’으로 알려진 신미 대사가 김수온(1410~1481)의 맏형으로 세속 이름이 김수성이고 1403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머리를 깎기 전에 집현전에서 일했다는 자취도 밝혀졌다. 오랫동안 알려져 있지 않던 신미의 행적이 뒤늦게나마 이렇게 알려지게 된 데에는 누구보다 박해진 씨의 공이 크다. 

내가 이 자리에서 살펴보려는 것은 훈민정음 창제에서 신미가 맡았던 일이 무엇이었는지가 아니다. 신미는 세조 10년(1464년)에 간행된 『선종영가집 언해』의 발문에 아래와 같이 쓴다.
 
“이 일(깨우침을 얻음)은 몸(體)이 치우치거나 뚜렷이 아우름을 그치며 모습이 바르고 굽음을 여의어 있는 데마다 밝디밝되 보아도 보지 못하며 날마다 쓰고 있으나 그 쓰임을 애써도 얻을 길이 없다. 그 뜻을 잃으면 아무리 오래 힘겹게 닦아도 제자리걸음일 뿐이나 그 실마리를 얻으면 하루아침에 여러 부처들과 하나가 된다. 영가 대사께서 조계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홀로 숨은 뜻을 이어받으시고 이 뜻을 뭇산이(중생)의 마음에 널리 새기려고 하시어 열 토막 글로 나타내기 힘겨운 결을 드러내시며 부처님 살아계실 때의 가르침을 손에 쥐기 힘든 말로 다 잡아 내셨으니, 이제 우리 임금께서 하늘이 내리신 말과 슬기로 힘써 좋게좋게 달래심을 내리시어 온갖 일 하시는 겨를을 타서 귀머거리와 장님까지도 귀와 눈을 열어 밝게 (듣고 보게) 하시려고 이 선종의 경전에 몸소 입곁(口訣)을 달아 선비들에게 이르시고 머리 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일일이 말로 아로새기고 널판에 새겨 퍼뜨리게 하시니, 한갓 참선하는 형제들로 하여금 말을 듣고 글을 알고, 글을 보고 뜻을 얻게 할 뿐 아니라, 흥정바지(거간꾼)와 동잣어미(부엌 아낙네)들까지 모두 부처님과 큰스님들의 뜻을 얻어들을 수 있게 하셨다.”
 
참고로 신미 대사의 약력을 밝히자면, 조선조 세종~세조 때 불경언해에 앞장선 선승으로 법주사에서 머리를 깎고 사미승 시절에 수미守眉와 함께 대장경을 읽고 율을 익힌 뒤에 세종 말년에 왕을 도와 여러 불사를 일으켰고, 궁궐 안에 내원당을 짓고, 설법을 하는 등 불법을 널리 퍼뜨리는 데에 앞장섰다 한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그이를 ‘선교도총섭’에 임명했는데 이 지위는 고려시대 왕사나 국사에 맞먹는다 한다.
 
신미는 왕의 힘에 기대 간경도감을 세우게 하고 훈민정음을 널리 알리려는 뜻으로, 『법화경』, 『반야심경』, 『선종영가집』 등 불교 관련 책들을 언해하였다. 세조도 그이에게 크게 기대 상원사 다시 세우기에 맞장구를 치고 몸소 ‘오대산 상원사 중창 권선문’을 쓰기까지 했다 한다. 죽은 뒤에 세종의 유언에 따라 우국이세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子라는 시호를 받았다. 신미에 대해서 더 꼼꼼히 알고 싶은 사람은 박해진의 『훈민정음의 길 - 혜각존자 신미 평전』을 읽으시라.
 
불경을 비롯하여 이런저런 책들을 훈민정음(한글)으로 말풀이(언해)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말 우리글을 널리 퍼뜨리는 데에 집현전 학자들이나 이른바 사대부 출신의 유학자들이 큰 도움이 안 되었을 것은 불 보듯이 환한 일이다. 이 사람들은 사는 곳이 한양 땅인데다가 어려서부터 머리털이 희어지도록 압록강 건너온 한자에만 코를 박고 있어서 백성들 사이에서 서로 주고받는 입말을 제대로 알 턱이 없었다.(이 점에서는 학자나 대학교수 같은 요즈음 먹물들도 도긴개긴이다.) 조선시대 중들은 조금 달랐다.
 
도성(서울 땅) 사대문 안에 들어서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을 만큼 사람대접을 못 받았을 뿐더러 절집을 옮겨 다니느라 조선 팔도 안 가 본 곳이 없을 만큼 여러 지역을 떠돌아 각 지방 사투리(지역표준말)가 귀에 익었을 것이고, 탁발을 하러 이집 저집 기웃거리고, ‘하화중생’을 하느라고 이 사람 저 사람과 말문을 텄을 터이니, 저절로 뭇산이들의 말투를 익혔을 것이다. 그 증거가 있다.
 
같은 중 노릇을 했다지만 효령대군은 『선종영가집 언해』에 발문을 쓰는데 토단 것만 빼고는 우리 입말을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구중궁궐 안에서 어렸을 때부터 익힌 말이라고는 왕자의 교육을 맡은 선생들 입에서 나오는 한자어밖에 없었을 테니, 그 한자어에 해당하는 우리말에는 까막눈이 될 수밖에 없었을 터. 그와는 달리 신미가 쓴 글에는 ‘입곁’(구결), ‘겨를’, ‘흥정바지’, ‘동잣어미’ 같은 토박이말이 줄을 잇는다.
 
그러나 ‘언해’가 제 꼴을 갖춘 데에 그 일에 머리를 맞댄 중들이 앞장섰다고만 보기는 힘들다. 『금강경언해』에도 『선종영가집 언해』에도 중들 이름이 여럿 나온다. 혜원, 도연, 계연, 신지, 도성, 각주, 효령대군, 해초, 홍일, 명신, 연희, 정심, 효은, 혜통… …. 이 사람들이 언해 작업에 큰 몫을 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사람들도 먹물은 먹물이다.
 
신미가 먹물 중의 먹물이었음은 이미 밝혀졌다. 신미를 둘러싼 그 밖의 중들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이들은 비록 먹물 출신이었더라도 ‘중생구제’의 뜻이 있었을 터이니, 그리고 그이들이 만나는 중생들은 거의 다 까막눈이 무지렁이였을 테니, 반거충이쯤은 됐겠다.
 
그런데 『금강경언해』를 살펴보면 그 안에 낯선 이름들, 그러나 못 배운 뭇 중생들 귀에는 조금도 낯설지 않은 이름들이 여럿 숨어 있다. 조씨(이름이 없다), 장말동(말똥이), 장종손(종손이), 최순동(순둥이), 김금음(그믐이), 진개종(개똥이), 양수(양쇠), 허맹손(맹손이), 김선(김아무개)… …. 이 사람들이 한자말을 언문(우리말글)으로 옮기고, 번역된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뜻을 새긴다. 이제 알겠는가? 
 
신미가 쓴 발문 가운데 눈여겨볼 말이 몇 마디 있다. ‘귀머거리와 장님까지도 귀와 눈을 열어 밝게 (듣고 보게) 하시려고’, ‘흥정바지와 동잣어미들까지 모두 부처님과 큰스님들 뜻을 얻어들을 수 있게’. 어디서 본 듯한 글, 들은 듯한 말 아닌가? 그렇다. ‘어제훈민정음해례본’에 나오는 말이다. ‘어린 백성이 이르고져 할 바 있어도 털어놓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많은지라’, ‘내 이를 어엿비(가엾게) 여겨’. 세종 임금의 두루뭉술한 말을 신미가 조금 더 손에 잡히게 했을 뿐이다. 
 
도법 스님 방에 불한당(불교경전을 한글로 바꾸는 패거리)들이 모여 의상의 『법성계』나 원효의 『화엄경종요』, 보조의 『수심결』 같은 우리 옛 큰스님들이 쓴 글들을 우리말로 바꾸어 보자고 애쓴 데에는 다른 까닭이 없다.(그 첫 열매인 『법성계』 우리말 풀이가 곧 책으로 나온다 하니 지켜볼 일이다. 아쉬운 것은 그 패거리 가운데 먹물들은 많았으나, 딱 한 사람만 빼고 개똥이 말똥이가 없어서 번듯한 우리말로 옮기는 일에 어려움이 따랐다는 점이다.) 
 
해가 갈수록 교양 있고 유식한 스님들이 늘고 있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 낌새는 군국주의 일본이 이 나라를 짓밟은 뒤로 그 나라에서 그 나라 말로 번역된 불교 용어들이 우리말 탈을 쓴 채 하나둘 스며들고, 버젓하게 우리말 행세를 하던 식민지 시절부터 엿보였다. 그 뒤로 더 많은 ‘납자’들이 물 건너갔다 돌아왔다. 그리고 여기저기 많은 글들을 쓰고 있다. 그런데 그이들이 쓰는 글들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끼리끼리 모여서 ‘학회’도 열고, 이런저런 모임도 갖지만, 거기에서 주고받는 말들이 심오한 듯하나 불교소양이 없는 개똥이 말똥이들에게는 눈에 설고 귀에 선 전문용어 투성이다. 
 
‘하화중생’을 하려면 중들이 다시 저잣거리에 나서야 한다. 비렁뱅이가 되어 이집 저집 들락날락하면서 탁발을 하거나 팔 걷어붙이고 막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손을 나누어야 한다. 이미 ‘양중’(기독교 수사) 가운데는 가사장삼 버리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채 막일꾼으로 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 애달프다. 애달프다는 말뜻도 모르는 이들이 너무 많아 더더욱 애달프다. 애쓴다, 애탄다, 애가 끓는다. 애 터진다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이순신이 읊었다는 ‘남의 애를 끊나니’라는 시조를 한 번쯤 안 들어 본 사람도 없겠지.(애는 한자어로 창자, 내장이다) 그러나 ‘애닳브다’(애가 닳는 것 같다)에서 ‘애달프다’가 나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으리라. 애닳아서 아픔을 견딜 수 없는 뭇산이들이 이리저리 눈길을 돌려 찾는데도 선뜻 나서는 이가 머리 깎은 이들 가운데 몇이나 될까. ‘마음은 맨 먼저 아픈 데에 간다.’는 말은 도법 스님이 일깨워 준 말이다. 두고두고 새길 말이다.
 
몸 앓이, 가슴앓이로 몸살을 앓고 있는 개똥이 말똥이들의 신음 소리를 귓전에 흘려듣는 마음공부 어디에다 쓸까.
 
말이 너무 어려웠나. 너무 앞섰나.                                                    
 
 
윤구병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대학원을 나오고 월간 「뿌리깊은나무」 편집장을 거쳐 충북대학교에서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1995년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북 부안으로 낙향, 농사를 지으면서 대안교육을 하는 ‘변산교육공동체’를 설립해 20여 가구가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어린이 전문 출판사인 보리출판사를 설립해 많은 어린이 책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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